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의 미남 시인을 불귀의 땅으로 내친 ‘붉은 편지’
[아무튼, 주말]
[전봉관의 해방 거리를 걷다]
고향 北에 남았다 비극 맞은 ‘모던보이’ 백석과 고당 조만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히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1938)
백석은 조선일보 기자로 임용된 1934년 이후 토속적 세계와 도회적 정서가 어우러진 독창적인 시를 연이어 발표하면서 일약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떠올랐다. 또한 180cm가 넘는 헌칠한 키에 또렷한 이목구비, 세련된 더블버튼 정장에 ‘올백’으로 빗어넘긴 독특한 헤어스타일을 뽐내는 당대의 모던보이로 뭇 여성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그러나 85년의 긴 생애에서 정작 그가 경성(서울)에 거주한 시기는 조선일보 기자 생활을 한 3년에 불과했다.
백석은 1912년 평안북도 정주군, 인구 1만 명 정도에 불과한 변방의 작은 읍내에서 태어났다. 근대 문명과는 외떨어진 궁벽한 시골이었지만, 그의 집 근처에는 남강 이승훈이 설립해 수많은 평안도 인재를 길러낸 오산학교가 있었다. 그의 집은 교사(校舍)의 추녀가 보일 정도로 오산학교와 가까웠다. 백석의 부모는 하숙을 쳤고, 1915년 33세의 젊은 나이에 오산학교 교장이 된 조만식도 가끔씩 백석의 집에서 숙식을 의탁했다.
3‧1운동 직전 상하이로 망명하려고 사임했던 조만식은 백석이 오산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5년 교장으로 복귀했다. 1934년 32세를 일기로 요절한 김소월은 백석의 오산학교 6년 선배였다. 1939년 조선일보에 복직한 백석은 김소월의 은사 김억이 보관하고 있던 ‘시작 노트’를 입수해 김소월의 미발표시 ‘제이‧엠‧에스’를 지면에 소개했다.
“평양서 나신 인격의 그 당신님 제이‧엠‧에스/ 덕 없는 나를 미워하시고/ 재주 있는 나를 사랑하였다/ 오산에 계시던 제이‧엠‧에스/ 사오 년 봄 만에 오늘 아침 생각난다”(‘소월과 조선생’, 1939.5.1) 백석은 “오산학교를 나온 이들은 제이‧엠‧에스라는 이니셜로 된 이름이 조만식 선생님이신 것”을 알 것이며, “오산을 다닌 사람은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이 천재 시인도 그 마음이 흐리고 어두울 때 조만식 선생님을 떠올리는가 보다”라며, ‘오산 동문’ 김소월과의 동질감을 조만식에 대한 존경심으로 표현했다.
백석이 오산학교에서 공부하던 시기, 그의 부친과 호형호제하며 동아일보 정주 지국을 운영하던 ‘동네 어르신’ 방응모가 삭주군 다릿골(橋洞)에서 손가락 세 개 만한 금맥(三指金脈)이 이어진 노다지 금광을 발견했다. 백석은 그 ‘동네 어르신’의 장학금으로 도쿄 유학을 다녀왔다. 1932년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한 이래 줄곧 자금난에 시달렸던 조만식은 방응모의 투자를 유치한 후에야 오랜 수심(愁心)을 덜었다. 조만식에 이어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한 방응모는 도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고향 인재’ 백석을 기자로 채용했다.
1936년 함흥 영생고보 영어 교사로 전직한 백석은 학생들을 열정적으로 가르치면서 함흥 시내에서 서점을 경영하는 러시아인에게 러시아어를 배웠다. 1939년 조선일보로 복직해서는 ‘여성’지 편집주임을 맡았고, ‘여성’지를 매월 완판하는 능력을 보였다. 1940년 만주로 이주한 백석은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 안동세관 등에서 말단 직원으로 전전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해방 직후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된 조만식은 소련군이 평양에 진주한 후에는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이하 인민정치위)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조만식은 만주에서 돌아와 정주 고향집에 머물던 백석을 평양으로 불러 러시아어 통역을 맡겼다. 조만식의 평생 동지 오윤선 장로의 아들로, 해방 후 조만식의 비서로 일했던 ‘맹진사댁 경사’(1942)의 작가 오영진은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인민정치위) 외사과장 백석은 본업인 시를 집어치우고 군사령부 손님을 접대하기에 바빴다. (…) 노어(露語)를 해독하는 유일의 존재인 백석은 몸이 열이 있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소군정하의 북한’)
‘김일성 가짜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10월 14일 ‘소련군 환영 평양시 민중대회’ 얼마 후 인민정치위 주최로 ‘김일성 장군 환영회’가 일본요정 ‘가선’에서 열렸다. 김일성이 조모(祖母)와 함께 참석한 이 모임에 백석은 소설가 최명익, 극작가 오영진과 함께 문학계 대표로 초대되었다. 말석에 앉은 문학인들에게 발언권이 주어졌을 때, 백석은 ‘장군 돌아오시다’라는 즉흥시를 낭송했다.
소련군과 기독교 장로 조만식의 ‘불안한 동거’는 1945년 말 모스크바삼상회의와 이어진 친탁‧반탁 정국에서 파경을 맞았다. 소련군의 거듭된 회유와 협박에도 조만식은 반탁에 대한 신념을 꺾지 않았다. 인민정치위 위원장에서 물러난 조만식은 숙소로 사용하던 고려호텔에 억류되었다. 조만식은 6‧25전쟁 때 국군이 평양을 수복하기 직전,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우익 인사 500여 명과 함께 인민군에게 총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백석은 김일성 찬양을 강요하는 시 창작을 포기하고, 한동안 러시아 문학 작품 번역에 매달렸다. 1957년, 10여 년 동안의 사실상 절필 생활을 끝내고 ‘집게네 네 형제’ ‘오징어와 검복’ 등 동화시를 발표하며 ‘공산 치하 시인’으로서 새로운 활로를 모색했다. 그러나 북한의 젊은 ‘붉은 작가’들은 “아동문학은 지나치게 사상성이나 계급의식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는 백석의 아동문학론을 용납하지 않았고, 그에게 가혹한 비판을 가했다.
급기야 1959년 백석에게 ‘붉은 편지’가 내려왔다. 생산 현장으로 내려가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면서 ‘사상 개조’를 하라는 당의 지시였다. 백석이 파견된 곳은 삼수군 관평리 관평협동조합. 김소월이 시 ‘삼수갑산’에서 한 번 가면 살아서는 돌아오지 못할 ‘불귀(不歸)의 땅’으로 묘사한 바로 그 ‘삼수(三水)’였다.
“당의 붉은 편지를 받들어 노동 속으로 들어온 내가 이러한 관평의 양들과 관련을 가진 것은 나의 분에 넘치는 행복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양들 속에서 나의 노동은 시작되었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 나는 기쁜 노래 부르며 달려가고 있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 나는 밤이고 낮이고 당 앞에 무한한 감사를 드리고 있다.”(백석, ‘관평의 양’, 1959)
1959년 ‘당의 배려’로 47세에 시작된 ‘관평의 양들’과 함께한 ‘분에 넘치는 행복’은 1996년 백석이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뜰 때까지 무려 37년 동안 이어졌다. 모던보이 시절 남들이 만진 문손잡이를 손수건으로 감싸 여닫을 정도로 결벽증이 심했던 ‘시인 백석’은 ‘관평의 양치기’로 양 떼들과 씨름하며 기나긴 노년을 보냈다.
<참고 문헌>
고당기념사업회, ‘민족의 영원한 스승, 고당 조만식 전기’, 기파랑, 2010
오영진, ‘소군정하의 북한’, 신한인쇄소, 1952
김재용 엮음, ‘백석 전집’, 실천문학사, 1997
박명수, ‘조만식과 해방 후 한국 정치’, 북코리아, 2015
안도현, ‘백석 평전’, 다산책방, 2014
이동순, ‘나는 백석이다’, 일송북,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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