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의 시대를 건너가는 낙타의 노래
나호열 (시인⦁문화평론가)
『영등포』는 79편의 시와 한 편의 산문으로 꾸며진 노희정 시인의 문집이다. 이 문집은 영등포역이나, 여의도와 같은 장소를 오가며 스며든 시인의 서정과 영등포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여러 사람들의 일상을 스케치한 작품들로 오랫동안 영등포 신문에 연재되었던 자료들이다.
예전과 달리 디지털의 눈부신 발전은 유, 무형의 자산을 기록하고 보존하는데 필요한 다양한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드론을 이용한 풍경의 조감鳥瞰이라든지, 지면紙面의 제한을 넘어 무한정의 자료를 소장할 수 있는 컴퓨터의 기능이 그러한 것들이다. 그러나 그런 기능들은 살아있는 사람의 숨결을 온전히 감싸 안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문집『영등포』는 생애의 반 이상을 발붙이며 살아온 고장, 사회에 첫 발은 내딛고, 혼례를 치루고 가정을 꾸리며 이순耳順에 이르른 감회가 남다른 노희정 시인의 고향 찬가讚歌라 불러도 좋을 애틋한 정서가 한 편 한 편에 가득 묻어나는 영등포에 대한 기록이다.
돌이켜보면 농경사회가 무너지고 급속하게 도시화가 이루어지면서 우리는 소중한 덕목들을 잃어버렸다. 농경사회가 지니고 있던 예절과 두레와 같은 공동체의 미덕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무모한 경쟁과 익명의 사회가 들어앉은 것이다.
영등포 또한 그러한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도도한 물결을 받아들인 곳으로서, 예전의 농경의 풍경은 사라지고 없다. 전래되는 이야기에 따르면 영등포永登浦는 한 해의 안녕을 기원하는 영등굿을 이월 초하루부터 보름동안 지금의 신길동 지역에서 행해졌다고 하고, 그래서인지 노희정 시인은 시「비나이다」에서 이와 같은 도당禱堂의 풍습을 복원해 내고 있다. 또한 이 곳에 한강 나루터가 인접해 있어 이 둘을 합쳐 영등포라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오늘날의 영등포의 역사歷史 아래에는 수 천년 이어져 내려온 농경의 희로애락이 잠들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영등포가 농경의 땅에서 공업의 땅으로, 오늘날과 같은 상업이 융성한 땅으로 변모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비록 일제의 야욕에 의해 건설되었지만 1899년 경인선의 개통, 1905년 경부선 개통으로 영등포역이 개설된 시점으로 볼 수 있다. 가난을 이겨보겠다고 서울로 올라오는 사람들의 꿈이 내리고, 온갖 물자들이 흘러가던 영등포역은 그 이후에 한강의 기적이 이루어지면서 서울 남부의 거점 도시로 변모해 왔던 것이다. 문집『영등포』에는 그런 까닭에 역을 노래한 많은 시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역은 “지상의 모든 그리움이 머무는 곳”(「영등포역」)이며, “장애물 상관없이 직선으로 직진하는”(「열차」) 에너지를 품게 하는 곳이라는 시인의 노래는 유목遊牧의 슬픔을 치유하는 약이다. 이제 우리의 삶은 정주定住가 허락되지 않는 유목의 시대를 지나가고 있다. 이런 저런 이유로 거처를 옮기며 고향의 의미를 상실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복면을 쓰고, 익명과 비밀번호와 CCTV의 감옥에 안심하는 낙타가 우리의 자화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노희정 시인은 영등포의 밝음과 그늘 그 사이에서 ‘사람다움’과 ‘관계의 아름다움’을 잊지 않으려는 따뜻한 눈길을 거두지 않는다. 한여름 무더위를 피해 다칸 쪽방에서 메타세콰이어 나무 밑으로 모인 사람들을 보며 누군가의 그늘이 되어야 한다는 소명감(「메타세콰이어 그늘 아래」 참조 )을 마음에 새기고자 한다. 하루 한 끼 식사에 감사하는 사람들을 위해 매일 사랑의 주먹밥을 만드는 김종국 신와 자원봉사자들, 아낌없이 인술을 베푸는 영등포한방병원 김철준 이사장, 춤으로 삶의 애환을 이겨내자는 건강댄스 강사 정병준 씨 등은 모두 영등포를 살아 숨쉬게 하는 보물로 기꺼이 그들을 칭송하는 노희정 시인인 것이다.
땅은 모든 생명의 어머니이자 끝내 돌아가야 할 고향이다. 인심이 변하고 필요에 따라 변화되는 땅은 그럼에도 생명의 숨결을 버리지 않는다. 삼행시「영등포」는 땅에 기대어 살고, 땅을 일구며 살아가는 우리의 꿈을 이렇게 노래했다.
영원을 기원하며 견고한 땅위에 영령들 정성 다해 빚은 땅
등불 켜고 탁 트인 영등포의 미래 위에 길 밝히고
포용하며 사랑하고 잔정한 행복의 둥지 틀고 오래오래 살 미래
문집『영등포』는 진정으로 영등포를 사랑하고 영등포와 함께 한 노희정 시인의 독백이지만 그 개인적 서정은 영등포의 날줄과 씨줄을 엮어내는 생활사生活史의 소중한 자료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믿는다.
오랜 시간 영등포의 이모저모를 담아내기 위해 노고를 마다하지 않은 시인의 열정이 가득한 문집이 영등포 구민 뿐만 아니라 향토를 사랑하는 많은 분들의 전범典範이 될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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