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상이란 위로는 천자를 보좌하여 음양을 다스리고… 안으로 백성들이 서로 친목하게 하고, 경대부로 하여금 각자 그 맡은 자리에서 충실하게 일하게 하는 자”(진평)
⊙ 재상은 청절한 절의와 법치에 대한 확고한 의식 그리고 큰 계책을 정할 줄 아는 술가의 면모를 고루 갖춰야
⊙ 조준(趙浚), 황희(黃喜), 신숙주(申叔舟), 이준경(李浚慶) 등이 國體에 이른 최상급 재상
⊙ “마음대로 자기 뜻에 맞는다고 사람을 쓰게 되면 반드시 큰 잘못을 저지르게 될 것”(소순)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 재상은 청절한 절의와 법치에 대한 확고한 의식 그리고 큰 계책을 정할 줄 아는 술가의 면모를 고루 갖춰야
⊙ 조준(趙浚), 황희(黃喜), 신숙주(申叔舟), 이준경(李浚慶) 등이 國體에 이른 최상급 재상
⊙ “마음대로 자기 뜻에 맞는다고 사람을 쓰게 되면 반드시 큰 잘못을 저지르게 될 것”(소순)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재상 황희.
한(漢)나라를 세운 유방(劉邦)에게 육가(陸賈·?~?)라는 신하가 《시경》과 《서경》을 강술하려 하자 유방이 욕하며 말했다.
“내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지 어찌 《시경》과 《서경》이 도움을 주었겠는가?”
이에 육가가 말했다.
“말 위에서 얻었다고 해서 어찌 말 위에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유방에게 큰 깨우침을 주었던 육가가 유방 사후 권력이 유씨(劉氏)에서 여씨(呂氏)로 넘어가자 승상 진평(陳平)을 찾아가 장군 주발(周勃)과 힘을 합쳐 권력을 다시 유씨에게 돌려놓을 것을 권하며 이렇게 말했다.
“천하가 안정되어 있을 때는 재상(宰相)을 주시하고 천하가 위태로울 때는 장군을 주시합니다.”
재상과 장군을 보는 눈과 쓰는 잣대는 다르다
“내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지 어찌 《시경》과 《서경》이 도움을 주었겠는가?”
이에 육가가 말했다.
“말 위에서 얻었다고 해서 어찌 말 위에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유방에게 큰 깨우침을 주었던 육가가 유방 사후 권력이 유씨(劉氏)에서 여씨(呂氏)로 넘어가자 승상 진평(陳平)을 찾아가 장군 주발(周勃)과 힘을 합쳐 권력을 다시 유씨에게 돌려놓을 것을 권하며 이렇게 말했다.
“천하가 안정되어 있을 때는 재상(宰相)을 주시하고 천하가 위태로울 때는 장군을 주시합니다.”
재상과 장군을 보는 눈과 쓰는 잣대는 다르다
소순 |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중 한 사람인 북송(北宋) 때 정치인 소순(蘇洵·1009~1066년)은 ‘재상을 임용할 때는 예로써 하라[任相]’는 글에서 장군과 달리 재상이 훨씬 중요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옛날에 다른 나라를 잘 살필 줄 아는 사람들은 오직 그 나라 재상이 어떤 사람인지를 살필 뿐이었다.
이 문제를 평하는 사람들은 늘 ‘장군과 재상은 그 중요도가 같다’고 하는데 장군은 단지 한 사람의 큰 관리일 뿐이요 재상과는 같을 수가 없다.
나라에 정벌과 같은 전쟁 등이 있고 나서야 장군의 권위는 무겁게 되지만 정벌 등이 있건 없건 재상은 단 하루도 가벼이 여길 수 없다.
재상이 뛰어나면 모든 관리가 뛰어나게 되고 장군 또한 뛰어나게 된다.
장군이 뛰어나고 재상이 뛰어나지 않다고 해도 장군을 재상으로 바꿀 수는 없다. 그렇기에 장군은 단지 한 사람의 큰 관리일 뿐이요 재상과는 같을 수가 없다고 말한 것이다.”
이어 소순은 재상을 임용하는 잣대와 장군을 쓰는 잣대를 명확히 구별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장군이 된 자는 대개 재주는 많지만 간혹 우둔하고 부끄러움이 없으니 모두가 절조(節操) 있고 염치가 있으며 예(禮)를 좋아하여 사람들이 감히 범접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그래서 반드시 예로 우대하지 않지만 그가 구속에 얽매이지 않아 불법을 저지르더라도 그를 일반적인 법으로 처벌할 수 없는 것은 어째서인가? 강하고 방종해서 구속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것은 실로 장군의 일반적인 태도이기 때문이다.
한 무제(武帝)가 대장군을 대할 때 종종 평상에 걸터앉은 채로 대했고 이광리(李廣利)가 대완국(大宛國)을 쳐서 승리했을 때 많은 군졸을 희생시킨 죄에 대해서는 들추지도 않고 불문에 부쳤다. 이것이 장군을 임용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재상의 경우에는 반드시 절조 있고 염치가 있으며 예(禮)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강하고 방종해서 구속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천자는 재상에게 예를 갖추어 우대하고 책임을 엄중하게 요구하는 것이다.”
임금의 禮待와 신하의 盡禮
“옛날에 다른 나라를 잘 살필 줄 아는 사람들은 오직 그 나라 재상이 어떤 사람인지를 살필 뿐이었다.
이 문제를 평하는 사람들은 늘 ‘장군과 재상은 그 중요도가 같다’고 하는데 장군은 단지 한 사람의 큰 관리일 뿐이요 재상과는 같을 수가 없다.
나라에 정벌과 같은 전쟁 등이 있고 나서야 장군의 권위는 무겁게 되지만 정벌 등이 있건 없건 재상은 단 하루도 가벼이 여길 수 없다.
재상이 뛰어나면 모든 관리가 뛰어나게 되고 장군 또한 뛰어나게 된다.
장군이 뛰어나고 재상이 뛰어나지 않다고 해도 장군을 재상으로 바꿀 수는 없다. 그렇기에 장군은 단지 한 사람의 큰 관리일 뿐이요 재상과는 같을 수가 없다고 말한 것이다.”
이어 소순은 재상을 임용하는 잣대와 장군을 쓰는 잣대를 명확히 구별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장군이 된 자는 대개 재주는 많지만 간혹 우둔하고 부끄러움이 없으니 모두가 절조(節操) 있고 염치가 있으며 예(禮)를 좋아하여 사람들이 감히 범접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그래서 반드시 예로 우대하지 않지만 그가 구속에 얽매이지 않아 불법을 저지르더라도 그를 일반적인 법으로 처벌할 수 없는 것은 어째서인가? 강하고 방종해서 구속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것은 실로 장군의 일반적인 태도이기 때문이다.
한 무제(武帝)가 대장군을 대할 때 종종 평상에 걸터앉은 채로 대했고 이광리(李廣利)가 대완국(大宛國)을 쳐서 승리했을 때 많은 군졸을 희생시킨 죄에 대해서는 들추지도 않고 불문에 부쳤다. 이것이 장군을 임용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재상의 경우에는 반드시 절조 있고 염치가 있으며 예(禮)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강하고 방종해서 구속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천자는 재상에게 예를 갖추어 우대하고 책임을 엄중하게 요구하는 것이다.”
임금의 禮待와 신하의 盡禮
이미 공자는 《논어》에서 임금이 신하를 예대(禮待)할 것을 강조한 바 있다. 팔일(八佾)편 19다.
〈(노나라) 정공(定公)이 물었다.
“임금이 신하를 부리고 신하가 임금을 섬길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공자가 대답했다.
“임금이 신하를 부릴 때는 예로써 하고 신하가 임금을 섬길 때는 충직함으로 해야 합니다.”〉
이때 신하를 재상으로 고치면 그대로 소순이 한 말과 통한다. 바로 앞 팔일편 18에서 공자는 또 이렇게 말한다.
〈공자가 말했다.
“(내가) 임금을 섬기면서 예를 다했더니 사람들은 그것을 아첨이라고 여겼다.”
임금은 재상에게 예대(禮待)하고 재상은 임금에게 진례(盡禮)해야 한다. 예를 다하는 것이 충(忠)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서 오히려 아첨이라고 여긴다고 했다. 《서경》 주서(周書) 군진(君陳)편에 나오는 글 하나를 보자. 상-중-하로 보자면 충이 상, 진례가 중이고 군진은 하인 셈이다.
“너에게 아름다운 모책과 계책이 있거든 즉시 들어와 안에서 너의 임금에게 고하고 네가 그것을 밖에 말할 때에는 ‘이 모책과 계책은 오직 우리 임금 덕분이다’라고 하라.”〉
재상과 책임
이를 흔히 군진지충(君陳之忠)이라고 한다. 그러나 곁에서 이를 지켜보는 이가 있다면 아첨으로 여길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임금과 신하는 일의 이치[事理=禮]를 연결고리로 맺어진 것이지 일을 떠나는 순간 아무것도 아닌 관계로 돌아간다. 힘에 의한 복속 관계와는 무관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진례하지 않는 신하는 신하다운 신하가 아니고 예대하지 않는 임금은 임금다운 임금이 아니다.
다시 소순의 말이다.
“예로써 재상을 우대한 다음에 책임을 엄중히 물으니 원망하는 말이 없게 될 것이고, 책임을 엄하게 묻고 난 다음에 예로써 대우하는 것도 잘못된 것은 아니다.
예를 차리지 않으면서 책임만 엄중히 묻는다면, 그는 ‘주상께서는 저를 무슨 예로 대우하셨기에 저를 이같이 엄하게 문책하십니까? 너무 심하십니다’라고 할 것이다.
책임은 가볍고 예가 중하면, 그는 장차 게을러져서 자신이 할 일에 힘쓰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로써 우대하여 재상의 마음을 묶어두고, 엄중한 책임으로 재상에게 게으르지 않도록 격려한 이후에야, 재상 된 자는 조정에 충성을 다할 것이다.”
論相 1
논상(論相)이란 임금 입장에서 재상 감을 논한다는 뜻이다. 먼저 임금이 뛰어난 이를 재상으로 두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출발점이다. 유향(劉向)이 편집하고 저술한 《설원(說苑)》(이한우 옮김, 21세기북스) 제1장 임금의 도리[君道]에 실린 두 글은 이 점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1-13
(은나라를 세운) 탕왕(湯王)이 이윤(伊尹)에게 물었다.
“삼공(三公), 구경(九卿), 이십칠 대부(大夫), 팔십일 원사를 (뽑아 씀에 있어) 알아보는 데 어떤 도리가 있는가?”
이윤이 대답해 말했다.
“옛날에 요(堯)임금은 사람을 보는 순간 알아보았고 순(舜)임금은 일을 맡긴 다음에 알아보았고 우왕(禹王)은 일을 (맡겨) 이룬 다음에 그를 들어 썼습니다. 무릇 세 임금이 뛰어난 이를 들어 쓴 것은 모두 도리는 달랐지만 공업(功業)을 이루어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여전히 잘못된 것이 있었는데 하물며 아무런 법도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자기 뜻에 맞는다고 사람을 쓰게 되면 반드시 큰 잘못을 저지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임금은 신하에게 자기가 가진 능력을 바치게 한다면 만의 하나라도 잘못됨이 없을 것입니다.”
1-14
임금 된 자는 어떤 잣대로 뛰어난 이를 뽑아야 하는가?
무릇 임금 된 자란 뛰어난 재목을 얻어 자기를 보필하게 한 다음에야 다스리는 것이니 비록 요순과 같은 눈 밝음이 있더라도 고굉(股肱·팔다리)과 같은 신하들이 갖춰져 있지 않으면 임금의 은혜는 널리 퍼지지 않고 교화로 인한 은택은 행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눈 밝은 임금이 위에 있게 되면 선비를 고르는 데 신중하고 뛰어난 이를 찾는 데 힘쓰며 사방의 보좌를 두어 자기를 보필하게 해 영준한 인재들로 하여금 관직을 맡게 하여 그 작위를 높이고 그 봉록을 무겁게 해 뛰어난 이는 (벼슬에) 나아와 눈부신 영예를 누리고 능력이 떨어지는 자는 물러나 자기 일에 힘쓰게 한다. 이 때문에 임금은 더 이상 남은 근심이 없고 아래에서는 사특(邪慝)한 마음을 갖지 않아 백관은 능히 다스려지고 신하들은 직무에 즐거이 임해 은혜는 많은 백성에게 펼쳐지고 윤택함은 초목에까지 미치게 된다.
옛날에 우순(虞舜·순임금)은 왼쪽에 우를, 오른쪽에 고요를 두어 (자기는) 당(堂) 아래로 내려가지 않고서도 천하는 다스려졌으니 이것이 바로 능력 있는 사람을 잘 부린 결과다.
論相 2
조선 현종 12년(1671년) 11월 30일 우레 등의 변고가 있자 우의정 송시열이 사직을 청하는 소를 올렸는데 그중에 바람직한 정승이란 어떠해야 하는지를 논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신(臣)은 또 임금의 일 중에 정승을 논하는 것[論相]보다 더 큰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승을 논하여 적임자를 얻으면 어지러움을 다스릴 수 있고 망할 것을 보존시킬 수 있지만, 진실로 적임자를 얻지 못한다면 안정이 필시 위험해지고 융성이 필시 쇠퇴해질 것입니다. 전하와 같은 명성(明聖)으로 어찌 이것을 모르시겠습니까마는, 또한 신 같은 자를 그사이에 채워 넣으셨습니다. 신은 그 적임자가 결코 아니며 또 조석 간에 쓰러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시 진용할 기회가 없고 나라 상황은 불 속에서 구하고 물속에서 건지듯 급해질 것입니다. 모름지기 신의 직을 빨리 갈고 그 적임자를 빨리 구하여 그 지위에 놓는다면 나라의 상황이 가망 있게 될 것입니다.
주자(朱子)께서 일찍이 인군논상(人君論相)의 설을 가지고 그 임금에게 아뢰기를 ‘정승을 논해야 할 사람이 자기에게 맞는 자를 구할 뿐 자기를 바로잡아주는 자를 구하지 않고, 사랑할 만한 자를 취할 뿐 두려워할 만한 자를 취하지 않는다면, 임금은 그 직임을 잃은 것이다. 임금을 바로잡아야 할 사람이 옳은 일을 건의하고 안 될 일을 폐기하는 것을 일삼지 않고 부합하여 뜻을 받드는 것을 능사로 삼으며, 세상을 경영할 때 사물을 주관하는 것을 마음먹지 않고 자신을 용납받고 총애를 굳히는 것을 기술로 삼는다면, 재상은 그 직임을 잃은 것이다. 자기를 바로잡아주고 두려워할 만한 자를 뽑는다면 반드시 자중하는 사람을 얻게 될 것이고, 내가 그에게 맡기는 것도 부득불 무겁게 될 것이다. 맡기는 것이 무거우면 그가 옳은 일을 건의하고 안 될 일을 폐기하려는 뜻을 다할 것이며, 세상을 경영하고 사물을 주관하려는 그 마음을 행할 것이다. 또 곧고 우직하며 과감히 말하는 천하의 선비를 공정히 뽑아 대간(臺諫)으로 삼고 관직을 주어 의논에 참여케 할 것이다. 내 복심이목(腹心耳目)의 임무 부여가 항상 뛰어난 사대부에게 있고 군소배들에게 있지 않게 하며, 옳고 그름을 상벌하는 권한이 항상 낭묘(廊廟)에 있게 하고 사문(私門)에서 나오지 않게 한다’라고 했습니다.
이 설은 실로 임금이 정승을 논하는 핵심적인 방법입니다. 전하께서 시험 삼아 이렇게 정승을 구하신다면 반드시 그 적임자가 있을 것입니다.”
주희 특유의 임금을 바로잡는 정군(正君), 즉 격군론(格君論)이 담겨 있기는 하지만 원칙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뛰어난 재상의 덕목[賢相之德]
《논어》 위령공(衛靈公)편 9에 나오는 일화부터 보자.
〈자공(子貢)이 어짊을 행함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했다.
“장인(匠人)이 일을 잘하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그 도구들을 예리하게 한다.
이 나라에 있으면 그 나라 사대부들 중에서 뛰어난 이들을 (스승처럼) 섬기고 그 선비들 중에서 어진 사람을 벗 삼아야 한다.”〉
이 글은 장인을 임금으로 바꾸면 이해가 훨씬 쉬워진다. 장인이 일을 잘하기 위해 제일 먼저 할 일은 자기 연장을 잘 가다듬고 예리하게 하는 것이다. 임금 입장에서는 재상을 잘 골라 쓰는 일이 이에 해당한다.
스승처럼 여길 신하[師臣]와 벗처럼 여길 신하[友臣]를 찾아내라는 말은, 스승과 같은 재상, 벗과 같은 경대부(卿大夫)와 대간(臺諫)들을 가까이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훌륭한 재상은 어떤 덕목과 자질을 갖추어야 하는가? 공자는 곧음[直]을 들었다. 안연(顔淵)편 22다.
〈번지가 안다는 것[知]이 무엇이냐고 묻자 공자가 말했다.
“사람을 아는 것이다.[知人]”
번지가 (특히 사람을 아는 것과 관련해)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자 공자가 말했다.
“곧은 사람[直]을 들어 쓰고 모든 굽은 사람은 제자리에 두면, 굽은 자로 하여금 곧아지게 할 수 있다.”
번지는 물러나와 자하(子夏)를 찾아가 물었다.
“내가 스승님을 뵙고서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묻자 스승님께서 ‘곧은 사람을 들어 쓰고 모든 굽은 사람은 제자리에 두면, 굽은 자로 하여금 곧아지게 할 수 있다’고 하셨다. 무엇을 말함인가?”
자하가 말했다.
“풍부하도다! 그 말씀이! 순(舜)임금이 천하를 소유함에 여러 사람 중에서 선발하여 고요(皐陶)를 들어 쓰시니 어질지 못한 자들이 멀리 사라졌고, 탕왕(湯王)이 천하를 소유함에 여러 사람 중에서 선발하여 이윤(伊尹)을 들어 쓰시니 어질지 못한 자들이 멀리 사라졌다.”〉
고요나 이윤 모두 옛날의 뛰어난 재상이다.
유소의 《인물지》
이번에는 위(魏)나라 조조(曹操·155~220년)의 신하 유소(劉劭)의 《인물지》가 제시하는 뛰어난 재상이 갖춰야 할 덕목을 살펴보자.
지인지감(知人之鑑)에 관심이 많았던 조조의 명을 받아 유소는 《인물지》를 지었다. 이는 앞으로 조선 재상들을 구체적으로 파고들 때 유용한 잣대가 될 것이다.
〈청절(淸節)의 다움은 (후사를 가르치는) 사씨(師氏)의 임무에 어울린다. [原註-도리와 다움을 담당하며 주자(胄子)들을 가르치고 인도한다.]
법가(法家)의 재능은 (범죄를 막고 처벌하는) 사구(司寇)의 임무에 어울린다. [原註-형벌과 법률을 담당하며 간사한 자와 난폭한 자들을 막는 일을 한다.]
술가(術家)의 재능은 (재상을 보좌하는) 삼고(三孤)의 임무에 어울린다. [原註-묘당(廟堂·정승이나 삼공의 근무처)에서 계책을 내는 일을 담당하며 삼공을 도와 바른 도리를 논한다.]
삼재를 순전하게 갖춘 경우 삼공(三公)의 임무에 어울린다. [原註-지위는 삼괴(三槐)이며 삼괴를 보고 앉아서 큰 도리를 논한다.] [譯註-삼괴란 옛날에는 조정(朝廷) 뜰에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심고 삼공(三公)이 이것을 향하여 앉았다는 데서 온 말로 삼공(三公)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삼재를 미미하게 갖춘 경우 총재(冡宰)의 임무에 어울린다. [原註-천관(天官·이조판서)의 경(卿)으로 백관을 총괄한다.]
장부(臧否)의 재능은 사씨(師氏) 보좌에 어울린다. [原註-옳고 그름을 분별함으로써 사씨(師氏)를 보좌한다.]
지의(智意)의 재능은 총재 보좌에 어울린다. [原註-사(師)의 일을 마땅함으로 제어해 천관을 보좌한다.]
기량(伎倆)의 재능은 사공(司空·토목 담당)의 임무에 어울린다. [原註-생각을 섞어 정교한 해법을 찾아내는 사람은 그래서 동관(冬官·조선 시대 공조판서)을 담당한다.]
유학(儒學)의 재능은 안민(安民·백성 교화)의 임무에 어울린다. [原註-다움과 떳떳함을 담당하며 그 사람됨을 보호하고 지켜낸다.]
문장(文章)의 재능은 국사(國史·역사 서술)의 임무에 어울린다. [原註-법도가 되는 모범을 서술함으로써 후대에 드리운다.]
변급(辯給)의 재능은 행인(行人·외교관)의 임무에 어울린다. [原註-저쪽의 제안에 이쪽이 제대로 반응하며 길에서 다른 나라의 외교관을 잘 보낼 수 있다.]
효웅(驍雄)의 재능은 장수(將帥)의 임무에 어울린다. [原註-군사를 통할하며 고분고분하지 않은 자들을 토벌하고 평정한다.]〉
재상 감이란?
먼저 유소는 기본적인 세 가지 신하 유형을 제시한다.
그 첫째가 청절가이다. 주자(胄子)는 원래는 임금의 맏아들만 가리키다가 점점 확대되어 천자부터 경대부까지 이르는 뜻으로 바뀌었다. 주자는 그래서 나라 사람의 아들이라 해서 국자(國子)와 통하며 성균관 전신이 바로 국자감이나 주자감이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대체로 조선 시대에 이런 인물들은 정사에 참여하기보다는 주로 성균관에서 경력을 쌓았다. 성균관 좨주(祭主)가 대표적이다. 조선 초 권근(權近·1352~1409년)이 이에 속한다.
청절가가 교육을 담당하는 사도(司徒)에 어울린다면 법가는 범죄를 막는 일을 하는 사구(司寇)에 어울린다. 형조판서의 뿌리라 하겠다.
술가는 계책에 능한 사람이다. 삼고(三孤)란 조선 시대 삼정승 바로 아래 찬성(贊成)과 참찬(參贊)에 해당한다.(찬성은 정승이 일을 이루는 것을 돕는다는 뜻이고 참찬은 그 돕는 일에 참여한다는 뜻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이 세 가지를 바탕으로 재상 감을 논한다. 이상 세 가지 재능을 고루 갖춘 이를 국체(國體)라고 부르는데 바로 재상 감이다.
재상은 청절한 절의와 법치에 대한 확고한 의식 그리고 큰 계책을 정할 줄 아는 술가의 면모를 고루 갖춰야 한다. 대체적으로 청절한 절의만을 강조하는 우리의 전통적인 신하관 혹은 재상관과는 다르다. 실제로 재상은 정(正)보다는 중(中), 상도(常道)보다는 권도(權道)에 능해야 한다는 점에서 유소가 제시하는 재상관이 훨씬 현실적이다. 유소는 이런 최고 수준에 이른 재상으로 이윤(伊尹)과 태공(太公)을 꼽는다.
조선 초 조준(趙浚·1346~1405년)이나 황희(黃喜·1363~1452년), 신숙주(申叔舟·1417~1475년) 그리고 조선 중기 이준경(李浚慶·1499~1572년) 등이 바로 국체(國體)에 이른 재상이라 하겠다. 하륜(河崙·1347~1416년)의 경우 큰 계책을 정하고 제도 정비를 이루어냈다는 점에서 술가와 법가의 면모는 출중했지만, 청절 측면에서 높은 점수를 받기는 어렵다 하겠다.
國體와 기능가
청절가·법가·술가 세 가지 재능을 고루 갖추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재상 감에 비해 떨어지는 인물을 유소는 기능가(器能家)라고 이름지었다. 조준 아래에서 정승을 지낸 김사형(金士衡·1333~1407년)이나 황희의 파트너 맹사성(孟思誠·1360~1438년)이 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학재(學才)가 단연 출중했던 정인지(鄭麟趾·1396~1478년) 또한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대체로 큰 계책을 결단하는 술가 덕목이 떨어지는 유형이다.
대체로 조선 재상들은 국체보다는 기능가들이 많았다고 할 수 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데 집중하는 장부가는 청절가의 아류(亞流)이고 큰 계책이나 원대한 안목은 없으나 맡은 관직은 빈틈없이 수행할 수 있는 기량가는 법가의 아류로 주로 유능한 경조윤(京兆尹), 오늘날로 치면 서울시장직을 잘 수행할 수 있다. 지의가는 새 제도를 만들어내지는 못하지만 임기응변에 능하고 잔재주가 많아 술가의 아류라 할 수 있다.
나머지 문장, 유학, 변급, 효웅은 재상의 덕목과는 무관하기 때문에 더 이상 논하지 않는다. 문장가는 사마천, 반고처럼 역사를 쓸 수 있고 유학가는 옛일을 전수만 할 뿐 일을 맡기기에는 적합지 않다. 말재주에 능한 변급가는 외교를 맡길 만하고 웅걸은 한신(韓信·?~기원전 196년)이 대표적이다. 조선 역사에서는 이순신(李舜臣·1545~1598년)이 이에 속한다.
재상이 할 일이 무엇인가를 보여준 진평
사마천 《사기(史記)》 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에는 재상 혹은 승상이 어떤 일을 하는 자리인지 명확하게 보여주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한나라) 문제(文帝)가 즉위하여 태위(太尉) 주발이 몸소 병사를 이끌고 여씨들을 죽인 공이 많다고 여겼다. 이에 진평은 주발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병을 핑계로 사직하려고 했다. 효문제가 막 즉위하여 진평이 병을 핑계 대는 것이 괴이하여 물었다. 진평은 “고제(高帝·한 고조 유방) 때 주발의 공은 신 진평만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씨들을 죽인 일에서 신의 공은 주발만 못합니다. 바라건대 우승상을 주발에게 양보하고자 합니다”라고 했다. 이에 효문제는 강후(絳侯) 주발을 우승상에 임명하니 서열 제1위였다. 진평을 좌승상으로 옮기니 서열이 두 번째였다. 진평에게 금 1000 근을 내리고 식읍 3000 호를 더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효문제는 갈수록 국가의 일에 익숙해졌다. 한번은 조회에서 우승상 주발에게 “천하에서 1년 동안 처리하는 사건이 얼마나 되오?”라고 물었다. 주발은 사죄하며 “모릅니다”라고 했다. 이어 “그럼 천하에서 1년 동안 들어오고 나가는 돈과 곡식이 얼마나 되오?”라고 묻자 주발은 또 모른다고 사죄했는데,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했다.
이에 상이 다시 좌승상 진평에게 물었다. 진평은 “담당자가 있습니다”라고 했다. 주상이 “담당자가 누구인가?”라고 묻자 진평은 “폐하께서 사건 처리를 물으시려면 정위(廷尉)를 찾으시면 되고, 돈이나 곡식에 대해 알고 싶으시면 치속내사(治粟內史)를 찾으면 됩니다”라고 했다.
상이 “정말 각자 담당하는 자가 있다면 그대가 맡은 일은 무엇이오?”라고 묻자 진평은 사죄하며 이렇게 말했다.
“신하들을 주관합니다. 폐하께서 신이 모자란 사람이란 것을 모르시고 재상이란 자리에 앉히셨습니다. 재상이란 위로는 천자를 보좌하여 음양을 다스리고 사시를 순조롭게 하며, 아래로는 만물을 알맞게 기르고, 밖으로는 사방 오랑캐와 제후들을 어루만지며, 안으로는 백성들이 서로 친목하게 하고, 경대부로 하여금 각자 그 맡은 자리에서 충실하게 일하게 하는 직입니다.”
효문제는 좋다고 칭찬했다. 우승상은 크게 부끄러워 조정에서 나오자 “그대는 어째서 평소 나에게 그런 대답을 가르쳐주지 않았단 말이오?”라며 진평을 나무랐다. 진평이 웃으며 “그대는 그 자리에 있으면서 그 임무를 몰랐단 말이오? 그럼 폐하께서 장안의 도둑들 숫자를 물으면 그대는 억지로 대답하려고 했소?”라고 했다. 이에 강후는 자신이 능력 면에서 진평에 훨씬 못 미친다는 것을 알았다. 얼마 뒤 강후는 병을 핑계로 승상직 사퇴를 청했고, 진평이 홀로 승상을 맡게 되었다.〉
사마천은 진평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진 승상 평은 젊었을 때부터 황제(黃帝)와 노자(老子)의 법술을 좋아했다. 또 그가 도마 위의 고기를 나눌 때부터 그 뜻이 이미 원대했다. 그 뒤 초나라와 위나라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다 마침내 고제에게로 갔다. 늘 기이한 책략을 내서 얽히고설킨 어려움을 풀고 국가의 근심을 털어냈다. 여후 때 일들이 많았으나 진평은 결국 자기 힘으로 어려움에서 벗어나 종묘를 안정시키고 영예로운 명성을 끝까지 지킴으로써 뛰어난 재상[賢相]이란 칭송을 들었다. 이 어찌 처음과 끝이 다 좋았다고 하지 않겠는가? 그의 지혜와 모략이 아니고서야 누가 능히 이런 어려움을 감당해낼 수 있었겠는가?”⊙
〈(노나라) 정공(定公)이 물었다.
“임금이 신하를 부리고 신하가 임금을 섬길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공자가 대답했다.
“임금이 신하를 부릴 때는 예로써 하고 신하가 임금을 섬길 때는 충직함으로 해야 합니다.”〉
이때 신하를 재상으로 고치면 그대로 소순이 한 말과 통한다. 바로 앞 팔일편 18에서 공자는 또 이렇게 말한다.
〈공자가 말했다.
“(내가) 임금을 섬기면서 예를 다했더니 사람들은 그것을 아첨이라고 여겼다.”
임금은 재상에게 예대(禮待)하고 재상은 임금에게 진례(盡禮)해야 한다. 예를 다하는 것이 충(忠)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서 오히려 아첨이라고 여긴다고 했다. 《서경》 주서(周書) 군진(君陳)편에 나오는 글 하나를 보자. 상-중-하로 보자면 충이 상, 진례가 중이고 군진은 하인 셈이다.
“너에게 아름다운 모책과 계책이 있거든 즉시 들어와 안에서 너의 임금에게 고하고 네가 그것을 밖에 말할 때에는 ‘이 모책과 계책은 오직 우리 임금 덕분이다’라고 하라.”〉
재상과 책임
이를 흔히 군진지충(君陳之忠)이라고 한다. 그러나 곁에서 이를 지켜보는 이가 있다면 아첨으로 여길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임금과 신하는 일의 이치[事理=禮]를 연결고리로 맺어진 것이지 일을 떠나는 순간 아무것도 아닌 관계로 돌아간다. 힘에 의한 복속 관계와는 무관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진례하지 않는 신하는 신하다운 신하가 아니고 예대하지 않는 임금은 임금다운 임금이 아니다.
다시 소순의 말이다.
“예로써 재상을 우대한 다음에 책임을 엄중히 물으니 원망하는 말이 없게 될 것이고, 책임을 엄하게 묻고 난 다음에 예로써 대우하는 것도 잘못된 것은 아니다.
예를 차리지 않으면서 책임만 엄중히 묻는다면, 그는 ‘주상께서는 저를 무슨 예로 대우하셨기에 저를 이같이 엄하게 문책하십니까? 너무 심하십니다’라고 할 것이다.
책임은 가볍고 예가 중하면, 그는 장차 게을러져서 자신이 할 일에 힘쓰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로써 우대하여 재상의 마음을 묶어두고, 엄중한 책임으로 재상에게 게으르지 않도록 격려한 이후에야, 재상 된 자는 조정에 충성을 다할 것이다.”
논상(論相)이란 임금 입장에서 재상 감을 논한다는 뜻이다. 먼저 임금이 뛰어난 이를 재상으로 두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출발점이다. 유향(劉向)이 편집하고 저술한 《설원(說苑)》(이한우 옮김, 21세기북스) 제1장 임금의 도리[君道]에 실린 두 글은 이 점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1-13
은 탕왕의 재상 이윤. |
“삼공(三公), 구경(九卿), 이십칠 대부(大夫), 팔십일 원사를 (뽑아 씀에 있어) 알아보는 데 어떤 도리가 있는가?”
이윤이 대답해 말했다.
“옛날에 요(堯)임금은 사람을 보는 순간 알아보았고 순(舜)임금은 일을 맡긴 다음에 알아보았고 우왕(禹王)은 일을 (맡겨) 이룬 다음에 그를 들어 썼습니다. 무릇 세 임금이 뛰어난 이를 들어 쓴 것은 모두 도리는 달랐지만 공업(功業)을 이루어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여전히 잘못된 것이 있었는데 하물며 아무런 법도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자기 뜻에 맞는다고 사람을 쓰게 되면 반드시 큰 잘못을 저지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임금은 신하에게 자기가 가진 능력을 바치게 한다면 만의 하나라도 잘못됨이 없을 것입니다.”
1-14
임금 된 자는 어떤 잣대로 뛰어난 이를 뽑아야 하는가?
무릇 임금 된 자란 뛰어난 재목을 얻어 자기를 보필하게 한 다음에야 다스리는 것이니 비록 요순과 같은 눈 밝음이 있더라도 고굉(股肱·팔다리)과 같은 신하들이 갖춰져 있지 않으면 임금의 은혜는 널리 퍼지지 않고 교화로 인한 은택은 행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눈 밝은 임금이 위에 있게 되면 선비를 고르는 데 신중하고 뛰어난 이를 찾는 데 힘쓰며 사방의 보좌를 두어 자기를 보필하게 해 영준한 인재들로 하여금 관직을 맡게 하여 그 작위를 높이고 그 봉록을 무겁게 해 뛰어난 이는 (벼슬에) 나아와 눈부신 영예를 누리고 능력이 떨어지는 자는 물러나 자기 일에 힘쓰게 한다. 이 때문에 임금은 더 이상 남은 근심이 없고 아래에서는 사특(邪慝)한 마음을 갖지 않아 백관은 능히 다스려지고 신하들은 직무에 즐거이 임해 은혜는 많은 백성에게 펼쳐지고 윤택함은 초목에까지 미치게 된다.
옛날에 우순(虞舜·순임금)은 왼쪽에 우를, 오른쪽에 고요를 두어 (자기는) 당(堂) 아래로 내려가지 않고서도 천하는 다스려졌으니 이것이 바로 능력 있는 사람을 잘 부린 결과다.
論相 2
송시열 |
“신(臣)은 또 임금의 일 중에 정승을 논하는 것[論相]보다 더 큰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승을 논하여 적임자를 얻으면 어지러움을 다스릴 수 있고 망할 것을 보존시킬 수 있지만, 진실로 적임자를 얻지 못한다면 안정이 필시 위험해지고 융성이 필시 쇠퇴해질 것입니다. 전하와 같은 명성(明聖)으로 어찌 이것을 모르시겠습니까마는, 또한 신 같은 자를 그사이에 채워 넣으셨습니다. 신은 그 적임자가 결코 아니며 또 조석 간에 쓰러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시 진용할 기회가 없고 나라 상황은 불 속에서 구하고 물속에서 건지듯 급해질 것입니다. 모름지기 신의 직을 빨리 갈고 그 적임자를 빨리 구하여 그 지위에 놓는다면 나라의 상황이 가망 있게 될 것입니다.
주자(朱子)께서 일찍이 인군논상(人君論相)의 설을 가지고 그 임금에게 아뢰기를 ‘정승을 논해야 할 사람이 자기에게 맞는 자를 구할 뿐 자기를 바로잡아주는 자를 구하지 않고, 사랑할 만한 자를 취할 뿐 두려워할 만한 자를 취하지 않는다면, 임금은 그 직임을 잃은 것이다. 임금을 바로잡아야 할 사람이 옳은 일을 건의하고 안 될 일을 폐기하는 것을 일삼지 않고 부합하여 뜻을 받드는 것을 능사로 삼으며, 세상을 경영할 때 사물을 주관하는 것을 마음먹지 않고 자신을 용납받고 총애를 굳히는 것을 기술로 삼는다면, 재상은 그 직임을 잃은 것이다. 자기를 바로잡아주고 두려워할 만한 자를 뽑는다면 반드시 자중하는 사람을 얻게 될 것이고, 내가 그에게 맡기는 것도 부득불 무겁게 될 것이다. 맡기는 것이 무거우면 그가 옳은 일을 건의하고 안 될 일을 폐기하려는 뜻을 다할 것이며, 세상을 경영하고 사물을 주관하려는 그 마음을 행할 것이다. 또 곧고 우직하며 과감히 말하는 천하의 선비를 공정히 뽑아 대간(臺諫)으로 삼고 관직을 주어 의논에 참여케 할 것이다. 내 복심이목(腹心耳目)의 임무 부여가 항상 뛰어난 사대부에게 있고 군소배들에게 있지 않게 하며, 옳고 그름을 상벌하는 권한이 항상 낭묘(廊廟)에 있게 하고 사문(私門)에서 나오지 않게 한다’라고 했습니다.
이 설은 실로 임금이 정승을 논하는 핵심적인 방법입니다. 전하께서 시험 삼아 이렇게 정승을 구하신다면 반드시 그 적임자가 있을 것입니다.”
주희 특유의 임금을 바로잡는 정군(正君), 즉 격군론(格君論)이 담겨 있기는 하지만 원칙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논어》 위령공(衛靈公)편 9에 나오는 일화부터 보자.
〈자공(子貢)이 어짊을 행함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했다.
“장인(匠人)이 일을 잘하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그 도구들을 예리하게 한다.
이 나라에 있으면 그 나라 사대부들 중에서 뛰어난 이들을 (스승처럼) 섬기고 그 선비들 중에서 어진 사람을 벗 삼아야 한다.”〉
이 글은 장인을 임금으로 바꾸면 이해가 훨씬 쉬워진다. 장인이 일을 잘하기 위해 제일 먼저 할 일은 자기 연장을 잘 가다듬고 예리하게 하는 것이다. 임금 입장에서는 재상을 잘 골라 쓰는 일이 이에 해당한다.
스승처럼 여길 신하[師臣]와 벗처럼 여길 신하[友臣]를 찾아내라는 말은, 스승과 같은 재상, 벗과 같은 경대부(卿大夫)와 대간(臺諫)들을 가까이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훌륭한 재상은 어떤 덕목과 자질을 갖추어야 하는가? 공자는 곧음[直]을 들었다. 안연(顔淵)편 22다.
〈번지가 안다는 것[知]이 무엇이냐고 묻자 공자가 말했다.
“사람을 아는 것이다.[知人]”
번지가 (특히 사람을 아는 것과 관련해)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자 공자가 말했다.
“곧은 사람[直]을 들어 쓰고 모든 굽은 사람은 제자리에 두면, 굽은 자로 하여금 곧아지게 할 수 있다.”
번지는 물러나와 자하(子夏)를 찾아가 물었다.
“내가 스승님을 뵙고서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묻자 스승님께서 ‘곧은 사람을 들어 쓰고 모든 굽은 사람은 제자리에 두면, 굽은 자로 하여금 곧아지게 할 수 있다’고 하셨다. 무엇을 말함인가?”
자하가 말했다.
“풍부하도다! 그 말씀이! 순(舜)임금이 천하를 소유함에 여러 사람 중에서 선발하여 고요(皐陶)를 들어 쓰시니 어질지 못한 자들이 멀리 사라졌고, 탕왕(湯王)이 천하를 소유함에 여러 사람 중에서 선발하여 이윤(伊尹)을 들어 쓰시니 어질지 못한 자들이 멀리 사라졌다.”〉
고요나 이윤 모두 옛날의 뛰어난 재상이다.
유소의 《인물지》
이번에는 위(魏)나라 조조(曹操·155~220년)의 신하 유소(劉劭)의 《인물지》가 제시하는 뛰어난 재상이 갖춰야 할 덕목을 살펴보자.
지인지감(知人之鑑)에 관심이 많았던 조조의 명을 받아 유소는 《인물지》를 지었다. 이는 앞으로 조선 재상들을 구체적으로 파고들 때 유용한 잣대가 될 것이다.
〈청절(淸節)의 다움은 (후사를 가르치는) 사씨(師氏)의 임무에 어울린다. [原註-도리와 다움을 담당하며 주자(胄子)들을 가르치고 인도한다.]
법가(法家)의 재능은 (범죄를 막고 처벌하는) 사구(司寇)의 임무에 어울린다. [原註-형벌과 법률을 담당하며 간사한 자와 난폭한 자들을 막는 일을 한다.]
술가(術家)의 재능은 (재상을 보좌하는) 삼고(三孤)의 임무에 어울린다. [原註-묘당(廟堂·정승이나 삼공의 근무처)에서 계책을 내는 일을 담당하며 삼공을 도와 바른 도리를 논한다.]
삼재를 순전하게 갖춘 경우 삼공(三公)의 임무에 어울린다. [原註-지위는 삼괴(三槐)이며 삼괴를 보고 앉아서 큰 도리를 논한다.] [譯註-삼괴란 옛날에는 조정(朝廷) 뜰에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심고 삼공(三公)이 이것을 향하여 앉았다는 데서 온 말로 삼공(三公)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삼재를 미미하게 갖춘 경우 총재(冡宰)의 임무에 어울린다. [原註-천관(天官·이조판서)의 경(卿)으로 백관을 총괄한다.]
장부(臧否)의 재능은 사씨(師氏) 보좌에 어울린다. [原註-옳고 그름을 분별함으로써 사씨(師氏)를 보좌한다.]
지의(智意)의 재능은 총재 보좌에 어울린다. [原註-사(師)의 일을 마땅함으로 제어해 천관을 보좌한다.]
기량(伎倆)의 재능은 사공(司空·토목 담당)의 임무에 어울린다. [原註-생각을 섞어 정교한 해법을 찾아내는 사람은 그래서 동관(冬官·조선 시대 공조판서)을 담당한다.]
유학(儒學)의 재능은 안민(安民·백성 교화)의 임무에 어울린다. [原註-다움과 떳떳함을 담당하며 그 사람됨을 보호하고 지켜낸다.]
문장(文章)의 재능은 국사(國史·역사 서술)의 임무에 어울린다. [原註-법도가 되는 모범을 서술함으로써 후대에 드리운다.]
변급(辯給)의 재능은 행인(行人·외교관)의 임무에 어울린다. [原註-저쪽의 제안에 이쪽이 제대로 반응하며 길에서 다른 나라의 외교관을 잘 보낼 수 있다.]
효웅(驍雄)의 재능은 장수(將帥)의 임무에 어울린다. [原註-군사를 통할하며 고분고분하지 않은 자들을 토벌하고 평정한다.]〉
재상 감이란?
신숙주 |
그 첫째가 청절가이다. 주자(胄子)는 원래는 임금의 맏아들만 가리키다가 점점 확대되어 천자부터 경대부까지 이르는 뜻으로 바뀌었다. 주자는 그래서 나라 사람의 아들이라 해서 국자(國子)와 통하며 성균관 전신이 바로 국자감이나 주자감이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대체로 조선 시대에 이런 인물들은 정사에 참여하기보다는 주로 성균관에서 경력을 쌓았다. 성균관 좨주(祭主)가 대표적이다. 조선 초 권근(權近·1352~1409년)이 이에 속한다.
청절가가 교육을 담당하는 사도(司徒)에 어울린다면 법가는 범죄를 막는 일을 하는 사구(司寇)에 어울린다. 형조판서의 뿌리라 하겠다.
술가는 계책에 능한 사람이다. 삼고(三孤)란 조선 시대 삼정승 바로 아래 찬성(贊成)과 참찬(參贊)에 해당한다.(찬성은 정승이 일을 이루는 것을 돕는다는 뜻이고 참찬은 그 돕는 일에 참여한다는 뜻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이 세 가지를 바탕으로 재상 감을 논한다. 이상 세 가지 재능을 고루 갖춘 이를 국체(國體)라고 부르는데 바로 재상 감이다.
재상은 청절한 절의와 법치에 대한 확고한 의식 그리고 큰 계책을 정할 줄 아는 술가의 면모를 고루 갖춰야 한다. 대체적으로 청절한 절의만을 강조하는 우리의 전통적인 신하관 혹은 재상관과는 다르다. 실제로 재상은 정(正)보다는 중(中), 상도(常道)보다는 권도(權道)에 능해야 한다는 점에서 유소가 제시하는 재상관이 훨씬 현실적이다. 유소는 이런 최고 수준에 이른 재상으로 이윤(伊尹)과 태공(太公)을 꼽는다.
조선 초 조준(趙浚·1346~1405년)이나 황희(黃喜·1363~1452년), 신숙주(申叔舟·1417~1475년) 그리고 조선 중기 이준경(李浚慶·1499~1572년) 등이 바로 국체(國體)에 이른 재상이라 하겠다. 하륜(河崙·1347~1416년)의 경우 큰 계책을 정하고 제도 정비를 이루어냈다는 점에서 술가와 법가의 면모는 출중했지만, 청절 측면에서 높은 점수를 받기는 어렵다 하겠다.
國體와 기능가
청절가·법가·술가 세 가지 재능을 고루 갖추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재상 감에 비해 떨어지는 인물을 유소는 기능가(器能家)라고 이름지었다. 조준 아래에서 정승을 지낸 김사형(金士衡·1333~1407년)이나 황희의 파트너 맹사성(孟思誠·1360~1438년)이 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학재(學才)가 단연 출중했던 정인지(鄭麟趾·1396~1478년) 또한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대체로 큰 계책을 결단하는 술가 덕목이 떨어지는 유형이다.
대체로 조선 재상들은 국체보다는 기능가들이 많았다고 할 수 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데 집중하는 장부가는 청절가의 아류(亞流)이고 큰 계책이나 원대한 안목은 없으나 맡은 관직은 빈틈없이 수행할 수 있는 기량가는 법가의 아류로 주로 유능한 경조윤(京兆尹), 오늘날로 치면 서울시장직을 잘 수행할 수 있다. 지의가는 새 제도를 만들어내지는 못하지만 임기응변에 능하고 잔재주가 많아 술가의 아류라 할 수 있다.
나머지 문장, 유학, 변급, 효웅은 재상의 덕목과는 무관하기 때문에 더 이상 논하지 않는다. 문장가는 사마천, 반고처럼 역사를 쓸 수 있고 유학가는 옛일을 전수만 할 뿐 일을 맡기기에는 적합지 않다. 말재주에 능한 변급가는 외교를 맡길 만하고 웅걸은 한신(韓信·?~기원전 196년)이 대표적이다. 조선 역사에서는 이순신(李舜臣·1545~1598년)이 이에 속한다.
재상이 할 일이 무엇인가를 보여준 진평
진평 |
〈(한나라) 문제(文帝)가 즉위하여 태위(太尉) 주발이 몸소 병사를 이끌고 여씨들을 죽인 공이 많다고 여겼다. 이에 진평은 주발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병을 핑계로 사직하려고 했다. 효문제가 막 즉위하여 진평이 병을 핑계 대는 것이 괴이하여 물었다. 진평은 “고제(高帝·한 고조 유방) 때 주발의 공은 신 진평만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씨들을 죽인 일에서 신의 공은 주발만 못합니다. 바라건대 우승상을 주발에게 양보하고자 합니다”라고 했다. 이에 효문제는 강후(絳侯) 주발을 우승상에 임명하니 서열 제1위였다. 진평을 좌승상으로 옮기니 서열이 두 번째였다. 진평에게 금 1000 근을 내리고 식읍 3000 호를 더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효문제는 갈수록 국가의 일에 익숙해졌다. 한번은 조회에서 우승상 주발에게 “천하에서 1년 동안 처리하는 사건이 얼마나 되오?”라고 물었다. 주발은 사죄하며 “모릅니다”라고 했다. 이어 “그럼 천하에서 1년 동안 들어오고 나가는 돈과 곡식이 얼마나 되오?”라고 묻자 주발은 또 모른다고 사죄했는데,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했다.
이에 상이 다시 좌승상 진평에게 물었다. 진평은 “담당자가 있습니다”라고 했다. 주상이 “담당자가 누구인가?”라고 묻자 진평은 “폐하께서 사건 처리를 물으시려면 정위(廷尉)를 찾으시면 되고, 돈이나 곡식에 대해 알고 싶으시면 치속내사(治粟內史)를 찾으면 됩니다”라고 했다.
상이 “정말 각자 담당하는 자가 있다면 그대가 맡은 일은 무엇이오?”라고 묻자 진평은 사죄하며 이렇게 말했다.
“신하들을 주관합니다. 폐하께서 신이 모자란 사람이란 것을 모르시고 재상이란 자리에 앉히셨습니다. 재상이란 위로는 천자를 보좌하여 음양을 다스리고 사시를 순조롭게 하며, 아래로는 만물을 알맞게 기르고, 밖으로는 사방 오랑캐와 제후들을 어루만지며, 안으로는 백성들이 서로 친목하게 하고, 경대부로 하여금 각자 그 맡은 자리에서 충실하게 일하게 하는 직입니다.”
효문제는 좋다고 칭찬했다. 우승상은 크게 부끄러워 조정에서 나오자 “그대는 어째서 평소 나에게 그런 대답을 가르쳐주지 않았단 말이오?”라며 진평을 나무랐다. 진평이 웃으며 “그대는 그 자리에 있으면서 그 임무를 몰랐단 말이오? 그럼 폐하께서 장안의 도둑들 숫자를 물으면 그대는 억지로 대답하려고 했소?”라고 했다. 이에 강후는 자신이 능력 면에서 진평에 훨씬 못 미친다는 것을 알았다. 얼마 뒤 강후는 병을 핑계로 승상직 사퇴를 청했고, 진평이 홀로 승상을 맡게 되었다.〉
사마천은 진평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진 승상 평은 젊었을 때부터 황제(黃帝)와 노자(老子)의 법술을 좋아했다. 또 그가 도마 위의 고기를 나눌 때부터 그 뜻이 이미 원대했다. 그 뒤 초나라와 위나라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다 마침내 고제에게로 갔다. 늘 기이한 책략을 내서 얽히고설킨 어려움을 풀고 국가의 근심을 털어냈다. 여후 때 일들이 많았으나 진평은 결국 자기 힘으로 어려움에서 벗어나 종묘를 안정시키고 영예로운 명성을 끝까지 지킴으로써 뛰어난 재상[賢相]이란 칭송을 들었다. 이 어찌 처음과 끝이 다 좋았다고 하지 않겠는가? 그의 지혜와 모략이 아니고서야 누가 능히 이런 어려움을 감당해낼 수 있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