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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편지

[나무편지] 봄을 가장 먼저 노래하는 꽃, 산수유 꽃의 머뭇거림이 ……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5. 3. 24. 14:10

[나무편지] 봄을 가장 먼저 노래하는 꽃, 산수유 꽃의 머뭇거림이 ……

   ★ 1,280번째 《나무편지》 ★

   그곳의 산수유는 다 피었나요? 낮 기온이 26.8도(22일, 경남 의령)까지 올라가는 한여름 날씨의 3월, 산수유는 이미 개화를 마쳤어야 하겠지요. 낮 기온과 20도 정도 차이나는 낮은 아침 기온을 핑계로 머뭇거릴 여유는 없습니다. 날씨 변화를 도무지 짐작하기 어려운 시절이지만 아마도 낮 기온 27도까지 올라가는 한여름 날씨가 금세 예년의 봄 날씨로 돌아가지 않을 건 분명해 보이니까요. 주말의 낮 기온은 평년에 비해 10도 이상 높은 거였다고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어지는 곳곳의 산불 소식까지, 심상치 않은 이 땅의 날씨 사정이 불안을 넘어 두려움을 자아내는 날들입니다.

   지난 주에는 봄꽃 소식 따라 길 나서려 했다가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치통이 심해서였습니다. 얼굴 한쪽의 턱 쪽이 팅팅 부어올라 불균형해지고 푸르게 멍까지 든 맨 얼굴로는 바깥에 나다니기 부끄러울 지경이었습니다. 마스크로 얼굴을 감싸고 겨우 바깥에 나올 수야 있었지만, 미관상의 불편함보다는 참기 힘든 통증이 잦아들지 않아 결국은 꼼꼼히 잡아두었던 길 위의 모든 계획을 내려놓고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꼬무락꼬무락 피어오르는 산수유 작은 꽃망울의 꼼지락거림이 눈앞에 어른거렸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주말 지나며 얼굴의 붓기가 좀 가라앉아 마스크 없이 작업실에 나와 다시 미뤄두었던 일정을 살펴봅니다.

   봄을 건너 뛰려는 듯한 뜨거운 날씨에도 내가 사는 마을 아파트 담벼락에 서 있는 산수유는 고작 노란 꽃잎을 살짝 내비쳤을 뿐, 아직 제대로 피어나지 않았습니다. 꽃 피울 절대 시간이 모자랐던 탓이겠지요. 이 땅의 봄을 상징하는 여러 나무와 꽃이 있습니다만, 그 가운데 사람의 마음을 가장 설레게 하는 건 산수유 꽃입니다. 최소한 내게는 그렇습니다. 겨우내 마흔 개 가까운 꽃송이를 감싸 안은 견고한 꽃봉오리로 지낸 뒤에 이 즈음이면 하늘에서 내려오는 따뜻한 봄 햇살을 받아 껍질을 깨고 서서히 벌어지는 꽃봉오리의 신비로운 개화는 언제 어느 봄이라도 경이롭습니다.

   마치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오려는 어린 병아리가 작은 알 안쪽에서 여린 부리로 껍질을 쪼아대고, 가만히 바깥에서 지켜보는 어미 닭이 맞춤하게 껍질 깨기를 도와주는 줄탁동시(啄啄同時)를 떠올리게 하는 생명의 신비입니다. 그 엄중하고도 경이로운 생명의 부릿짓을 거친 산수유 꽃의 노란 꽃잎은 앙증맞은 구슬 모양의 꽃차례 주머니 껍질을 깨고 노랗게 노랗게 얼굴을 내밉니다. 그 앙증맞은 구슬 모양의 주머니 안쪽에서 뻗어나온 꽃송이는 무려 40송이나 됩니다. 좀 적다 해도 20송이를 넘습니다. 이 어찌 경이롭다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참 신비로운 개화 과정입니다.

   기온 빠르게 오르고 주중에는 봄비까지 내린다 하니, 이번 주말이면 길가 울타리가 노랗게 물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직 덜 피어난 산수유 꽃 아래쪽으로는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개나리들도 서둘러 노란 꽃송이를 내밀겠지요. 매실나무 꽃 매화도 아직 덜 피었다는 소식이지만, 산수유 꽃도 서둘러야 합니다. 자칫하다가는 벌써 활짝 피어난 목련에게, 혹은 지금 막 껍질을 깨는 중인 진달래 개나리 꽃에게 ‘봄의 전령’ 자리를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치통과 함께 조마조마하게 맞이하는 봄날 아침입니다.

   오늘 《나무편지》에 담은 사진은 오래된 사진첩에서 끄집어낸 산수유 풍경들입니다.

   고맙습니다.

3월 24일 아침에 1,280번째 《나무편지》 올립니다.
  - 고규홍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