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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자 시집 『닿을 수 없는 슬픔에게』:슬픔의 제단에 바치는 레퀴엠Requiem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2. 12. 12. 14:01

슬픔의 제단에 바치는 레퀴엠Requiem

나호열 시인· 문화평론가

 

1.

 

 

조광자 시인의 첫 시집 『닿을 수 없는 슬픔에게』를 읽어 내려가다 뜬금없이 ‘흥수아이’가 생각났다. ‘흥수아이’ 는 누구인가? ‘흥수아이’는 1982년 충청북도 청주시 문의면 두루봉 동굴에서 발견된 인골로서 4, 5세 정도의 어린아이로 추정되며 적어도 4만 년 전 구석기 시대에 살았던 우리 조상의 원류로 주목을 받았다. 그 이후 이 인골이 구석기가 아닌 근대의 유골이라는 반론이 제기되는 등 여러 논란이 있었지만 어찌 되었던 두루봉 동굴의 소유주 김흥수 씨의 이름을 따서 ‘흥수 아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발견 당시 뼈만 남았으나 거의 완벽한 형태로 제단 위에 가지런히 누운 ‘흥수 아이’의 주변에는 흩뿌려진 꽃의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그 꽃은 지금도 가을을 대표하는 오상고절傲霜孤節의 꽃, 국화였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러하니 때는 가을이었을 것이다. 들판에 흐드지게 핀 국화를 꺾어 ‘흥수아이’의 죽음을 애도하던 그 마음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문득 예고 없이 사라지는 존재와의 단절감, 그리고 자신들에게도 그 사라짐(죽음)이 다가올 것이라는 두려움이 기억으로 남아 있게 될 때, 슬픔은 피어나는 것인가?

 

 

동물에서 현생 인류 –호모 사피엔스 Homo sapiens- 로 느릿느릿 진화하던 시기의 원시인들에게 그 국화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어린 자식을 잃은 부모와 혈족들이 모여 들판에 흐드러지게 핀 국화를 따서 ‘흥수아이’에게 주었던 그 장면이 선연히 떠오를 때, 그들의 들리지 않는 오열嗚咽이 명치를 아프게 하지는 않는가? 언제부터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었을까? 죽음으로 말미암아 마주하게 되는 이별과 유한한 생生에 대한 자각이 그 때 처음 일어나게 되었을까? 아마도 최초의 근원적인 ‘슬픔’은 죽음을 목도한 오래 전 사람들에게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이렇듯 시집 『닿을 수 없는 슬픔에게』는 그 옛날 사람들이 한 어린 아이의 죽음을 애도하며 바친 국화의 향기를 오롯이 품고 있는 시집이다. 이 슬픔으로부터 빚어지는 천 갈래만 갈래의 물줄기는 허무라는 거대한 강을 이루며 삶과 죽음이 한 몸으로 가득 차서 그만큼 만물을 포용하는 바다에 가 닳을 것인데, 그렇다면 이 시집은 그 여정旅程의 장면 장면을 삶을 정의하는 독백으로 아로새기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마땅하지 않을까?.

 

 

느릿느릿 되새김질 하는 강

가는지 오는지 깊은 속을 보이지 않는다

 

밀림 한 가운데서

 

사자에게 먹히고 있는 새끼를 바라보는

어미의 눈이 저랬다.

 

온통, 검푸른 동공뿐이었다.

 

-「산다는 것」 전문

 

 

따로 따로 분석할 수 없는, 또 분절分節할 수도 없는 강의 속성과 다름없는 생존의 방식은 인드라 망 이라는 거대한 존재론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벅찬 일이다. 사자의 먹이로 잡아먹히는 새끼를 어찌할 도리도 없이 망연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동굴의 왕국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처연한 ‘온통, 검푸른 동공’으로 바라보는 현실이 아닌가.

 

2.

 

 

이와 같이 동굴의 왕국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약육강식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조광자 시인은 ‘온통, 검푸른 동공’으로 바라본다. ‘검다’와 ‘푸르다’의 합성어인 ‘검푸르다’의 주색主色은 ‘푸르다’이다. ‘검다’가 상징하는 어둠과 ‘푸르다’가 일으키는 불안과 공포, 비참함이 뒤섞인 시각으로 죽어가는 새끼를 처연히 바라보는 감정을 뭉뚱그려 유추해본다면 ‘검푸른 세상’은 절망과 분노를 넘어서는 체념에서 발원한 슬픔의 공터라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시집『닿을 수 없는 슬픔에게』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슬픔’이고 그 슬픔은 사멸死滅를 향해가는 존재를 바라봄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검푸른 눈으로, 사자의 먹이가 되는 새끼를 바라보는 어미의 마음으로 슬픔을 기꺼이 자신의 몸으로 받아들인다. “눈으로 본 적도 없는 것이 / 날마다 가슴에 싹을 틔우는”(「슬픔의 뿌리」 마지막 연) 형체가 없는 슬픔을 가슴에 담는다 해도 그 슬픔은 포획될 수 없고 그 슬픔은 엄밀히 말해서 150㎝의 거리에 놓인 철로처럼 “둘이 하나 같이 가는 길이어도 / 영원히 만날 수 없는”(「닿을 수 없는 슬픔에게」4연) 개별적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슬픔은 나눔으로서 해소될 수 있다는 인식은 거짓이 된다. 한 그릇의 밥을 나눠 먹는다고 해서 골고루 포만감을 가질 수 없는 것과 같이 슬픔을 공유한다는 판단은 사회적 존재임을 표방하는 인간계에 있어서 한갓 헛된 꿈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결국 슬픔의 밖에서 슬픔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생각 밖에서 생각을 보고

가족 밖에서 가족을 보고

도시 밖에서 도시를 보고

지구 밖에서 지구를 본다

- 「밖에서 보다」 1연

 

 

‘검푸른 동공’과 더불어 ‘밖’이라는 관념은 조광자 시인이 세계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중요한 잣대이다. 우리가 사유思惟한다고 할 때에는 반드시 대상이 필요하다. 생각하는 주체인 ‘나’와 ‘나’와 구별되는 ‘너’라는 객체가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유가 발생할 때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밖’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집요하게 관계에 의존하려고 한다. 가족이라는 공동체, 더 나아가서 국가라는 울타리 안에서 서로의 안위 安危를 담보하고자 하는 것이다. 냉철하게 보아서 서로가 서로의 밖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신기루와 다름없는 사랑이라는 거룩함의 신도가 되어 서로를 소모하는 것이다.

 

 

벼리고 깎아서

서로에게 필요한 연장이 만들어지듯

무딘 칼날은 숫돌을 깎아내리고서야

날을 세우고 시퍼런 위엄을 갖춘다

 

 

거품을 물고 흘러내리는

예리한 눈빛

상처를 파헤치듯 돌아눕는

싸늘한 금속의 차가움이여

서로에게 익숙해질수록

제 몸을 깎아 완벽한 짝으로 태어나는

칼과 숫돌 사이처럼

무뎌지고 뭉텅한 마음을 벼리고 산다

 

 

- 「칼과 숫돌 사이 」 전문

 

 

칼이 예리해지기 위해서는 숫돌이 필요하다. 예리함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숫돌은 자신의 몸을 끊임없이 허물어야 한다. 우리가 상찬賞讚을 마다하지 않는 혈족간의 사랑이나 애국심은 ‘무뎌지고 뭉텅한 마음을 벼리고’ 사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 벼림은 ‘눈물도 없이, 아픔도 없이 / 남의 가죽을 벗겨 입는 나 / 짐승의 털을 걸치고 얼음꽃을 바라본다 // 단발마의 고통은 그들의 몫 / 나무의 통증을 눈꽃으로 읽었다’( 「얼음꽃」 4,5연)는 토로와 상통한다. 추위를 이기기 위해 짐승의 가죽을 벗겨 옷으로 입고서 겨울나무 가지에 얹히는 상고대를 꽃이라 부르며 완상하는 ‘밖’의 존재 – 타자 他者-가 자신임을 자각하는 헛된 구도의 행위라고도 볼 수 있다.

 

시집『닿을 수 없는 슬픔에게』는 이와 같은 밖의 비정한 세계와 충돌하며 길항하는 시인의 자아가 닿을 수 없는 슬픔을 정당화하는 여정을 보여주고 있다. 떠돌이 개의 죽음에 ‘아무도 조문하지 않는 가벼운 죽음 앞에 / 냄새를 맡고 달려온 / 파리 두 어 마리가 조문을 하고 있다’(「전봇대 아래」마지막 연)는 비정한 풍경은 여러 시편에서도 드러나고 있는 바, 그 중 몇 편의 시에 드러난 문장을 읽어보기로 한다.

 

 

캄캄한 죽음의 아가리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저, 끔찍한 체념

 

슬픔과 체념으로 뭉친 핏덩어리를 걸어두고

부위별 스프레이를 뿌려가며

육질의 등급을 매기는 사내

 

-「이력서를 달다」3. 4연

 

놀라워라

담장 밑 말라버린 꽃대 옆에

당당히 앉아 있는 저 매 한 마리

날카로운 발톱 사이에 바들거리는 참새

부리로 천천히 털을 뽑고 있다

 

어쩔 수 없이 힘의 추 錘에 대롱거리는

비겁하고 소심한 인간이여

잡종의 개새끼여

 

-「당당한 식사」 2연, 끝 연

 

대지로 스며들지 못한 혼곤한 피를

어둠이 짙은 천을 짜서 덮는구나

하늘에서 장대비가 내리는구나

내일이면 뼈 가죽만 남아 몸의 지도를 그리겠구나

 

앞만 보고 달려온 길

내가 평생 달려온 길도 이 길 이었구나

 

- 「몸으로 그린 지도」 5, 6연

 

 

시「이력서를 달다」,「당당한 식사」,「몸으로 그린 지도」에 등장하는 소, 매, 로드 킬을 당한 뭇 짐승은 힘 없고, 무지몽매(?)한 존재들이다. 고기로 팔려나가기 위해 도축장으로 끌려들어가는 소의 무력함, 날카로운 매의 발톱에 걸려 찢겨지는 참새, 인간의 흉기 –자동차-에 받쳐 목숨을 잃는 어떤 동물은 그 누구에게도 조문을 받지 못하는 떠돌이 개 -「전봇대 아래」참조-와 같이 스스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시인은 이러한 끔찍한 풍경을 고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풍경(사건)에 대해 전혀 개입할 의사도 없으며, 개입하여 사태를 호전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지 못하는 허약함을 암유暗喩할 뿐이다.

 

‘캄캄한 죽음의 아가리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 저, 끔찍한 체념’의 주체가 단지 소에 국한될 것인가!. 매가 무서워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나, 차바퀴에 깔려 흔적조차 사라지는 짐승을 가해한 죄를 묻지 않는 법과 대비되는 무심하게 육질의 등급을 매기는 사내로 통칭되는 또 하나의 ‘나’는 ‘비겁하고 소심한 인간이며 / 잡종의 개새끼’일 뿐이며 맹목의 길을 무작정 건너가는 로드킬의 운명을 지닌 맹목의 존재일 수도 있지 않은가.

 

3.

 

 

그렇다면 이렇게 ‘밖’에서 ‘검푸른 동공’으로 세상을 인지하는 시인은 언제까지 타자 他者와 방관자의 위치에서 닿을 수 없는 슬픔을 견디고 있을 것인가? 궁금해진다. 과연 슬픔은 이렇게 ‘밖’과 ‘검푸른 동공’으로만 떠돌고 있는 것인가?.「몸으로 그린 지도」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했다.

 

앞만 보고 달려온 길

내가 평생 달려온 길도 이 길 이었구나

 

어림짐작으로 우리는 조광자 시인이 교육에 의해서, 타고난 성향에 의해서 그리고 주어진 환경의 복합적인 여러 이유로 ‘밖’과 ‘검푸른 동공’을 구유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우리의 현대사의 질곡의 한 장면이 농경사회의 가난과 오래되고 낡은 유교적 공동체의 수난이며, 그래서인지 많은 시인들이 가족사 家族史에 얽힌 의식을 드러내는 것을 목도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규울에 얽매인 삶의 국면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시집『닿을 수 없는 슬픔에게』에는 인상 깊게 차별화되는 가족의 이야기가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술주정하는 아버지 때문에 울화를 지닌 어머니(「어머니의 유산」), 나이 들어 세상을 떠난 부모님( 「뒤편」), 왕소금을 버릇처럼 깨물던 어머니( 짠맛), 여럿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을 회고하는「무량한 슬픔」등이 그나마 어렴풋이나마 시인의 내면을 형성시킨 요인으로 꼽을 수 있겠으나, 그것이 ‘앞만 보고 달려온’ 시인의 이력으로 삼기에는 여전히 미흡하게 보인다.

 

그러나 시 「휘어지다」의 첫 문장에서 ‘평생을 뒤척이며 허리가 뒤틀렸다’는 고백이 고개 숙이고 굵은 성깔도 부리지 못하고 주먹도 내지르지 못하는(「휘어지다」2연 참조)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저 순하게 살아야 한다는 어머니 말씀(「휘어지다」3연 참조)의 영향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다. 이에 간간히 비쳐지는 불교적 사유가 인내의 길로 시인을 이끌고 갔을 것이라는 것을 덧붙여 짐작할 수도 있다. ‘태어남은 매듭을 지어 / 우주의 한 쪽으로 발을 맞춘다는 약속’(「인드라 망」1연)을 체화했다면 ‘돌아서 가는 것이 평생 내가 하는 일’(「낙석주의」끝연)이었다는 숙명적 사유에 침잠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을까?.

 

시 「분수」는 이와 같은 속 끓임을 분수로 비유한 시라고 할 수 있다.

 

욱,

 

하는 심지 한 번 잘못 건드리면

 

위로 치솟는 폭포가 있다

 

붉은 화염을 두르고

 

쏜살같이 허공을 찌르는

 

물줄기 하나 키우고 산다

 

누군가 들려주는 장단에 맞춰

 

움찔움찔 어깨춤도 추는

 

꼭두각시가 내 안에 있다

 

한 편의 드라마에 울고 웃는다

 

- 「분수」전문

 

우리가 쉽게 스트레스라 부르는 울화는 주객主客간의 원활한 소통이 이뤄지지 않을 때, 또는 한쪽의 억압이 과도할 때 발생한다. 인간과 자연, 개인과 개인, 개인과 이익사회와의 충돌은 상생相生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다. 한 편의 드라마에 울고 웃지만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꼭두각시를 숨기고 살아야 하는 곤고한 삶이 이 시에 현실감 있게 녹아 있다. 그렇다면 타의他意에 의해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꼭두각시는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 것일까.

 

문득,

 

족쇄가 보이지 않아 불안해졌다

 

얼른 찾아서 몸에 걸었다

 

사사건건 주인 행세를 하는 족쇄

 

다시 불편해졌다

 

제 꼬리를 물고 돌고 도는,

 

너는 누구냐

 

-「 마음」전문

 

우리 사전에 마음은 ‘감정이나 생각, 기억 따위가 깃들이거나 생겨나는 곳’으로 정의 되어 있다. 의학적 식견으로 뇌의 복합적, 화학적 작용으로 이해하기엔 너무 삭막하기는 하지만 마음이 깃들거나 생겨나는 곳을 우리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감각을 통해서 판단하는 행위의 주체가 과연 무엇인지 우리가 쉽게 말하는 이성理性의 거처도 사실 오리무중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이 글을 읽는 분들의 편의를 위해서 필자의 짧은 식견을 제시해 보겠다. 마음에 관해서 불교에서는 여러 경전에서 치밀하게 논리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요약하면 본래부터 마음은 생긴 일도 없어 무구無垢인데 외부의 번뇌에 의해 그 때 분별심이 생기는 것이라고 한다. 또 성리학의 일단에서는 마음이 정情에 의해 생겨나고, 의意에 의해 이리로도 저리로도 갈 수 있는 것이라 한다.

 

시「마음」은 이와 같은 여러 정황을 살펴볼 때 심리적 자아의 의지와 무관하게 작동하는 불안으로 이해할 수 있다. 족쇄란 무엇인가? 사람이나 물건을 꼼짝 못하게 묶어두는 도구이다. 쉽게 이야기 해보자.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CCTV가 설치되어 있다. 방범防犯을 이유로, 차량의 속도위반을 감시하기 위해서 우리 일상의 곳곳에 숨지 않고 당당하게 서 있다. 때로는 그 CCTV가 있어 밤길에 안심을 하고, 또 때로는 CCTV 때문에 사생활이 침해당하고 있다는 불쾌감에 시달린다. 이와 달리 이 시는 우리의 생활규범인 도덕과 윤리, 법을 아우르는 양심良心의 기준을 탐문하는 의미로도 그 의미를 더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이데올로기가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다. 규율은 불편하지만 규율이 사라진 방만도 견디기 힘들다. 정처가 없는 삶, 타자가 만들어 놓은 무지개를 따라가는 꼭두각시의 삶을 어떻게 할 것인가!

 

4.

 

 

도력道力이 갖춰지지 않으면 꼭두각시 같은, 도저히 붙잡을 수없는 마음을 잡는 일은 어림없는 일이다. “골목에 부는 거친 바람에 아무렇게나 웃자란 잡초처럼 / 나는 안과 밖을 기웃거리며 산다”(「노숙하는 꽃」끝 연)는 시인의 푸념이야말로 정직한 발언이다. 허황된 지식으로, 가벼운 필치로 달관을 말하기는 쉽지만 빙벽처럼 가로막고 서 있는 슬픔의 거처인 죽음과, 공유할 수 없어 더 슬퍼지는 안개와 같은 슬픔이 마음에 담겨졌다 사라지는 시간의 기억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때 삶에 대한 허무도 슬쩍 끼어드는 것은 아닌가.

 

인생은 허무하다. 허무는 인간 영혼의 피 냄새 같은 것이어서 영혼이 있는 한 허무는 아무리 씻어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다. 인간이 영혼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듯이 인간은 인생의 허무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 나는 인간의 선의 없이도, 희망 없이도, 의미 없이도, 시간을 조용히 흘려보낼 수 있는 상태를 꿈꾼다

 

-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까』, 김영민

 

이 책의 저자인 김영민 교수는 인생이 허무함을 용인한다. 그러면서 인생이 허무하기 때문에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사실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기 위해서는 죽기 전까지의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 인생이 허무하기 때문에 더 열심히 살아야 할지도 모르고 허무한 인생이기 때문에 막 살아도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놓쳐서는 안되는 위험은 성급하게 인생의 허무를 단정 짓는 것이다. 위의 글은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까』의 첫 머리에 놓인 글로서 예술의 의의를 곱씹게 하는 바가 크다. 무릇 예술가는 작품을 통해 영속성과 전인미답의 독창성에 생애를 건다. 그 영속성과 독창성을 염원하게 만드는 인생의 허무와 피 튀기는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 근기가 필요한 것이다.

 

조광자 시인의 첫 시집『닿을 수 없는 슬픔에게』는 등단 이후 10년이 지나 이루어진 삶의 궤적인 동시에 자신의 생애를 통해 각인된 슬픔에 대한 주석이다. 그가 마주친 세상은 비루하고 냉혹하며, 그 비루와 냉혹함을 견디기 위해 마주하는 타자는 내가 닿을 수 없는 슬픔의 주체임을 거듭 천명한다. 그러나 시인은 소멸로부터 야기된 슬픔과 그 슬픔이 풀어내는 허무에 당당하게 맞서면서 생활인으로서의 건강성을 잃지 않는 근기를 지니고 있음에 주목한다.

 

그 예로 필자는 시「교감을 나누다」와 「일출」을 통해 끈질긴 생명에의 경외심과 교감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돌고래와 교감을 나누기 위해 북극의 찬 바다 속으로 들어간 러시아의 여성 과학자 나탈리아 아브세옌코는 모든 생명이 바다에서 탄생했음을 굳게 믿음으로서 바다 생물인 돌고래와 뭍의 인간이 서로의 마음을 열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교감을 나누다」는 여기에 덧붙여 바람에 가지를 부딪는 감나무와 대추나무를 보며 마치 서로 안부를 전하는 모습으로 받아들임으로서 경쟁에 시달리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 실현 가능의 여부에 관계없이 교감을 꿈꾸는 일이라는 사실을 일깨우고 있다. 이 꿈은 시「일출」에서 쇠잔한 생산력과 무미건조한 삶에서도 매일 심해를 뚫고 솟아오르는 해가 새로 태어나는 아이로 빛남을, 꿈꾸는 가슴으로 뜨겁게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무디어가는 몸을 데우기에는 이미

시들한 감각을 세워 

푸른 관음의 가랑이 사이로 아득히 솟아나는 불꽃

부르르 탯줄이 떨어진다

 

핏빛, 바다가 들어 올린 아이

첫울음이 낭자하다

 

- 「일출」3, 4연

 

5.

 

등단 이후 10여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조광자 시인은 시류에 휩싸이지 않고 모든 존재가 가진 슬픔의 장면을 자신의 삶 속에 아로새기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시집『닿을 수 없는 슬픔에게』를 일관되게 관통하는 슬픔의 정서는 공유할 수 없고, 그 모든 슬픔이 타자- 사유의 대상 – 으로부터 찾아오는 것이며, 그 슬픔이 마음이라는 무정형의 실체에 의한 것이므로 잡을 수 없는 관망의 대상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인의 이러한 인식이 허무에 빠지지 않고 실존의 필요성을 강화하는 힘이 된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된다. 한 마디로 시집『닿을 수 없는 슬픔에게』는 ‘슬퍼하되, 아파하지 않는 애이불상哀而不傷’의 요체를 터득한 시집으로 우뚝 서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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