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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이 숨겼던 ‘性’이란 시, 아내는 치욕 참고 발표했다 [백년의 사랑]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7. 15. 15:13

김수영이 숨겼던 ‘性’이란 시, 아내는 치욕 참고 발표했다 [백년의 사랑]

에디터
이경희






김수영 시인의 아내 김현경 여사가 들려주는 ‘백년의 사랑’(5·최종)
‘백년의 사랑’ 요약

김수영 시인이 첫사랑에게 버림받고 방황하던 1942년 일본 유학 시절. 절친인 이종구가 ‘사랑하는 조카딸’이라며 예뻐하던 여섯 살 아래 김현경을 김수영에게 소개한다. 김현경은 이종구와 김수영을 모두 ‘아저씨’라 부르며 문학을 논한다.

김현경은 첫사랑 배인철 시인을 총격으로 잃고 구설에 오른다. 김수영 시인은 고립된 김현경을 가장 먼저 찾아와 “문학하자”고 말한다. 문학이 사랑이자 구원이었던 둘은 관습을 뛰어넘어 동거하고, 결혼한다. 임신한 김현경을 두고 의용군으로 끌려간 김수영은 가까스로 탈출하지만, 포로로 붙잡혀 2년3개월간 구금된다.

김수영은 일자리를 찾아 피란 수도 부산에 내려가고, 김현경도 아들을 친정에 맡기고 뒤따라간다. 일자리를 청탁하러 이종구를 찾아갔다가 그 집에 머물며 살림을 도맡게 되는데. 내심 김현경을 짝사랑했던 이종구는 김현경의 친정에 매달 생활비를 부쳐주며 그녀를 붙들어둔다. 김수영 시인이 6개월 뒤에야 찾아오지만, 김현경은 “먼저 가세요”라며 돌려보낸다.

서울로 환도한 뒤에도 한동안 이종구와 살던 김현경은 어느 날 몰래 집을 나와 방을 얻는다. 신춘문예 준비에 매진하던 김현경은 1955년 봄, 김수영에게 만나자는 엽서를 쓴다. 말끔한 차림으로 약속 장소에 나온 김수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날부로 김현경과 부부의 연을 다시 이어간다.

소음에 예민한 김수영 시인을 위해 마포구 서강의 넓은 땅 한가운데에 있는 독채로 이사한다. 안정적인 가정을 꾸려가며 김수영 시인은 서서히 전쟁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시인으로서 전성기를 구가한다. 그러나 술에 취해 귀가하던 길, 버스 사고로 아까운 생을 마감한다. 죽기 20일 전에 쓴 ‘풀’은 그의 유작이자 대표작이 됐다.

더, 스토리 - 백년의 사랑
① 탕탕탕!” 첫사랑은 즉사했다…98세 김수영 아내의 회고
② 속옷 벗고 한강 뛰어든 여대생…김수영 “아방가르드한 여자”
③ ‘너는 억만 개의 모욕이다’ 절친과 동거한 아내에 쓴 시
④ ‘아내 패고 버린 우산 아깝다’ 시인 스스로 고백한 죄와 벌

                              김수영 시인의 아내 김현경 여사.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김수영(1921~68) 시인이 시에서 ‘여편네’라 멸칭하고 때론 ‘아내·처’라 썼던 뮤즈, 1927년생 김현경 여사는 논란의 인물이었다. 김수영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 그의 절친인 이종구(1921~2004)와 살았던 전력 때문이다. 김수영은 한국전쟁 때 북한 의용군(김수영은 ‘민간인 억류자’라고 표현했다)으로 끌려갔다 가까스로 탈출하지만 남한에선 공산 포로로 붙잡혀 2년 넘게 수감된다. 시인은 전쟁의 트라우마에 아내를 잃은 슬픔까지 감당해야 했다.

그러나 김수영의 선택은 결국 김현경이었다. 돌아온 김현경과 재결합한 뒤 왕성하게 시와 산문, 평론을 쓰고 번역하며 전성기를 구가하다 교통사고로 비명에 떠났다. 이후 김현경은 김수영의 손때가 묻은 자료를 이고 지고 다니며 보존했고, 그의 흔적이 세상에 알려지도록 김수영문학관에 기증했다.

이제 백수(白壽)를 바라보는 김현경 여사에게 “사랑 이야기를 듣고 싶다”며 찾아가 인터뷰한 게 지난 5월 중순이었다. ‘더, 스토리-백년의 사랑’ 첫 회가 나온 뒤 출판사 ‘어나더북스’ 권무혁 대표의 연락을 받았다. 홍기원(64) 김수영기념사업회 이사장이 김현경 여사를 1년 넘게 인터뷰해 정리한 이야기가 곧 책으로 나온다는 소식이었다.

 『시인 김수영과 아방가르드 여인』의 저자 홍기원 이사장을 지난달 20일 중앙일보 사옥에서 만나 그 뒷이야기를 들었다.

홍기원 김수영기념사업회 이사장 인터뷰

홍기원 이사장. 김종호 기자

🆀 이경희 : 2021년 출간한  『길 위의 김수영』 책을 김현경 여사께 드리러 갔다가 인터뷰를 결심했다고요.

🅰 홍기원 : 네. 제가 김수영 본가 유족을 10년 넘게 만났습니다. 본가 쪽 이야기를 들어서 김수영 시인 탄생 100주년 사업 때 『길 위의 김수영』을 냈습니다. 아무래도 당사자시고 아직도 생존하고 계시는 사모님한테 이 책을 전달해야 되겠다 싶어 찾아뵈었죠. 김현경 여사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도 많았는데, 서운하다는 말씀은 일절 없이 밥을 차려주시고 수고했다 하시더라고요.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모던 걸’, 그야말로 살아 있는 전설인데 간단치 않은 인물이라는 걸 알게 됐죠. 고은 시인은 “김수영에게 김현경은 고통이자 매력”이라고 하더라고요. 김수영 시인이 좋아했던 매력이 뭘까, 진심으로 그것을 추적하고 싶다. 김수영이 정말 사랑했던 유일한 여성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려주는 책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김수영의 시를 이해하는 데에 차이가 클 거다. 그래서 김수영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서 그 일을 한 거죠.

🆀 그런데 인터뷰가 오래 걸렸다고요. 

🅰 첫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직후 허리를 쓸 수가 없어서 입원하셨어요. 다행히 퇴원하셨다고 해서 인터뷰 약속을 잡고 가는 도중에 다시 병원에 가신다는 거예요. 두 번째 입원한 게 지난해 7월인데 상태가 훨씬 안 좋더라고요. 책을 내지 말라는 신호인가, 그렇게 느꼈죠.

여사님이 저한테 “요양병원은 그야말로 노인들 시체 보관소다. 여기서 정말 죽기 싫다. 내가 집에 돌아가서 책을 읽다가 자는 듯이 가고 싶다, 여기 이렇게 있어서는 안 된다, 정신을 차려야 된다”고 주문처럼 말씀하셨어요. 주변에서는 다들 못 나온다고 그랬는데, 기적처럼 다시 나오신 거예요.

둘째 아들 우 아래로 딸이 둘이거든요. 그중 둘째 손녀하고 약속하길 자기 손으로 밥을 먹고 살림을 하는 보통 할머니가 되겠다고 했다는 거예요. 그야말로 하늘이 도와서 이 인터뷰를 마칠 수 있었어요. 인간이 하는 일이지만 이런 책 하나 내는 것도 하늘이 도와주지 않으면 못하는 거죠.

🆀 제가 처음 인터뷰를 갔을 때도 바지를 갈아입다가 넘어지시는 바람에 갈빗대 3개랑 척추뼈가 나간 지 한 달쯤 지난 상태였어요. 지팡이 없이 두 발로 걸으시는데, 그래도 힘드실까 봐 길게 못 하고 나왔거든요. 누군가는 이분의 증언을 채록해야 되는 거 아닌가 하던 차에 책이 나온다길래 다행이다 싶었어요.

🅰 우리 문화예술계에 유명한 여성들이 있잖아요. 가령 김환기(1913~1974) 화백의 아내 김향안(1916~2004) 여사는 이상(1910~1937)의 부인이었잖아요. 그런 여성의 역사는 충분히 인터뷰해서 기록을 남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김수영이 정말 사랑했던 여성의 정보를 제공해 주는 책이 있고 없고는 김수영 시인의 시를 이해하는 데 있어 차이가 크죠. 그래서 제가 김수영 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서 인터뷰를 했던 거고요.

🆀 『길 위의 김수영』 을 쓸 때만 해도 김현경 여사를 인터뷰하겠다는 생각은 안 하셨던가요?

🅰 그런 생각을 가지고는 있었죠. 지금도 그렇지만 시댁과 며느리가 많이 갈라져 있어서 제가 접근하기가 조금 힘들었어요. 김수영 본가 분들 눈치도 보이고요. 그땐 어떻게든 (본가의 협조를 받아) 김수영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야 된다는 일념으로 사비를 털어 만들어냈던 책입니다.


🆀 사실 문단에서 김현경 여사를 안 좋게 보는 분위기가 있었잖아요. 그래서 이분에겐 발언 기회가 없었겠다는 느낌도 있어요.

🅰 김수영이 가장 필요할 때 이종구와 살았으니 그에 대한 비판은 지금도 만만치 않죠. 사회적으로 낙인이 찍힌 부분도 많고요. 그렇지만 김수영 시인이 1955년 4월에 김현경 여사와 왜 다시 손을 잡았을까. 고은 시인 말대로 “고통이자 매력”인데, 딴 남자에게 살러 간 여자와 다시 손을 잡은 내적 동기와 힘을 솔직하게 추적해 보자. 그래서 이번에 7개의 사랑의 장면으로 요약되는 스토리가 나온 거죠.

🆀 어떠세요? 김현경 여사님 인터뷰해 보시니까 다시 손잡을 만하구나 그런 생각이 드세요?

🅰 20대의 그 김현경을 저도 한 번 만나보고 싶더라고요.

🆀 저도 사실은 약간 자극받았어요. 김현경 여사가 두 번째 인터뷰에서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하시는 거예요. 그 사진을 저한테 카톡으로 보내주셨는데 98세 할머니가 더 고와서, 충격받아서 미용실에 갔죠.

🅰 우리 나이로 98세인데도 정신을 차려야 된다면서 뭐 하나라도 항상 신경쓰는 모습, 생에 대한 의지, 끝까지 미(美)를 사랑하는 마음이 보이는 거예요. 그게 어찌 보면 가장 인간적인 모습 아닐까요? 김수영 시인이 ‘거대한 뿌리’에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고 노래한 부분처럼 영원한 사랑을 총괄하는 모습을 좋아한 거 아닌가. 정말 20여 차례 인터뷰하는 내내 20대의 김현경은 어땠을까, 정말 다시 손 잡고 싶은 연인이었을 거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저는 20대였던 김현경의 선택이 한편으로 이해도 되더라고요. 이종구가 친정에 생활비를 대주고 있는 상황이었잖아요. 남편이 한 6개월 만에 찾아와서 “가자” 그러는데, 도움만 받고 입 싹 닦고 일어나기도 그렇고, 같이 가면 어떻게 먹고 살지, 이런 복잡한 그 순간의 망설임이 있을 수도 있겠다….

🅰 6·25 피란 시절, 그 궁핍한 시절에 일어났던 일들이기 때문에 전쟁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스토리잖아요. 김수영 시인은 문학가 중에서 6·25를 가장 격심하게 겪었던 사람이에요. 북에 총알받이로 끌려가고, 혼란기를 타 탈출해 200㎞를 서울까지 걸어서 내려왔고요. 그런데 북에서 내려온 빨갱이라고 서울 중부서에서 2주 만에 완전히 두 다리를 절단해야 할 정도로, 이빨이 다 나갈 정도로 고문을 받았잖아요. 포로수용소에서는 인민재판을 받다가 죽기 직전에 탈출하고요, 매일 아침 포로들의 토막 시체가 나오는데….

그러니까 술을 안 먹으면 그 고통의 기억으로부터 빠져나갈 수가 없는 거죠. 박인환(1926~1956, 대표작 ‘목마와 숙녀’) 시인은 6·25의 고통을 김수영 시인만큼 그렇게 격렬하게 겪지 않았지만, 못 먹는 술을 먹다가 심장마비로 죽어버렸어요. 자유를 노래하던 사람들도 그 이후로 자유를 이야기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그 정도의 고통을 받고도 김수영 시인은 다시 살아나잖아요.

김수영이 다시 살아난 배경에는 어머니와 누이들의 절대적인 보살핌과 사랑이 있었고, 재결합 후에는 김현경 여사가 13년간 주사를 다 받아주는 속에서 폭력의 트라우마를 결국은 이겨낸 거거든요. 그랬기 때문에 위대한 시가 가능한 거였죠. 그러면 그 부분은 우리가 정당하게 평가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제가 알기론 어떤 평론가도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거든요.

제가 내린 결론은 이겁니다. 김수영이 여의사와 선도 보고 여러 여자를 만나지만, 다른 여자와 잘 살 수 있는 자신이 없었던 거예요. 아무리 경제적으로 뒷받침되더라도 정신적인 갈증까지 채워줄 수 있는 건 아닌 거죠. 사랑이라는 게 얼마나 예민하고 가장 인간적인 겁니까. 그 선택을 할 수 없었던 거죠. 그런데 김현경은 그걸 가지고 있었어. 그러니까 다시 손을 잡은 거죠. 문제적 남자와 문제적 여성의 사랑의 핵심이 거기에 있지 않을까….

🆀 본가의 증언을 듣고 쓰신 『길 위의 김수영』하고 배치되는 부분도 있는데요.

🅰 가장 대표적으로 첫 만남이에요. 김현경 여사는 1942년 5월 라일락 꽃필 때 만났다는 건데, 김수영 본가에서는 “김수영이 일본 유학 가서 3개월 만에 올 리가 없다, 그리고 김수영은 그때 돈이 없었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김수영은 돈이 없지만 이종구한테는 돈이 있었잖아요. 같이 가자고 해서 쫄래쫄래 따라와서 본가엔 안 들어갔을 수도 있다, 청춘들은 그런 짓을 충분히 저지를 수 있다, 그렇게 봐야 되는 거 아닌가. 본가의 해석과 김현경 여사의 증언 중 무엇이 맞다 틀리다 절대적인 선을 그을 수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 그것 말고도, 포로수용소에 있는 동안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고 이종구랑 살았다고 지금까지도 설명이 되는 상태인데요. 김현경 여사는 김수영 시인이 포로 석방된 뒤의 일이라고 하고요.

🅰 저는 그 부분은 하늘만 안다고 생각합니다. 설마 김수영 시인이 살아 돌아오고 나서 이종구한테 갔겠나 싶기도 하고요. 6·25 궁핍한 시절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취직자리 구하러 이종구한테 갔다가 나오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붙잡혀 있는 상황이 충분히 전개될 수 있었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 김현경은 첫사랑 배인철의 피살 사건으로 연애금지였던 이화여대에서 제적당해 대학 졸업장이 없었다. 당시엔 고등학교만 나와도 교사가 될 수 있었기에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었다. 이후 조암리에서 피란살이를 할 때 공민학교에 자리를 얻어 유능한 교사로 소문이 났다고 한다. 그러나 기껏 어렵게 기반을 닦은 조암리를 떠나 수원으로 피신을 한다. 여기엔 사연이 있었다.

사업가였던 친정 아버지 김건은 전쟁이 나자 친분이 두터웠던 조병옥(1894~1960, 독립운동가. 해방정국과 미군정 치하에서 경찰총수, 내무부장관 등을 지냈다) 박사에게 자동차를 빌려줬다. 그래서 피난을 못 갔다. 넓은 공간이 필요했던 인민군은 서울 돈암동 친정집을 접수해 장교 연락처로 썼다. 친정 아버지는 숨어 지내다 인민군 퇴각 후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아버지의 보통학교 동창이었던 탁씨가 아버지를 빨갱이 부역자라며 경찰에 밀고했다. 아버지는 경찰서에 끌려간 당일, 야구방망이에 맞아 허리가 부러져 죽었다. 만삭의 김현경과 친정식구들은 서둘러 피난 길에 올랐다. 부역자로 몰려 몰살을 당할까봐서였다. 

김현경은 피난지인 조암리 장터에서 아버지를 배신했던 원수 탁씨와 우연히 마주쳤다. 혹시나 변을 당할까 봐 자신과 아들의 성까지 바꾼 터였다. 가족의 안위가 우선이었다. 선생 자리를 버리고 조암리를 떠났다. 김현경이 김수영을 따라 부산에 가서 구하려던 일자리도 교사직이었다. 서울고 영어교사였던 이종구에게 일자리를 부탁하려 했다는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

🆀 의심도 들고요? 

🅰 그렇죠. 보통의 집안 같으면 친정 어머니가 “몸도 약한 김서방이 살아서 돌아올 수 있겠냐, 죽지 않고서야 이렇게 연락이 없겠냐” 하지 않았겠어요? 1년 이상이 감감무소식이면 누구든지 죽었다고 생각하죠. 또, 이종구 정도면 충분하게 김현경 소재 정도는 파악했을 것 같고요.

🆀 그런 추정도 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이종구는 그에 대해서 글을 남기지 않았잖아요.

🅰 절대 없죠. 한 자도 없더라고요.

🆀 김현경 여사가 김수영 시인을 높이 평가하는 게 “너무나 정직하다. 다 솔직하게 쓰고 글로 남겼다”는 부분이거든요. 이종구는 김수영에 비하면 그렇게 정직한 사람은 아닌 거예요. 이종구한테는 신세를 졌으니 고마워서 살았지만, 결국 문학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더 고매한 인간 김수영을 사랑한 게 아니었나. 

🅰 그렇죠. 김수영은 정말 솔직한 그대로 다 남겼죠. 그러니까 김수영을 위대하게 생각하는 거 아닙니까? 자기의 외도와 성적인 문제까지도 성역을 두지 않고 문학으로 끌어와서 남겼잖아요.

성(性)

그것하고 하고 와서 첫 번째로 여편네와
하던 날은 바로 그 이튿날 밤은
아니 바로 그 첫날 밤은 반시간도 넘어 했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그년하고 하듯이 혓바닥이 떨어져나가게
물어제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다부지게 해줬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이게 아무래도 내가 저의 섹스를 개관(槪觀)하고
있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똑똑히는 몰라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나는 섬찍해서 그전의 둔감한 내 자신으로
다시 돌아간다
연민(憐憫)의 순간이다 황홀(恍惚)의 순간이 아니라
속아 사는 연민(憐憫)의 순간이다

나는 이것이 쏟고난 뒤에도 보통때보다
완연히 한참 더 오래 끌다가 쏟았다
한번 더 고비를 넘을 수도 있었는데 그만큼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
〈1968.1.19〉

“무슨 연유인지 수영은 생전 이 작품을 나에게 보여준 일이 없었다. ‘죄와 벌’에서처럼 나는 수영의 죽음 이후 그의 책상 정리를 하다 이 작품을 찾아내었다. 평소 수영은 성(性)을 두고, 인간의 원죄를 넘어 한 사람의 육체를 맑은 눈으로 보고 느끼는 일이라 말했다. (중략)

나는 그런 마음으로 아내로서는 민망하기 짝이 없는 이 시를 공개하기로 했다. 세상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면 어떠랴. 살아서와 마찬가지로 그의 시가 더 빛날 수 있다면 나는 어떤 수모와 치욕도 달게 받을 수 있다.”

-김현경 에세이 『김수영의 연인』 부분

🆀 그래서 저는 그런 느낌은 들었어요. 김현경 여사가 차라리 노코멘트를 하면 했지, 말을 하는 건 적어도 김수영과 같은 결에서의 어떤 정직한 느낌이 아닐까.

🅰 그런 점에서 ‘아방가르드 여인’이라고 자기를 규정하는 이 제목을 좋아하시더라고요. 김수영 시인이 그 말을 좋아했다고요.

🆀 아방가르드 맞죠. 모든 관습적인 선택을 안 한 거니까.

🅰 삶의 태도에서도 일관되니까요. 엑스 세대나 MZ 세대가 봐도 참 쿨한 여자다 할 거예요.

📌 김현경과 김수영은 심지어 동성동본이었다. 당시 동성동본은 결혼할 수 없었다. 둘은 결혼의 관습에는 관심도 없었으나 전쟁의 혼란기를 틈타 제3자가 혼인신고를 해 준 덕분에 무사히 법적인 부부가 됐으리라는 게 홍기원 이사장의 해석이다. 📌 

군 의무대에서 복무하던 장남 준을 면회하러 간 김현경. 1969년 면허를 따고 신진자동차가 반조립 상태로 들여와 팔던 토요타 퍼블리카를 몰고 다녔다. 여성운전자가 귀하던 시절이었다. 김현경 제공/ 어나더북스

🆀 사실 이 책에서는 이종구가 되게 찌질하게 나오잖아요. 이종구에 대한 증언도 다 김현경 여사가 하신 건가요? 

🅰 그거 다 하신 거죠.

🆀 결혼 후 남성 기능을 못해서 아내에게 맞았다는 이런 얘기까지? 어떻게 아셨다는 걸까요?

🅰 그건 다 들었겠죠. 증언을 하셨으니 저는 그렇게 남긴 거고요. 이종구 추모 사업회에서 항의할지도 모르겠는데….

🆀 이종구 추모사업회는 길게 가지 않은 것 같아요.

🅰 김수영 시인처럼 마니아가 있으면 기념사업회가 굉장히 길게 가겠지만 그렇지는 못한 거죠. 셰익스피어 영문학과 번역에서는 인정을 받고, 상당히 뛰어난 학자지만 창작물이 약하잖아요. 그 사람의 창작물을 기념하는 집단이 있어야 방어가 가능하죠. 일단 저는 최대한 김현경 여사의 증언을 잘 기록하는 걸 목표로 뒀습니다.

🆀 ‘죄와 벌’ 시 때문에 김수영 시인이 와이프를 두드려팼다, 그럼 늘상 때렸나? 이런 게 증명이 안 됐는데 그때 한 번뿐이었다고 쓰셔서, 그것도 새롭게 확인된 사실 같아요.

🅰 네. 그 부분은 제가 일부러 물어봤어요. 반페미니즘 시인이라며 교과서에서 김수영의 시를 다 빼야 된다는 엄청난 움직임이 있었잖아요. 저는 ‘죄와 벌’ 시를 ‘영원한 반성문’이라고 정의합니다. 김수영이기 때문에 자기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먼저 드러낸 거죠.

🆀 김수영은 죄를 그렇게 고백함으로써 반성을 한 건데, 후대 사람들은 그 시만 보고 폭력 남편이라고 생각한 셈인가요?

🅰 거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죠. 영화 ‘길’에서 주인공 잠파노는 살인을 저지르곤 사고사로 위장하는데 김수영은 사고사로 위장하지 않았잖아요. 저는 그 시에서 ‘살인’이란 바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욕, 이종구한테 살림을 살러 간 그 ‘억만 개의 그 모욕’에 대해 살인을 저지르는 거라고 봐요. (아내를 때린) 사건은 목격한 몇십 명 빼고는 모르는데,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자기의 죄를 고발한 거잖아요. 죄가 있으면 덮으려는 게 인간의 본능일 텐데, 자기를 그렇게 돌아본다는 게 쉽지 않잖아요. 김수영 시인의 반성적인 부분이 위대하다고 생각해요.

                김현경 여사의 서재. 위칸이 일어판 하이데거 전집 등 김수영 시인이 읽던 책이다. 이경희 기자

김수영 시인이 꼼꼼히 페이지를 접어가며 메모를 남긴 W.B. 예이츠 시집을 펼쳐보는 김현경 여사. 이경희 기자

🆀 이렇게 김현경 여사를 길게 인터뷰해 보고 나니까 김수영의 시가 더 잘 이해가 되십니까?

🅰 ‘죄와 벌’의 경우처럼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힘을 얻었죠. 독자들도 시를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좀 더 얻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 김수영 시인은 아내가 이종구와 산 것을 한 번도 나무라지 않았고, ‘죄와 벌’ 사건 때 김현경 여사도 마찬가지로 왜 그랬냐 따지지 않았다는데.

🅰 부부가 공히 그런데요. 김현경 여사의 쿨함을 볼 때, 절대 그런 거 따질 분이 아닌 것 같아요. 김수영 시인이 외도한 것에 대해서도 따지거나 신경 쓰지 않았잖아요.

📌 김수영에게도 김현경 외의 여자가 있었다. 실패로 끝난 첫사랑 고인숙이 있었고, 포로수용소에서 만난 간호사 ‘미스 노’가 있었다. 김현경과 재결합하기 전, 여의사와 선을 보기도 했다. 창녀촌에도 드나들었다. 옛날 문단에선 출판사가 문인들에게 술을 대접하고 여자도 붙여 주는 관행이 있었다. 김수영은 그런 이야기를 아내에게 들려줬고, 김현경은 재미나게 들으며 웃어넘겼다고 한다. 📌

🆀 ‘그래봤자 하룻밤이지, 어차피 김수영은 나야’ 이런 자신감 아니었을까요.

🅰 그렇죠. 김수영은 나 아니면 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거죠. 그랬는데 40대 접어들면서 주사도 잦아들고 생활도 좀 나아지고, 살 만하니까 가버렸다는 부분에서 제가 눈물이 나더라고요. 해외여행을 가고 싶어 했는데 한 번도 못 가보고 그냥 죽었잖아요. 나중에 해외여행 갈 때마다 생각이 나더라는 거예요.

🆀 김현경도 결국 사랑했던 건 김수영인 거고요.

🅰 그렇죠. 주사는 부리지만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해줬던 남자였잖아요. 그리고 이종구에 대해서는 마지막에 하는 말이 “사람의 마음을 주기가 진짜 힘들다”였어요. 진짜 마음 준 남자가 김수영이었던 거죠.

🆀 아무튼, 의미 있는 작업을 하신 것 같아요.

🅰 김현경 여사님을 보면서 남자든, 여자든 항상 신경쓰고 살아야 되는구나 깨달아요. 우리가 생활하다 보면 나태해지기 쉽잖아요. 일평생 살면서 낮잠을 자본 적이 없대요. 제가 책에는 안 썼는데 진짜 나태를 모르는 삶, 부지런 그 자체예요. 최근에도 바지 입다가 늑골이랑 척추가 나갔는데, 너무 늙으셔서 수술도 못하고 잠도 바로 누워서 못 주무세요. 이불을 2~3장 깔면 조금 잠이 온다고. 그러면서도 손님을 맞는 데 최대한 정성을 들이시고.

🆀 저도 인터뷰를 갔더니 대추빵을 손수 쪄서 대접하시더라고요. 방문 요양보호사가 오기 전에 매일 화장을 하고 옷도 갖춰입으신대요. 요양보호사가 저한테 “어머님 보면요, 우린 여자도 아니에요”라고 하더라고요. 그런 점에서 이종구도 너무나 갖고 싶었던 여자가 아닐까. 기본적으로 체력도 되게 좋으셨던 것 같고요.

🅰 그러니 젊은 시절에는 얼마나 날아다녔겠습니까?

🆀 그 옛날 1940년대에 처녀가 남자 간호한다고 집에도 안 들어가고, 세상의 시선은 진짜 하나도 개의치 않은….

🅰 그거 대단하죠.

🆀 이사장님은 어떻게 김수영에 빠지게 된 거예요?

🅰 1980년대 격렬한 시기에 저도 민주화 학생운동 일원으로 열심히 뛰어다녔어요. 김수영 시인은 저항의 시, 자유의 시인으로 소개되었죠. 제일 좋아했던 작품이 ‘거대한 뿌리’고요. 난해한 시도 많지만 다가오는 시도 꽤 있어서 좋아했어요. 그러다가 도봉구(도봉문화원 사무국장)에서 현대사 인물 사업을 하며 아예 발을 깊숙이 들인 거죠.

🆀 기념사업회 차원에서 역점을 두는 활동이 있을까요?

🅰 김수영 시인 문학관을 도봉동 본가로 이전하는 문제예요. 김수영 시인한테 어머니는 거의 절대적 존재고, “어머니의 손과 같은 문학을 하고 싶다”고 끝없이 이야기했어요. 그래서 문학관을 본가 쪽으로 옮기고, 김수영 공원이 조성되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김수영이 서울의 대표 시인이잖아요. 우리나라 같은 경제적 위상에서, 서울시가 추진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이런 목소리를 계속 내다 보면 언젠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 ‘더, 스토리-백년의 사랑’ 시리즈의 주인공은 김현경 여사입니다. 시인의 아내로, 그림자에 숨어 있던 여인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따라서 김수영의 업적이나 작품은 성글게 언급했습니다. 이 연재는 김수영의 생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는 있으나 문학적 해석을 목표로 두진 않았습니다. ‘더, 스토리 - 백년의 사랑’ 연재에 보내주신 관심과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에디터

이경희
관심
중앙일보 P디렉터

dungle@joongang.co.kr
디지털 콘텐트와 서비스를 만들며 숱한 실험과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또 실험하고 실패할 예정입니다. 공감할 수 있는 글을 쓰겠습니다.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11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