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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편지

죽음의 고비를 넘고 넘어 30년… 아주 특별한 은행나무(3, 끝)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12. 16. 14:53

[나무편지] 죽음의 고비를 넘고 넘어 30년… 아주 특별한 은행나무(3, 끝)

  ★ 1,264번째 《나무편지》 ★

   아직 세상 하수상하여도 지금은 ‘아침’입니다. 오늘 《나무편지》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 이어온 〈안동 용계리 은행나무〉의 남은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죽음의 고비를 간신히 넘어서서 살아남아, 마침내 세계기네스북에 등재되기까지의 긴 이야기는 지난 번 《나무편지》에서 두 차례로 나누어 말씀드렸습니다. 충분하달 수는 없어도 대강의 흐름은 알 수 있으셨을 겁니다. 혹시 더 궁금하신 게 있으면 따로 말씀해 주세요. 제가 아는 한, 혹은 더 알아볼 게 있다면 더 알아봐서 전해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이 나무를 돌아볼 때면 떠올릴 수밖에 없는 한 사람 이야기를 전해드리면서 셋으로 나누어 전해드린 〈안동 용계리 은행나무〉 이야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아! 사람 이야기 전에 덧붙여야 할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안동 용계리 은행나무〉 이야기 첫 번째 《나무편지》에서 이 나무의 가슴높이줄기둘레를 14미터라고만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나무의 가슴높이줄기둘레 값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나무의 가슴높이줄기둘레는 대략 1~1.5미터 부근에서 재는데요. 그 부분에서 이 나무는 이미 줄기가 여럿으로 갈라졌거든요. 그렇다면 어떻게 14미터라고 하느냐는 질문이 나오겠지요. 그건 이 나무의 상식 공사 이전에 측정한 값입니다. 상식공사를 하면서 나무의 상당 부분에 복토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가슴높이줄기둘레의 측정 기준이 되는 1~1.5미터 부근은 흙 속에 잠겼음을 여기에 보태고 사람 이야기로 이어가겠습니다.

   용계리 수몰지구 주민 이주 과정에서 딱 한 분은 “도저히 할배 나무 곁을 떠날 수 없다”셨습니다. 한참을 설득했으나 도저히 이 할머니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시청에서는 이 할머니에게 ‘〈안동 용계리 은행나무〉 관리’를 맡기기로 하고, 나무 곁에 작은 집 한 채를 지어주기로 했습니다. 지금도 남아있는 ‘은행나무 기념관’이 그 작은 집입니다. 시청의 입장에서는 곡절을 딛고 살아난 나무를 세심히 살필 필요도 있는 상황이어서, 좋은 선택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이 마을에서 긴 세월을 살아온 월로댁 할머니인데요. 그 분의 자식들은 대처로 떠나고, 홀로 살아가시던 중이었습니다.

   월로댁 할머니는 그래서 상식 공사 뒤에 나무 곁에서 홀로 살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이 할머니에게 나무 관리를 맡긴 게 아주 절묘했다는 건 그 뒤에 확인되었습니다. 월로댁 할머니는 종종 할배나무 즉 〈안동 용계리 은행나무〉의 꿈을 꾸신다고 했습니다. 할배나무는 할머니의 꿈에 나타나서 “목 마르다, 목 마르다” 하신답니다. 그 꿈에서 깨어난 아침이면 월로댁 할머니는 머뭇거림 없이 곧바로 안동시청에 전화를 걸어서 “할배나무에 물 줄 때다”라고 연락을 하십니다. 그러면 시청에서는 물차를 가지고 와서 나무에게 물을 주곤 했다는 겁니다. 할머니의 꿈과 나무에 물을 주어야 할 시기가 절묘하게 알맞춤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이해하시려면 앞의 이 나무 상식공사 과정을 돌아보셔야 합니다. 앞에서 공사과정에서 나무를 살짝 들어올리고, 그 틈바구니에 자갈돌과 모래와 흙을 채워넣었다고 했어요. 거기에 추가로 섞은 게 석회였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건 콘크리트와 같이 단단하게 하려는 고육지책이라는 것까지 말씀드렸지요. 상식공사가 성공적으로 끝난 지금 우리 눈으로 보기에 나무는 땅 깊은 곳에 뿌리내린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사실 아래 쪽으로 파고들어가면 일정한 깊이에는 여전히 콘크리트로 막혀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이 나무는 뿌리에서 끌어올리는 물만으로 살아가기 어려운 상태인 겁니다. 할 수 없이 위에서 물을 공급해줘야 하는 상황인데, 그 시기를 월로댁 할머니가 정확하게 맞추었다는 겁니다. 결과적으로 월로댁 할머니는 〈안동 용계리 은행나무〉 최고의 관리인이었던 겁니다.

   월로댁 할머니는 비교적 무뚝뚝한 편이었어요.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도 눈길 한번 제대로 주지 않고 그냥 할머니 일만 하시곤 했지요. 그런데 1999년 가을에 이 나무를 처음 본 나는 나무를 자주 찾아갔고(처음에는 한해에도 몇 번 되풀이해 찾아갔습니다), 나무와 관련한 이야기를 더 많이 듣고 싶은 까닭에 할머니께 온갖 ‘아양’을 부려가며 이야기를 청했습니다. 그러자 얼마 뒤부터 할머니와 아주 편안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나무를 찾아갈 때면 할머니 안부를 함께 살피는 게 상례였습니다. 할머니도 나를 반겨 맞이해 주셨고 옛날 이 마을 이야기를 천천히 들려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눈 지 10년이 조금 넘은 2012년 가을이었습니다. 언제나처럼 할머니가 좋아하는 과자 몇 봉 사들고 나무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할머니의 방문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디 잠깐 나들이 가셨군’하고 나무를 바라보며 할머니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한 시간, 두 시간, 한 나절이 지나고도 할머니가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한참을 기다리다가 연락을 넣은 곳은 이 마을의 살림꾼인 이장이었습니다. 전화를 받은 권 이장께서는 곧바로 나무 곁으로 찾아오셨고, “더 기다려도 할머니는 오시지 않는다”고 전해주었습니다. 그해 봄, 월로댁 할머니는 나무와 함께 해 온 이승에서의 삶을 마치셨다는 겁니다.

   사람은 떠나고 나무가 홀로 사람살이의 흔적을 지켜주었던 겁니다. 그때의 생각과 느낌은 그 즈음에 연재하던 신문에 칼럼으로 고스란히 남겼습니다. 이런 경험이 처음은 아닙니다. 오래된 나무의 오래된 이야기를 찾아다니다 보니, 언제나 나이 많은 어른들을 찾아 뵙고 이야기를 청하는 게 대부분의 답사 일정입니다. 살갑게 이야기 들려주시는 ‘나이 많은 어른’들은 그러나 그 다음 얼마 뒤에 찾아 뵈오려 했을 때에 이미 저 세상으로 건너가셨다는 소식을 듣곤 합니다. 그때마다 “사람 떠나고 나무는 남는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가만히 나무를 바라보며 사람살이와 나무살이를 더불어 생각하게 됩니다.

   세 차례에 걸친 《나무편지》에 〈안동 용계리 은행나무〉 이야기를 담으며 그 끝자락에 월로댁 할머니의 얼굴을 떠올립니다. 나무와 더불어 평생을 살아온 한 사람의 이야기로 오늘의 《나무편지》 마무리합니다.

   오늘 《나무편지》에 담은 사진은 최근 사진이 아니라, 사진첩에서 끄집어낸 〈안동 용계리 은행나무〉의 오래된 사진들입니다.

   고맙습니다.

2024년 12월 16일 아침에 1,264번째 《나무편지》 올립니다.

  - 고규홍 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