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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언어의 사원이 아니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8. 1. 16:42

시는 언어의 사원이 아니다
중앙일보
입력 2024.08.01 00:21

업데이트 2024.08.01 15:30





                                                                     성민엽 문학평론가

시(詩)라는 한자는 왼쪽의 언(言)과 오른쪽의 사(寺)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글자입니다. ‘언’은 말(언어)이고 ‘사’는 절(사원)이니 시는 곧 말의 절, 혹은 언어의 사원을 뜻한다는 풀이가 매우 그럴듯해 보입니다. 언어의 사원이라고 하면 그것은 신성한 언어, 경건한 언어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풀이는 오류입니다. ‘寺’라는 글자가 절·사원이라는 뜻을 갖게 된 것은 기원 전후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의 일이고, 言+寺라는 형태의 한자 ‘詩’는 그 이전부터 이미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는 말(言)+절(寺)’ 풀이는 오류
불교 전래 이전에 한자 詩 존재
금문의 寺는 통제·유지의 의미
시는 ‘말로 뭔가 붙잡다’로 풀어야

‘詩’자는 전국시대 중기(기원전 4세기)에 존재했던 것이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확인되었고, 공자가 시경을 편찬한 춘추시대 말(기원전 5세기)에도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고 보는 게 정설입니다. 심지어 춘추시대는 물론이고 서주 시대(기원전 11세기~8세기)에 이미 言+寺 구조의 글자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서주 시대든 공자 시대든 전국시대 중기든, 그 당시에 ‘寺’라는 글자가 무슨 뜻으로 사용되었는지가 중요합니다.

서주 시대의 청동제 종이나 솥에 새겨진 글자를 금문(金文)이라고 합니다. 금문 다음에 나온 글자가 춘추전국시대의 대전(大篆)이고 진시황 때 새로 나온 글자가 소전(小篆)이며 대전과 소전을 합쳐서 전문(篆文)이라고 합니다. 금문은 춘추전국시대에도 계속 사용되었는데, 금문에서 ‘寺’는 상부의 ‘토(土)’를 ‘지(止)’로 썼고 ‘止’는 ‘가다, 가서 멈추다, 움직이지 않다’를 표시했으며, 하부의 ‘촌(寸)’을 ‘우(又)’로 썼고 ‘又’는 ‘손, 잡는 것’을 표시했습니다. 그래서 금문의 ‘寺’는 ‘잡고 있는 것, 유지, 통제’라는 뜻이었습니다.

                                                     왼쪽이 금문의 寺, 오른쪽이 전문의 寺

이 그림의 왼쪽이 금문의 寺, 오른쪽이 전문의 寺입니다.(위 사진)

진시황 시대를 전후해서 전문의 ‘寺’라는 글자가 ‘도성에서 관리를 접대하는 장소’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 시작했고(‘寺’가 관청이라는 뜻을 갖게 된 것은 이때부터입니다. 관청이라는 뜻의 ‘寺’는 ‘사’가 아니라 ‘시’라고 읽습니다), 한나라 때 불교가 전래된 뒤에는 ‘서방에서 오는 스님을 접대하는 곳’을 ‘寺’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寺’가 절이라는 뜻을 갖게 된 것은 이때부터입니다). 이렇게 ‘寺’자의 의미가 바뀌게 되자 ‘寺’자의 원래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寺’ 옆에 ‘수(手)’를 붙여 ‘지(持)’자로 대체하게 되었습니다.

이상의 검토를 통해 ‘시’의 어원을 언어의 사원이라고 보는 설이 단지 속설일 뿐이고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 속설은 한자문화권에서 흔히 발견됩니다. 한국·중국·일본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에서는 고은 시인이 대표적입니다. 고은 시인은 1971년에 신문에 시 월평을 쓰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고대 상형문자의 조립 방식으로 본다면 시는 언+사라는 수식이 되며 그것은 시가 언어 사원이라는 경건성으로 설정된다. 현대시가 이런 시의 근본적 의미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고 할 경우에도 그것은 시의 원형을 강조하고 있다.”

내장산국립공원에 진노랑상사화가 활짝 피어 있다. 상사화는 봄에 잎이 나왔다가 시든 후 여름에 꽃을 피워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못한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상사화의 꽃말은 '이룰 수 없는 사랑'이다. 연합뉴스

‘시의 근본적 의미’를 경건성에서 찾는 관점은 나름대로 성립될 수 있습니다. 다만, 시(詩)라는 한자의 어원이 그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정희성 시인이 1997년에 발표한 ‘시를 찾아서’라는 제목의 시가 흥미롭습니다.

“말이 곧 절이라는 뜻일까/ 말씀으로 절을 짓는다는 뜻일까”.

이렇게 시작되는 이 시의 화자는 절에 가서 시를 찾지만 결국 찾지 못한 채 ‘절은 있어도 시는 보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대신 그가 본 것은 꽃대궁만 있고 잎은 보이지 않는 상태의 상사화입니다. 꽃말이 ‘이룰 수 없는 사랑’인 상사화는 잎과 꽃이 서로 다른 시기에 피어 만날 수 없는 연인의 비유로 쓰입니다. 시인은 상사화에서 시를 발견하고, “아마도 시는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인 게라고” 생각합니다. 시는 언어의 사원이라는 속설에서 벗어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詩’ 속의 ‘寺’가 뜻을 갖는다면 그것은 ‘절’이 아니라 ‘잡아두기’입니다. 말을 잡아두는 것일 수도 있겠고 말을 사용해서 무엇인가를 잡아두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어느 쪽이든 ‘잡아두기’의 구체적 양상이 중요합니다. 시가 무엇인지를 한자의 어원으로 살핀다면 바로 여기서부터 논의를 시작해야 합니다. 시는 언어의 사원이 아닙니다.

성민엽 문학평론가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7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