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무편지] 사람살이의 아픔을 안고 생명활동을 멈춘 절집 향나무

★ 1,279번째 《나무편지》 ★
홈페이지 중간에 번번이 올려놓는 신문 연재 칼럼이 있습니다. 《경향신문》에 격주로 화요일에 실리는 〈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라는 칼럼입니다. 2021년에 연재를 시작했으니, 벌써 5년째 되는 연재 칼럼이네요. 우리 곁에 살아있는 큰 나무 이야기를 전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좋은 일이지만, 지면이 제한되어 있어서, 오래 된 큰 나무에 담긴 사연들을 온전히 담지 못하는 게 늘 아쉽습니다. 한 달쯤 전에 쓴 〈강화 보문사 향나무〉 이야기도 그랬습니다. 최근의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찾아가 담아온 사진도 넉넉히 보여드릴 수 없다는 점도 그렇습니다.

신문에 게재된 칼럼은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bit.ly/41Tq2tD <== 경향신문 사이트에서 칼럼 보기
보시다시피 절집 보문사의 창건 설화와 이 절집의 오래 된 향나무 이야기는 겨우 껍데기만 훑어가는 게 전부입니다. 나무에 담긴 의미를 짚어볼 만한 이야기를 넉넉히 써야 하지만, 그에 앞서, 나무의 크기와 연륜과 같은 기본적인 정보만 담다보면 벌써 지면에 허락된 분량이 가득차고 맙니다. 신문 칼럼에서 채 다 하지 못한 이야기를 오늘 《나무편지》에 담아 전해드립니다.

우선 1400년 전인 신라 진덕여왕 때의 이야기부터 전해드립니다. 보문사가 처음 지어진 서기 649년(진덕여왕 3년)의 일입니다. 그때 이 마을에 살고 있던 한 어부가 바다에 그물을 던졌는데, 고기는 안 잡히고, 사람 모양의 돌덩이 22개가 한꺼번에 걸렸습니다. 어부는 아무 생각 없이 돌덩이를 내버리고, 다시 그물을 던졌으나 똑같은 돌덩이들이 다시 걸렸어요. 고기를 못 잡아 낙담한 어부는 돌덩이들을 버린 채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날 밤 어부의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 이르기를, 그 돌덩이들은 천축국에서 보내온 귀중한 불상이니, 이를 건져내 아름다운 산, 양지바른 곳에 봉안해 달라고 했습니다.

어부는 다음 날 노승의 당부대로 불상을 건져 올려 석모도의 낙가산으로 옮겨가려 했습니다. 용을 쓰며 불상을 옮기던 중 지금의 보문사 석굴 앞에 이르자 불상은 갑자기 무거워지면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부는 바로 이 석굴이 불상을 봉안할 신령스러운 장소라 생각하고 석굴 안에 불상을 모시게 됐다고 합니다. 불상을 석굴에 모신 절집으로 유명한 보문사의 창건 설화입니다. 보문사를 찾는 사람들은 누구나 바로 이 석굴 안의 불상을 만나보게 됩니다. 오늘 이야기하는 〈강화 보문사 향나무〉는 바로 이 석굴 앞에서 석굴의 신비만큼 신비롭게 자라난 나무입니다.

나무는 석굴 바로 앞에 떡허니 버티고 선 바위 덩어리 틈에서 솟아나 힘겹게 자랐습니다. 바위 틈이라면, 나무가 자라기 어려운 조건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칠백 년이라는 긴 세월을 잘 버티고 자라온 것을 바라보면, 이 나무에 불심의 신비가 서려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보문사의 향나무는 인천시 지방기념물로 지정됐다가 지난 해에 ‘자연유산법’이 제정되면서 ‘인천광역시 자연유산’으로 이름을 바꾸어 보존되는 상태입니다. 땅으로부터 1.5m쯤 높이의 바위 위에서 자라난 이 향나무는 키가 7m쯤 되는데, 나무 줄기의 크기를 측정하는 ‘가슴높이 줄기 둘레’는 약 3m입니다. 이 나무에 대해 문화재청의 기록은 키를 20m라 적고 있지만, 이는 잘못 측정한 값이거나, 오래 전의 기록입니다.

이 향나무가 1950년 한국전쟁 때 생명 활동을 중지했다는 게 이 날 신문 칼럼에 이 나무를 소개하려는 의도였고, 충분치는 않아도 그런 의도를 드러내기는 했습니다. 칼럼에 소개한 것처럼 향나무는 겨울에도 잎을 떨구지 않는 상록성 나무이지만, 잎이 다 떨어지고, 나무 줄기조차 다 말라버렸다는 거죠. 절집 사람들 누구라도 나무가 죽었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러나 죽은 듯이 지내던 이 향나무가 3년 쯤 흐른 뒤, 전쟁의 상처를 씻고 폐허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다시 푸른 잎을 돋우고 줄기에도 물이 올랐다고 합니다. 동족상잔의 잔혹한 참상을 나무도 함께 슬퍼했다는 거지요.

오래된 절집 보문사는 향나무와 함께 기억하게 되는 절집입니다. 절집 경내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바로 이 향나무입니다. 보문사를 찾으면 누구라도 바다에서 건져 올린 불상을 모신 석실을 찾게 될 것이고, 석실로 들어서려면 석실 앞에 향나무를 피할 수 없습니다. 특히 석실에서 불상께 인사 올리고 돌아나오는 길이라면 석실 입구를 막아선 향나무에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석실을 나서는 불자들은 자연스레 나무 주위를 한 바퀴 돌게 됩니다. 마치 여느 절집의 법당 앞 탑 주위에서 탑돌이를 하며 소원을 비는 것과 똑같습니다.

나무 주위를 천천히 돌며 걷다가 잠시 멈춰서서 나무의 안쪽 줄기를 들여다보게 되면 긴 세월의 풍상을 간직한 향나무 줄기의 경이로운 모습에 감탄사를 내놓게 됩니다. 자연히 강화 석모도 보문사는 ‘향나무가 신비로운 절집’으로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봄볕 따사로워지면서 벌써 지난 겨울이 유난스레 혹독했다는 사실을 잊어가는 듯합니다. 길고 추웠던 겨울이 이제는 물러가는 중입니다. 멈췄던 우리 모든 생명의 약동이 우렁차게 울려야 할 때입니다.
오늘 《나무편지》에 담은 사진은 모두 지난 1월 말에 찾아본 〈강화 보문사 향나무〉의 사진입니다.
고맙습니다.
3월 17일 아침에 1,279번째 《나무편지》 올립니다.
- 고규홍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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