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연선과善緣善果의 의미를 묻다
나호열
1.
선연선과의 뜻을 직역하면 좋은 인연이 좋은 결과를 맺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연因緣은 또 무엇인가? 어떤 원인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결과 -사물의 생멸이나 어떤 사건의 진위 -로 이해할 때 우리는 불가佛家의 연기설緣起說을 떠올리게 된다. 한 마디로 모든 존재는 서로 서로에게 원인이며 결과인 까닭에 이러한 상호작용있어서 우열이나 승패를 가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진상은 어떠할까? 모든 생물은 어찌 되었던 생명의 연장과 종족 보존에 전력을 다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런 본능적 상황을 넘어서 욕망의 가치를 넘본다. 장수長壽의 욕심을 넘어서서 부와 명예, 더 나아가서 타인에게 존경받고 싶은 욕구를 멈출 수가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제로섬 Zero Sum 게임의 무한경쟁자로 등장하여 이전투구에 내몰리게 되기도 한다.
오늘날과 같이 불특정다수와 불시에 마주칠 수밖에 없는 개인은 무조건적인 호의로 타자를 응대할 수 없으며 이타적 심리보다는 이기적 심리를 가면에 감춘 채 나에게 이득이 되는 결과를 머리 속에 그린다. 어찌 되었든 가장 평화로운 사회는 상생相生임을 알면서도 부득이 나의 이익이 손상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타자他者와의 거래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악셀로드 R, Axelord 는 자신의 이익을 방어하는데 있어 가장 효율적인 대응이 ‘받은 대로 돌려주기Tit for tat’ 전략임을 밝혔다.
상대방이 우호적이면 우호적으로 대하고 그렇지 않으면 상대방이 취한 그대로, 말하자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방식을 따르라는 것이다. 이쯤 되면 선연선과의 믿음과 실천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를 알게 되지 않을까? 이번 시원문학회 동인지『노둣길의 시』의 주제는 ‘인연’이다. 과연 시인들은 인연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고 있는지 각각의 시룰 통해 그 의미를 살펴보기로 한다.
2.
이제 좀 더 세밀하게 인연의 의미를 들여다 보자. 선연善緣, 좋은 인연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선 인연을 맺는 양자兩者의 관계에 있어 상대방의 대응에 상관없이 의식을 벗어난 작용이 이루어지는 작용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자연 일반에 보이는 교감, 또는 생명에 대한 존중감이 그러한 것일 것이다. 어떤 시인들은 이를테면 인간의 잣대로는 포착되지 않는 현상을 빗대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연의 덕목이란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 이치를 실행하는 것이라도 생각한다. 그러한 관계에는 일체의 희로애락이 무화無化된다. 이와 같은 관점은 국수연 시인의 「정녕 그대로」, 김경성 시인의 「그보다 더 오래된 슬픔」, 최경선 시인의 「함께 한다는 건」 등의 시에서 드러난다. 구름(국수연), 숲과 사슴(김경성), 바위와 나무(최경선)와 같은 자연물을 시의 대상으로 삼아 인연의 의미를 풀어나간다.
시「정녕 그대로」는 하염없이 모이고 흩어지며,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는 구름의 이력을 통해 ‘자신처럼 아픈 구름 뭉게뭉게 살릴 열쇠를 찾았’다고 말한다. 그 열쇠는 아마도 함께 피어오를 구름을 기다리는 희망이거나 희망의 열쇠인 사랑일 것이다. ‘어느 상처시린 바탕 하얀 구름을 맞이’함이 시인이 궁극적으로 시인하는 인연인 것이다. 국수연 시인이 인식하는 인연이 적극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김경성 시인의 인연은 보다 정적이고 숙명적인 수동성을 지닌다. 그러나 나무의 부동성과 사슴의 유동성은 ‘사슴의 몸에 / 백매화 무늬가 피어 있’는 불가항력적인 교감으로 완성되는 것으로 드러난다.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은자隱者이지만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 마음만큼의 거리’를 유지한 채 살아가며 사라지는 존재인 것이다. 기꺼이 한 몸이 되기로 한 구름의 인연과 거리를 유지한 채 서로를 각인하는 나무와 사슴의 인연을 넘어서 최경선 시인의 시「함께 한다는 건」은 보다 격렬하게 상극하는 서로를 보듬고 껴안는 것이 인연의 본질임을 깨닫게 한다. 창경궁 옹벽 바윗돌과 한 몸으로 얽혀 있는 회화나무는 한쪽은 부서지지 않음으로 한 쪽은 뿌리를 내려야 하는 간절함으로 서로를 겨누는 사이이다. 시인은 그 광경을 목도하면서 인연은 ‘곁을 내준다는 것, 함께 견딘다는 것 / 한 생을 품는 일’이라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세 편의 시는 타자를 향해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지향성, 거리를 유지하며 서로에게 스며드는 묵시성, 적극적으로 길항하며 서로를 받아들이는 투쟁성을 인연의 덕목으로 인식하는 은유의 미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3.
이와는 달리 일군의 다른 시들은 개인들 사이에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소재로 삼은 시들이다. 박원석의「찰나의 인연」, 조광자의「옥상의 날들」, 조하은의「수아꽃」, 최윤경의「인연」시들이 이 범주에 든다. 한 마디로 생각과 조건의 차이에서 벌어지는 어긋남으로 인연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인연은 ‘번갯불 같은 빛’으로 올 때 순수하지만 그 순수가 어긋나면 ‘남이 되어버린 아픈 순정’으로 바뀌어버린 첫사랑이라고 고백하는 「찰나의 인연」은 ‘초가지붕 위 하이얀 박꽃되어 / 이 밤도 그대 곁을 지키고 싶’다는 미완성의 인연을 이야기한다. 조광자 시인의 시「옥상의 날들」은 옥상 빨랫줄에 걸린 옷들과 바람에 날리지 않게 고정하기 위한 빨래집게의 고투를 그렸다. 바람에 날아가지 않으려면 자신의 영육을 물고 있는 집게의 이빨을 견뎌야하는 옷들과 습기가 사라질 때까지 옷을 입에 물고 있어야 하는 집게의 힘겨움 속에서 마주하는 인연은 참으로 애처롭다. 집게 자국과 빨래가 거둬진 빨래줄에 힘없이 매달린 집게의 대비 속에서 우리는 가족이라는 인연의 힘겨움을, 버린다고 해서 버려지지 않고, 놓지 않는다고 하냥 머무르지 않은 혈연의 애처러움을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수아꽃」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해할 수 없는 이별을 그려내고 있다. ‘고모’라는 화자는 어느 날 사라져버린 올케와 조카를 찾아 먼 나라를 헤맨다. 문화가 다르고 언어가 다른 사람들이 맺은 인연이 해피앤딩이 되기는 참으로 어려울 것이다. 종적을 찾을 수 없어 병든 아비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을까? 단지 ‘천둥 번개 우르르 몰려다녀도 꽃은 꽃으로 다시 피어난다’는 막연한 희망만이 인연의 이어짐을 공허하게 되내이게 하는 것이다.
수없는 갈등이 할퀴며 지나가는
사람과 사람 사이
아이러니한 여유
- 최윤경, 「인연」 마지막 부분
이러한 어긋남을 최윤경 시인은 하나의 에피소드로 정화시킨다. 날짜와 시간을 착각한 것인지, 아니면 이유 없이 약속을 어긴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화자는 한 마디로 퇴짜를 맞는다.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 약속 장소에서 서운함과 배신감이 교차하는 순간에 만남의 절실함과 약속의 필연성에 대한 질문이 생기고, 문득 별 것도 아닌 일에, 사람에 집착하는 자아의 해방을 맛보게 된다.
기대하지 말라! 그 누구도 당신만큼 진지하지 않다!
4.
내 마음 같지 않은 사림들과 빚어지는 갈등 속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시인 자신의 경험과 성찰을 통해 인연의 의미를 궁구하게 된다. 어차피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세계인 까닭에 팔을 뻗쳐 그 누구의 손을 잡으려 할 필요가 없다.
한옥순의 「인연화, 몇 송이를 그리다」에서 꽃, 예쁜 집, 아릿한 이름 등은 시인이 향유하고 싶은 욕망의 다른 이름들이다. 즉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일 수도 있고, 사회적으로 공인받을 수 있는 어떤 욕망의 덩어리일 수 있다. 그러나 ‘종이 밭’이라는 상징 속에, 즉 글을 통해서 그것들을 욕망하겠다는 자기방어적이고 폐쇄적인 교유관을 갖게 되는 것은 앞서 최윤경 시인이 언급한 ‘ 아이러니한 여유’를 체득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윤준경 시인은 시「혼자인 것이 어디 너뿐이랴」에서 우리 모두는 혼자이고, 그래서 외롭다고 말한다. 그러나 혼자이기 싫어서, 외롭기 싫어서 만든 인연은 ‘때로는 둘이어서 가시 돋치고 / 때로는 둘이어서 깨어지는 것’ 이라고 선언한다. 회자정리會者定離를 알아챈다면 더 이상 인연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서혜경 시인은 손금을 통해서 ‘주먹을 쥐어본다 / 먼 길 돌아와 / 스치는 손금들 / 가벼운 인연은 내려놓고 / 깊은 강으로 흐르’자고 마음을 다지는 것이다.
각래관세간 유여몽중사
却來觀世間 猶如夢中事
물러나와 세상 일 돌아보면 모두 마치 꿈 속일 같네
5.
세상사에는 좋은 인연도 있고 악연도 있다. 처음에는 좋았다가 마무리가 불쾌한 경우도 있고 선의善意를 앙갚음으로 되돌리는 일도 허다하다. 그렇다면 좋은 인연을 맺어 좋은 결실을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구인지 알 수 없어도
내 손길이 닿은 꽃들은
사랑의 징표로
참을 수 없는 기쁨의 눈물로
보이지 않는 인연으로
더 활짝 피어날 것이다
- 최경옥 「인연」 마지막 연
어디에선가 가꾸어진 꽃들은 화원에서 축하의 꽃다발로 만들어져 누구에겐가 전해진다. 그 꽃들을 다듬고 매만지는 손길에 정성을 담는 일은 큰 보답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선행이다. 꽃을 매만지는 정성에 기쁨을 느끼는 일이야말로
좋은 인연을 맺는 지름길이다. 보상을 바라지 않는 선행善行 만큼 좋은 인연은 없다.
‘길 가다 스친 // 들꽃 하나가 // 나를 잡는다’ 는 김광진 시인의 언명은 하찮은 생명에 대한 경외심과 또한 이 세상에 하찮은 존재는 없다는 측은지심이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인연의 법도 임을 넌지시 일러주는 것이다.
* 이 글은 시원문확회 동인지 《 노둣길의 시》테마시편 '인연'에 대한 시평이다.
* 아래 글은 인연시편 전문이다.
정녕 그대를
국수연
그는 자신이 세워줄 그대를 찾고 있어요.
하늘로 날아오르던 그는 마른벼락 맞고 구름과
바닥으로 추락한 뒤 모든 게 두려워졌어요.
열정 쏟아부은 푸른 뭉게구름이 그의 전부였거든요.
이를 악물고 겨우 일어나 벼랑 팔뚝에 피와 얼룩
후둑후둑 털어 걸쳐두게 되었어요.
목표란 부질없어 양떼에 섞여 바위산 들판 쏘다니다
그들이 목동과 나누는 얘길 듣고 하늘로 뛰어올랐어요.
자신처럼 아픈 구름 뭉게뭉게 살릴 열쇠를 찾았거든요.
이제 그는 지나가는 구름마다 살피고 있어요.
어느 상처 시린 바탕 하얀 구름이 정녕 그의 인연 될까요.
그보다 더 오래된 슬픔
김경성
숲에 들어 한 그루 나무로 살았던 그가
잎을 다 내려놓고
몸에 새겨두었던 시간을 쪽빛 하늘에 걸어 두었을 때
붉은 벽돌집 마당에서도
어느 봄날처럼 꽃이 피고
봄산을 타는 연두보다 더 빠르게 달리다가
멈춰 서서 바라보던 사슴의 몸에
백매화 무늬가 피어 있었다
꽃물 든 사슴이 매화 꽃숭이 발자국을 남겨놓고
더 깊은 숲으로 들어가는 것을
우리는 어제의 일처럼 그저 바라보았다
그 어느 누구라도 피할 수 없었던 사슴과의 거리는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마음만큼의 거리였으니
밀랍 같은 말을 할 수 있기를 바라지만
커다란 눈동자에 고인 빛이 일렁이는 것을 보고
어떤 슬픔은 오랜 시간이 흐르면
사슴의 눈에 고이는 빛 같은 것이라고 짐작만 할 뿐
구름이 내려놓은 빗방울이 발끝까지 스며들고
사슴 발자국에 고인 빗물이
그의 내밀한 기억의 문장을 되새김질하며
모든 낱말을 이어줄 때
깊은 산속에서 더할 수 없는 은자가 되어 살았던
한 사람의 청청한 기운이
온 산을 푸르게 물들이고 있었다
인연
김광진
길 가다 스친
들꽃 하나가
나를 잡는다
자꾸
나를
잡는다
찰나의 인연
박원석
번갯불 같은 빛으로 온 소녀와의 첫 만남은 우연이 아니었네
내 전부가 되어버린 젊음의 강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기적이 따로 없네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만 보다 남이 되어 버린 아픈 순정 간직하고 있는데
계절은 아프지도 않고 잘도 바뀌어 가네
예수님처럼 믿었던 신부님의 조언은 진심으로 그 소녀 사랑한다면 소녀의 마음이 바뀔 때까지 기다리라 하여 지금도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네
번갯불 같은 빛으로 온 소녀를 아직도 보내지 못하고 내 심장과 함께 뛰고 있는 것은 100년이 하루 같기 때문이며 주위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잊을만하지 않느냐는 말에 나도 제발 잊고 싶지만 잊어버릴 수 없다는 게 현실이라네
이 세상에서 우리의 만남이 이루어질 수 없다면 천국에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 없다고 하니 좋은 친구로 만나기를 소망하며 지순 지고한 순정 간직하며 떠나겠소
백합꽃 같은 열아홉 소녀여!
별빛 초롱초롱한 한밤에
초가지붕 위 하이얀 박꽃 되어
이 밤도 그대 곁을 지키고 싶소
인연의 강
서혜경
손바닥을 펼쳐본다
손금들이 시간의 주름살이 되어
강 같이 흐르고 있다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강일까
상사화 꽃과 잎 같이
만나지 못하는 손금들은
강 끝에 닿을 수 있으려는지
주먹을 쥐어 본다
먼 길 돌아와
스치는 손금들
가벼운 인연은 내려놓고
깊은 강으로 흐르고 싶어 한다
한 손바닥 안에서
웃자란 인연들
강물들의 흐르는 소리를 듣는다.
혼자인 것이 어찌 너뿐이랴
윤준경
혼자인 것이 어찌 너뿐이랴
강물에 흐르는 외로움
넘칠 듯 출렁이지만
바람도 혼자가 싫어
이 밤은 산을 흔들고 있다
외로운 것이 어찌 너뿐이랴
그가 그림자처럼 네 발에 닿을 때에도
너의 눈은 늘 안개에 젖어
대낮에도 초점 잃고 허방 짚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아, 영원을 믿지 마라
영원은 오직 하늘에만 있는 것
인간의 영원은 우연일 뿐
영원도 가변성
혼자인 것이 어찌 슬픔뿐이랴
때로는 둘이어서 가시 돋치고
때로는 둘이어서 깨어지는 것
세상 끝날 때 우리는 다 혼자
혼자의 자유
혼자의 향기
먼저 가져서 더 좋은……?
옥상의 날들
조광자
철사로 구부린 둥근 인연들
팽팽한 긴장이 색색의 가슴을 물고
외줄을 타고 있다
바람이 물기를 나르는 시간
증발하지 못한 것들은 여전히 무겁다
어긋난 입술의 틈새를 밀고 뛰어내려야 할까
축 처진 옷의 무게에 앙다문 이빨
셔츠를 물고 늘어진 한나절이
가장의 어깨에 선명한 이빨자국을 남겼다
어둑한 저녁의 허리를 잡고 서로 마주 보는 옥상
뜨거운 볕에 뼈가 삭아 한 줄로 풀어 놓는 입담도 동색이다
맞물린 짝을 버리고 바닥으로 추락하는 일이
수행을 끝내는 일임을 모르고
쓸모를 잃어버린 외다리 악착같이 매달려 있다
눅진한 하루에 노을이 스며들어 붉어진 눈가
놓쳐버린 양말 한 짝 바닥에 뒹군다
잠시 앉았던 새 울음도 어둠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수아꽃
조하은
새털 같은 작은 손에 꽃잎 한 줌 올려주었지
꽃이 꽃잎을 후, 후 불더구나
흩어지는 꽃잎을 따라가며 까르르 웃던 너
꽃잎은 왜 떨어져요
꽃잎은 바람을 털어내려고 몸을 비트는 거란다
꽃잎이 떨어지는 동안
수국 꽃숭어리처럼 너의 말도 부풀어 올랐지
뜰에 있는 부레옥잠도 둥글게 잎을 말고 엿듣고 있었단다
병든 아비 남겨두고
제 어미의 손에 이끌려 먼 도시로 숨어버린 작은 꽃
프놈펜 변두리에서 만난 눈에 익은 너의 작은 신발은
정물처럼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너는 어느 언어로 엄마를 부르며 말의 꽃을 피우고 있을까
외딴집 처마 밑에서 홀로 바르르 떨고 있지는 않니
달싹거리는 입술을 열어
고모, 라는 호칭으로 내 심장을 포박한 너를 불러본다
수아야
천둥 번개 우르르 몰려다녀도 꽃은 꽃으로 다시 피어난단다
뜰에 남겨진 부레옥잠은 올해에도
잎과 잎 사이에서 잎을 낳고 있단다
함께 한다는 건
최경선
뿌리치고 싶던 적 있었겠지요
놓아버리고 싶었던 적도 있었겠지요
창경궁 옹벽 바윗돌과 한 몸으로 얽혀있는 회화나무를 보았습니다
단지 곁이었던 관계에서 함께 될 때까지 처절한 몸부림 오죽했겠습니까
떠밀리지 않기 위해 응물고 윽물리 듯 꽉 그러안고 깊게 스며들어야 온전히 설 수 있겠지요
우연이든 필연이든 경이롭고 장엄합니다
함께 한다는 건
곁을 내준다는 것, 함께 견딘다는 것
한 생을 품는 일이 된다는 걸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인연
최경옥
이렇게 진심이었던 적 없다
약속 없이 내게 다가온 꽃들
모양 색깔 꽃대의 선을 살피며
눈맞춤 하다 보면
똑같은 표정은 없다
꽃 하나하나에 내 마음을 담으면
꽃바구니, 꽃다발, 코르사주는
빛나는 보석이 된다
누구인지 알 수 없어도
내 손길이 닿은 꽃들은
사랑의 징표로
참을 수 없는 기쁨의 눈물로
보이지 않는 인연으로
더 활짝 피어날 것이다
인연
최윤경
약속된 장소로 아무런 생각 없이 나갔다
시간이 지나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어긋난 시간 사이로 빛이 걸어간다
어둑한 바람을 삼키고
수 없는 갈등이 할퀴며 지나가는
사람과 사람 사이
아이러니한 여유
인연화, 몇 송이를 그리다
한옥순
꽃을 가꿀 자신이 없어
종이 밭에 심었다
예쁜 집을 지을 수 없어
종이 밭에 지었다
아릿한 이름 놓을 수 없어
종이 밭에 새겼다
나를 영영 기억할 자신이 없어
맨 끝 장에 그렸다
동그란 무늬가 생겼다
끝내,
지워질 것을 알면서도 그려 본다
인연화 몇 송이, 송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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