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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

키오스크 피로 사회… 그 식당에 가지 말아야겠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9. 5. 17:44

[한은형의 느낌의 세계]

키오스크 피로 사회… 그 식당에 가지 말아야겠다

김밥집·푸드코트는 몰라도 비싼 청어 국수·인도 식당까지
어렵고 불편하게 만들어놓고 왜 시니어에게 배우라 하나
인간 소외시켜서 생각하게 만드는… '철학 기계'로 불러 주마

 

한은형 소설가
입력 2024.09.04. 23:58
 
 
 
일러스트=이철원

최근에 메밀 소바 맛집을 다녀온 친구가 이제는 가지 않겠다고 했다. 맛이 변했냐고 했더니 키오스크 때문이라고 했다. 비싼 돈을 주고 소바를 먹으면서 키오스크로 주문까지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청어 소바로 유명해져 분점도 낸 그 식당의 소바는 2만원이다. 맛있을뿐더러 접객의 태도와 분위기가 좋았고, 그렇기에 그 가격을 지불할 수 있었다. 이제 그 태도는 없는데 가격은 예전보다 훨씬 올랐다. 맛있다는 이유만으로 소바 한 그릇에 2만원을 내고 싶지는 않다. 그 식당에 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최근에 겪은 키오스크 일화도 떠올랐다. 인도 식당에서였다. 무제한으로 난을 리필해준다는 특별 메뉴를 시켰는데 키오스크로 해야 한다고 했다. 문제는 난은 손으로 찢어 먹는 음식이라는 것이다. 난을 요청하려면 손을 씻고 키오스크를 만져야 한다. 그러고 나서 난을 먹으려면 다시 손을 씻어야 한다. 손에는 난의 기름기도 묻어 있었다. 번거롭기 짝이 없었다. 종업원에게 난을 추가해달라고 말했더니 키오스크로 하라며 거절당했다. 의아했다. 식당은 붐비지 않았고 종업원도 바빠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로 하면 안 되느냐고 했더니 식당의 방침이라고 했다. 이 식당에 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김밥이나 도시락, 샐러드를 포장하거나 푸드코트에서 키오스크를 쓰는 건 불만이 없다. 1인 가게나 무인 점포를 효율적으로 기능하게 하는 게 키오스크다. 합리적으로 느껴질 때도 있다. 고물가 시대에 기계를 활용해 인건비를 줄이면, 줄어든 인건비가 물건 가격을 올리는 걸 둔화시키리라는 믿음이 작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위의 메밀 소바집이나 인도 식당처럼 상당한 비용을 내고 가는 식당에서 키오스크를 쓰는 건 불합리하게 느껴진다. 지불하는 음식 가격에 서비스 비용이 포함된 줄 알았다가 내가 셀프 서비스해야 하는 상황이 당황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궁금해졌다. 메밀 소바집도 인도 식당도 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 다 10년 넘게 운영하며 ‘맛집’이라 불린다. 한 곳은 미슐랭 가이드에도 올라 있다. 사람들은 왜 가는 걸까? 이런 일이 아무렇지 않은 걸까? 피로하지 않은 걸까? 아니면 피로하지 않다고 생각해야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걸까? 그래서 이 정도는 감당하는 게 현대사회의 불문율이라고 생각하게 된 걸까? 나와 친구는 현대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도태되고 있는 걸까? 나는 참을 수 없는 소외감을 느꼈다. 고등학교 때 사회문화 시간에 배웠던 ‘인간소외’가 이런 건가 싶었다.

 

인간소외에 대해 표준국어대사전은 이렇게 정의한다. “인간성이 상실되어 인간다운 삶을 잃어버리는 일. 기계 문명이나 거대한 사회 조직, 산업 조직, 고도로 관리화되고 정보화된 사회가 오히려 인간에 대하여 부정적인 작용을 하는 데서부터 생겨난다.” 이걸 보고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대체 인간성이란 무엇이고,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내가 소외감을 느꼈던 이유는 인간다운 삶이 공격받는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손님으로서 존중받지 못하고 그저 하나의 개체로 취급받는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기계 문명이 인간을 편리하게 한다지만 여기서 편리한 인간이란 매장의 점주거나 대표고, 손님은 불편하고 소외당한다.

키오스크 피로 사회랄까. 키오스크보다도 키오스크를 활용하는 방식과 키오스크를 둘러싼 사안에 대한 피로감일 것이다. 키오스크에 대해 어떤 책이 나와 있는지 찾아보다 실소를 금할 수 없던 일도 말해야겠다. 모두 시니어를 위한 키오스크 활용법에 대한 책이었다. 왜 키오스크를 어렵고 불편하게 만들어 놓고 시니어에게 키오스크를 배우라는 건지 이해하기 어렵다. 개발자나 점주 중심이 아니라 사용자 중심으로 인터페이스를 바꿔야 한다. 시니어는 잘못이 없다. 늙어서 사회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게 문제라고 느끼게 하는 사회는 안 된다. 직관적이고 쉬운 키오스크라면 그나마 소외감이 덜할 것이다.

이렇게 키오스크에 불쾌감을 느끼는 걸 보니 내가 생각보다 더 인간다움의 가치를 추구하나 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상대방은 즉각적으로 반박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다움과 요즘 아이들이 느끼는 인간다움은 다를 것이고, 그렇기에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도 다를 것이라고.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나의 한계 안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내가 생각하기에 키오스크는 인간을 소외시킴으로써 인간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불편하고도 이상한 존재다. 이쯤 되면 철학 기계라고 해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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