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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수 시집 『그대와 사는 이유』: 탈 속에 숨은 삶의 애환을 해학諧謔으로 풀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2. 10. 27. 12:57

 

탈 속에 숨은 삶의 애환을 해학諧謔으로 풀다

나호열 시인· 문학평론가

 

 

1.

 

 

자의든, 타의든 탈을 쓰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난 표정이나 행동을 통해 한 사람의 진면목을 판단하는 일은 쉽지 않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옛말이 그저 오가는 푸념이 아닌 까닭은 사회생활에서 관계의 중요성이 증대될수록 위장僞裝 - 화장이나 옷매무새, 어투 같은 – 의 필요성도 함께 절실해지기 때문이다. 한 때 ’고객이 왕이다.’의 의미가 이윤을 창출하고 기업이나 기관의 이미지를 높이는 기준이 되어 소비자를 응대하는 사람들에게 감정노동 感情勞動을 당연시하는 풍조가 상식이 되던 때가 있었다.

 

사전적 의미에서 감정노동은 실제적 감정을 속이고 전시적 감정으로 고객을 상대해야 하는 노동으로서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고 고객에게 무조건 친절해야만 하는 행위였던 것이다. 더불어 상명하복이 하나의 규율로서 작동할 때, 명확히 갑甲과 을乙이 구분되어질 때, 하위의 을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복종의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상대의 호감을 사기 위해 감언이설로 자신의 본심을 숨길 때 마음을 덮는 탈을 쓰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교언영색 巧言令色까지ㅡ 아니더라도 주어진 환경에 따라 교양의 이름으로 적절한 언행을 취하는 것이 가족을 넘어서 일상인 까닭에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기는 일이 더욱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김승수 시인은 이런 위장과 변색變色의 삶이 인간다움을 상실하는 가장 큰 원인이 되는 점에 주목한다.

 

2.

 

『그대와 사는 이유』는 김승수 시인의 말 그대로 “자연, 사물, 정서의 보이지 않는 뒤쪽을 쉬운 말과 비유로 잘 버무린” 시집이다. 앞 서 ‘탈’(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인간이 왜곡된 시선으로 사물을 인식하는데에서 오는 위악僞惡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이 어떻게 피폐하게 되는가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시집의 서두「시인의 말」에서 표명한 ‘보이지 않는 뒤쪽’은 다른 말로 의도적 은폐와 오류로서 허위의 실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역설적이게도 결코 쉬운 말과 비유로 온전히 그 현상의 진위를 판명할 수는 없다. 김승수 시인의 시편은 단번에 그 의미가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쉬운 말’인 듯 싶은데 그 ‘쉬운 말’은 통념을 벗어난 다른 현상을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집 『그대와 사는 이유』는 익살, 더 정밀하게 말한다면 해학의 잣대를 지니지 않으면 뜻 모를 중얼거림이나 푸념으로 곡해되기 쉽다. 시집의 중심 개념인 ‘탈(가면) 벗기’, ‘뒤쪽’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을 삶을 긍정하기 위한 변증법적 부정으로 받아들이고 ‘탈을 벗은’, 그리고 정면을 응시하고자 하는 의지로 이해할 때 이 시집은 즐거운 슬픔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시집의 표제시로 짐작되는「그와 사는 이유」의 몇 부분을 읽어보자. “어릴 적부터 눈길 한 번 주지 않았고 / 그 옆집 남자가 다가올 때마다 / 다른 남자를 떠올린다...중략 여전히 그는 흰 꽃을 / 나는 붉은 꽃을 / 피어낸다” (「그와 사는 이유」1연, 3연).

 

이 시에서 ‘그’를 반드시 인간으로 단정지을 수는 없다. 추측하건대, 이 시를 한 나무에 피는 꽃인데 다른 색의 꽃이 피어나는 현상을 진술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 우리는 ‘남자’라는 어휘에 이끌려 동상이몽의 어떤 가족을 떠올리게 된다. “내 봄날의 슬픔이 식탁에 차려져 있으면 / 그는 접시째 먹어 / 비로소 슬픔임을 잊어버린 슬픔이 된다”(「그와 사는 이유」5연).

 

‘가족은 사랑으로 서로를 감싸고 사랑으로 소통해야 한다.’는 정언판단은 실제의 우리의 삶에서는 구현되기 힘들다. ‘비로소 슬픔임을 잊어버린 슬픔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 마디로 소통되지 않은 슬픔에 대한 무관심이 관계의 슬픔이 된다는 역설에 가닿지 않겠는가!

 

“봄꽃 향 한 사발 떠 아내 가슴 속에 감추고 / 또 한 사발은 다른 여자에게 주고 싶”(「춘몽」 3연)다거나, “흐물흐물해진 늙은 엄마를 버렸어요”(「기장멸치」)라거나, “지금처럼 아내와 오래 살고 싶으면 / 개구리밥 밑에 몰래 숨어서 / 바람이 불 때만 살~짝 숨을 쉰다”(「아내와의 싸움」끝 연)는 화자化者의 고백은 우리가 도덕과 윤리의 마땅한 행위에 억눌린 또 다른 자아의 존재를 암유暗喩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실상을 어떠한가?

 

정말, 이어도에는

바람뿐이더군요 바람뿐

하늘도 없고 새도 없는 바람뿐

 

- 「이어도」 5연

 

김승수 시인은 망망대해의 암초인 우리나라 국토의 최남단 이어도를 이 세상의 풍경으로 받아들인다. 물론 이 말에 반론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천국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천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니까. 어째든 자식을 잃은 슬픔을 노래한 「숙희 엄마」나, 치매로 인격을 잃어버린 「지금 나는 또 다시 다섯 살」, 과 같은 시편에서 세상을 응대하는 시인의 불편한 시각을 드러내고 있음은 분명하다. 이와 관련된 시 한 편을 읽어본다.

 

 

올챙이는

왕잠자리 애벌레와 한집에 살게 되면서

그놈의 얼굴만 봐도 이빨이 덜덜 떨리고

밥맛이 떨어진다

 

전날 밤 피바람 휘몰아치는 국청에서

많은 피붙이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올챙이는

갓 나온 팔다리를 옆구리에 붙이고 숨도 꾸욱 참는다

 

내 울음소리에 숲이 들썩거려 봄을 깨우는

개구리가 될 수 있을까

 

봉선사 연(蓮)잎 위에서 낮잠를 즐기던 개구리는

낯익은 얼굴에 잠이 달아난다

전생의 과오를 뉘우치는지

이 꽃 저 꽃에서 오체투지하는 왕잠자리를 보고

잔뜩 뒷다리에 힘을 준다

 

범종 소리에 마음의 때를 벗긴 바람이 불어와

개구리는 연잎에서

부평초 밑으로 첨벙 뛰어든다

 

악연은 새로운 인연을 막는 것이다

 

- 「올챙이와 악연」 전문

 

이 시는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지식의 의인화하고 있다. 우리의 삶이 서로 먹고 먹히는 그러나 영원한 강자가 존재하지 않는 순환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시이기도 하다. 올챙이의 천적으로 잠자리 애벌레를 들 수 있는데 , 용케도 올챙이가 개구리가 되면 잠자리는 개구리의 먹이가 된다. 이 시의 배경은 「봉선사」의 연못이다. 불가佛家에서 수행을 함에 있어 육바라밀六波羅蜜을 강조하거니와, 올챙이를 잡아먹고 잠자리가 되었으나 전생(애벌레)의 과오를 깨닫고 오체투지하는 잠자리와 그 전생의 기억을 기억하는 개구리가 범종소리에 깨달은 바는 ‘악연은 새로운 인연을 막는 것이다’라는 것이다. 이 마지막 구절이 함축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가진 자 와 없는 자, 강자와 약자가 상생하기 위해서는 용서와 화해가 선행되어야 하며 그래야만 무한히 반복되는 악연을 끊을 수 있다는 것이다.

 

3.

 

『그대와 사는 이유』의 많은 시편들은 주변의 사물- 자연의 동식물 들-을 통해 우리 삶의 질곡을 사물에 빗대어 허울 좋은 탈을 벗기고 그림자 어두운 뒤쪽을 희롱한다. 그 중에서 인상에 오래 남은 몇 편의 시의 문장을 옮겨본다.

 

 

나는 평생 한 뼘의 염전도 가져 보지 못한 노예다

드러난 살갗은 달빛 아래선 어둠이다

짜다 못해 쓰고 푸른 소금에 내 몸은 푹 절여지고

시커먼 가마솥에서 몸뚱어리가 골고루 고아지도록

이리저리 소금밭을 헤집고 다녔다

 

...중략 ...

 

소금밥을 몇 그릇 더 먹으면 나도 소금 가루가 되겠지

딸아 이젠 그만 울어라

아까운 소금 녹는다

 

- 「소금 가루」 부분

 

 

나는 폐사지에 살고 있어요

한때는 사람들이 들끓어 한편에 비켜나 피었지만

지금은 사람 발길이 끊어져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 「질경이 여자」 부분

 

 

 

나 이제 돌아갈 곳이 없다

 

다리가 부러진 내 몸뚱어리는

엄마 품 같던 황무지에 묻혀도

아무런 꽃도 찾아오지 않겠죠

 

- 「경주마의 눈물」부분

 

성큼성큼 걷는 내 발에

작은 나무들이 솎아지지 않으면

큰 숲을 이룰 수가 없다

 

...중략 ...

 

나의 똥은 아무런 냄새가 없어요

그럼 당신들의 똥은!

 

- 「코끼리 똥」 부분

 

 

내가 늘 배고픈 것은 순전히 아버지 노름빚 때문이다

엄마의 깊은 주름살은 누가 펴 줄 텐가

 

...중략...

 

임금도 상거지도 발아래 두고

패랭이가 줄을 탄다

- 「줄 타는 패랭이」 부분

 

막내딸 손바닥만한 밭뙈기 깔고 앉아

하루 걸러 굶는 판에

늙은 말이라도 있으면

어딘들 못 가랴

 

...중략 ...

 

가시내야! 가시내야!

깊은 산 저~ 깊은 산에

화전민 되어

숯이나 굽자

 

- 「화전민」 부분

 

대중이라 불리는 검수黔首들은 자기 염전을 갖지 못하고 평생 소금을 거두는 염부로 한 세상을 산다. 어느 사람은 소외의 땅에서 질경이처럼 밟히며 살고, 채찍질에 트랙을 돌고 돌다가 쓸모가 다하면 버려지는 경주마가 되기도 하고, 높은 줄에 목숨을 딛고 패랭이로 불리우기도 한다. 발붙일 땅이 없어 화전민이 되어 산으로 가고, 냄새나는 잡식의 똥을 싸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염부鹽夫, 패랭이, 경주마, 질경이로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호명하면서도 시인은 탈을 벗어난 비명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살갑게 받아들인다. 딸에게 울음을 멈추라고 하면서 ‘아까운 소금 녹는다’고 하거나, 질경이처럼 짓밟히며 살았어도 “이젠 / 경운기 같은 거친 남자가 와도 겁나지 않다”(「질경이 여자」끝연) 고 당당히 말하고, 상아가 부러진 채 살면서도 냄새나는 고약한 똥은 누지 않는다는 코끼리의 울음이 가슴을 세게 치는 것이 아닌가.

 

엄밀히 말해서 김승수 시인은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혁명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현실을 음유하는 서정시인도 아니다. 다만 그는 개인의 의식 속에 눌려 있는 참다운 욕구가 꽃으로 피어나지 못하는 위선僞善을 각성함으로서 생생한 삶의 민 얼굴을 마주하여야 한다고 말할 뿐이다.「올챙이와 악연」의 마지막 연을 다시 상기하면 그가 나아가고자 하는 길과 이윽고 닿아야 할 세상이 어느 곳인지 짐작할 수 있다.

 

4.

 

 

‘악연은 새로운 인연을 막는 것이다’라는 언명을 좀 더 부연해 보면 이렇다. 우리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서 상생相生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상생을 위해 필요조건이 상호 간의 소통이라는 것도 안다. 그런데 그 상생과 소통이 이뤄지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우리는 탈을 쓴 채로 속마음을 나타내지 않고 무표정하게 있는 얼굴을 내보임으로서 장차 불길하게 다가올 죄수의 딜레마를 피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우리는 등에 많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단지 얼굴에만 온통 호사를 아까워하지 않는다. 포커페이스pokerface가 당연시 되는 세상에서 우리는 진위의 판단을 잊어버리고 마음을 잃어버렸다고 시집『그대와 사는 이유』는 이야기 하고 있다. 시인 김승수가 선택한 익살과 해학은 잃어버린 마음과 잊어버린 진실의 척도를 찾기 위한 방도인 것이다.

 

이 글의 마지막에 고른 시는「밭담은 아름다운 조각보」와 「칡꽃」그리고 「틈」이다. 이 시들은 『그대와 사는 이유』이후의 김승수 시인의 시업詩業의 방향을 예감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우선 세 편의 시를 한 편씩 읽어보기로 한다.

 

산방산을 오르다가

밭담들을 내려다보니

아름다운 조각보이다

 

자식 남편 시부모님의 옷을 만들고 남은 조각들

호미에 실을 걸고

구멍 숭숭 뚫린 돌을 얼기설기 정성스레 꿰매

형형색색의 조각천들이 큰 조각보가 되었네

 

산에도 바다에도 돌

풀 베는 밭에도 돌

사방 천지 돌 없는 데가 없어

삶의 일부가 되어 버린 돌을 쌓아

굽이굽이 용처럼 휘어져 제주를 잇는 밭담

저 밭담 길을 걷노라면

비싼 전복은 팔고

내가 좋아하는 성게와 소라를 들고 오는

울 엄마를 만난다

 

밭담이 없어지면

제주 바람은 무엇으로 싸맬까

 

- 「밭담은 아름다운 조각보이다」전문

 

제주도의 풍경을 스케치한 시「밭담은 아름다운 조각보」는 풍경을 이루는 돌담을 조각보로 인식하면서 그 돌담이 함축하고 있는 섬 사람들의 진솔한 삶이 촘촘히 엮여져 있다는 점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거센 바람을 막기 위한 돌담은 밭의 경계이면서. 산짐승들이 넘어오지 못하는 무덤의 지킴이기도 하다. “비싼 전복은 팔고 / 내가 좋아하는 성게와 소라를 들고 오는” 엄마를 기다리게 하는 돌담을 시인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돌담과 바람은 서로 맞싸우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싸매는 관계’라는 통찰이 서정의 진미를 느끼게 한다.

 

그녀는 넉살도 좋다

 

처음 보는 전봇대를

치마를 걷어 올려 감싸고

아무도 돌보지 않는 무덤을

큰 엉덩이로 깔고 앉는다

8월에 비릿한 살냄새을 풀숲 사이로 흘린다

 

그렇다고

업신여기지는 말아라

이 그윽하고 관능적인 칡꽃을

 

손톱으로 으깨면

아깝고도 곱게 자줏빛 아니 보라색 물이 든다

젊은 날을 되찾으려

중년 부인이 화려한 외출을 준비 중이다

 

칡꽃이 지면 가을이다

 

- 「칡꽃」전문

 

그런가 하면「칡꽃」은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나무로서 인간에게는 호불호가 동시에 존재하는 식물이다. 왕성한 생명력은 다른 나무들을 타고 올라가 고사枯死시키기도 하지만 갈근葛根은 약재로서 효용가치가 높기도 하다. 칡꽃의 생명력을 여성으로 등장시키고, 그 생명력을 관능의 경지로 이끌어가면서 꽃이 질 때 우리의 삶도 쇠락해 간다는 중첩된 이미지가 잘 꾸며진 시로서 앞으로 대상(사물)에 대한 정치精緻한 묘사가 더욱 발전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한다.

 

 

 

빙하의 틈 크레바스로

간신히

숨을 쉰다

 

들숨과 날숨

생각과 생각 사이의 틈은

순간의 죽음

 

틈은 삶과 죽음이다

 

철석 같던 부부도

틈이 없으면 갈라선다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이따금

틈을 내자

 

- 「틈」 전문

 

마지막으로『그대와 사는 이유』의 대미를 장식할 시로「틈」을 꼽는다. ‘틈’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분법적 대립- 모순개념에 의한-을 해체하는 묘수이다. 흑黑과 백白 사이에는 흑도 아니고 백도 아닌 무수한 색이 존재한다. 사회적, 정치적 혼란과 대립은 우리가 처한 상황을 이와 같은 틈(사이)를 망각한 모순개념을 맹신할 때 생기는 폐단이다.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틈은 삶과 죽음이다”라는 언명이다. 이 문장의 함의는 삶과 죽음이 모순개념이 아니라는 뜻을 어렴풋이 내보이고 있다. 이 세상에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중간에 위치한 것들이 얼마나 많이 존재하고 있는가? ‘틈’은 ‘악연을 끊는 것’, 용서와 화해, 소통의 숨을 내는 힘이 아니겠는가!

 

5.

 

『그대와 사는 이유』는 시인 김승수의 첫 번째 시집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늦은 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시집을 발판을 삼아 모순과 편견이 가득찬 세상이 그래도 살만한 곳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줄 근력이 충만함을 감지하면서 김승수 시인의 앞날에 큰 발전이 있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