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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너 그리고 우리들의 소외 疏外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2. 11. 25. 15:40

나와 너 그리고 우리들의 소외 疏外

나호열

 

1.

 

『문학과 의식』(2019년 봄 호)에 실린 열 다섯 편의 시들은 우리 현대시가 펼치고 있는 다양한 시선을 보여주는데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현재 간행되고 있는 몇 몇 잡지들은 그들의 편집 방향에 따라, 보다 밀도 있는 편향성을 지니고 그들만의 독자층을 확대하는데 힘을 기울이고 있기는 하지만 일반 독자들의 시 읽기의 편의성을 고려한다면 다양한 시류 詩流를 보여주는 것이 시 읽기의 즐거움을 배가시키고 독자들이 시를 가까이 할 수 있는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어보게도 한다.『문학과 의식』에 실린 시들은 각양각색의 시풍을 보여주면서도 커다란 하나의 주제로 집약할 수 있어 (화이부동和而不同) 한국 현대시의 흐름을 개관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고도 보여진다.

쉽게 시의 다양성이라는 이야기를 끄집어내기는 했지만 곰곰이 안으로 따져 들어가다 보니 다양성의 실체가 과연 있기는 한 것인지 곤혹스러워지기도 한다. 자연을 의미화 하는 전통적인 서정시에서 의식을 해체하는 난해시까지? 젊은 시인들로 시작해서 시력 詩歷이 수십 년에 이르는 시인들까지? 남성의 시와 여성의 시? 이런 편협한 나누기로 다양성을 뭉뜽거려 이야기하기엔 뭔가 부족하지 않을까? 지구는 하나이지만 지구 상에 존재하는 각 생명만큼의 세계가 존재하듯이 인간에 대해서, 자연과 사회에 대해서 각각 다른 발언을 토해 내는 것이, 그 발언의 형식 파괴가 이루어내는 자유로움이 시적 다양성의 핵심이라면 그런 시들을 체감하는 독자의 호불호 好不好도 다양해질 수밖에 없을 터.

 

그래서 가끔 시 읽기에 필요한 태도에 대해 생각해 본다. 가급적이면 알게 모르게 축적된 시에 대한 알음알이를 배제할 것! 오로지 감각으로 시의 내면을 탐색해 볼 것! 그리하여 시가 안내한 새로운 세계에 첫 발을 내딛는 두려움과 기쁨을 맛 볼 수 있다면 그 시는 내게는 참으로 좋은 시!

 

2.

 

한참 시에 관심이 늘어가기 시작할 때 마주친 에즈라 파운드 Ezra Pound의 좋은 시의 요건은 요즘에도 시 쓰기나 읽기의 지침이 된다. 센스 sense, 사운드 sound, 이미지 image, 톤 tone의 네 가지를 좋은 시가 갖추어야 할 요소로 꼽는다는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고, 그렇게 완벽하게 그 요소들을 갖춘 시 창작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을 품지 않은 바는 아니나 새로운 감각을 일깨우고 운율(언어의 음악성)과 의미를 형상화할 수 있는 능력과 독특한 세계관을 표명하는 시인의 어조가 골고루 도드라질 수 있다면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3.

 

『문학과 의식』(2019년 봄호)에 실린 열 다섯 편의 시들을 감상하면서 느낀 첫 번째 인상은 현대사회의 징후들을 예리하게 파헤치고 있다는 불쾌한(?) 즐거움이었다.

 

우리의 현대사 現代史는 질풍노도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전통적 농촌 사회의 가치는 후기 산업사회로 이행되면서 급격히 와해되었다. 공동체의 미덕이었던 장유유서, 충효를 축으로 한 가족의 의미는 퇴색하고 남녀평등, 개인의 자유, 개인주의, 익명성 등등과 같은 딱 부러지게 정의내릴 수 없는 생경한 가치와 조우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나와 너의 소통을 부르짖으면서도 어느새 익명 匿名으로 코드화된 ‘나’를 인식하고, 공동체의 ‘우리’는 소리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 막막한 현실은 아래 예시문과 같이 나와 너 사이에 불안이 자리 잡고 불확정적으로 변화하는 세태를 오늘의 운세로 가늠하는 삶이 바로 오늘에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모르는 사람끼리 불안을 거래하며 안도감이 드는//

긴 수족관과 재떨이에 오늘의 운세가 말려 있는 곳//

이곳은 눈이 내리는 중입니다.

 

-김생, 「밤눈」 마지막 부분

 

그저 서로의 관계는 한 상 잘 차려진 경관(풍요를 꿈꾸고 그 꿈이 실현되고 있다는 착각의 사회)에 감탄을 하지만 응시하는 시점은 제각각인 구경꾼으로 전락해 버려서 그저 더 멀리 보고 싶은 욕망을 주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절망에서 전망을 찾느라 내내 서성거리는 구경꾼들’( 김희업「가져간 풍경」부분)으로 전락한 것이 다시 결합될 수 없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이선이 시인의「밤의 가족어 사전」이나 박찬일 시인의 「천안삼거리」, 이학성 시인의 「밉상」, 하린 시인의 「로드 킬」은 ‘우리’에서 떨어져 나온 ‘나’가 잃어버린 ‘너’의 부재에 대하여 반응하는 통렬한 의식의 분발을 보여준다. 모든 존재는 ‘너’를 통해서 ‘나’를 인식한다. 서로를 비교하고 차이를 깨달으면서 용납과 화해를 배우고 이윽고 ‘우리’의 세계에 진입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오늘의 인간 관계는 '창 없는 모나드 monad'들의 예정된 조화에 대한 믿음으로 막연히 서로를 배회하는 형국이다.

 

그러나 이별을 통보하고

뒤돌아선 당신을 향하여

무작정 뛰어드는 나의 저주를

이젠 어떻게 할 것인가

생생한 참혹을 내내 감당해야 할 거다.

 

- 하린,「로드 킬」 마지막 연

 

영명한 철학자의 예언은 보기 좋게 틀렸다. 고립된 나와 너는 조화롭게 살아가지 못한다. 차에 치인 고라니나 급브레이크를 밟는 나는 서로를 못 믿는 것이 아니라 과신 過信한 탓에 피를 본다. 너는 나를 알아볼꺼야! 그러나 불행하게도 고라니는 차의 제동장치를, 나는 고라니의 본능적 감각만을 믿었을 뿐이다. 차의 브레이크와 고라니의 본능 사이에 어떤 이해나 소통도 존재하지 않은 까닭에 그 자리에 저주 詛呪만이 남을 뿐이다. 자신은 다정하고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너’)에게 서로 서로 소외되면서 ‘왜 쓴 소리를 지겨워하는가. 올바른 진실이 왜곡되며, 이웃의 친절한 미소를 사절하는가. 마침내 그녀는 세상이 밉상이라는 쓸쓸한 결론을 얻고서야 잠을 붙든다.’( 이학성,「밉상」마지막 부분)는 절망에 ‘우리’라는 울타리는 어느덧 사라지고 영영 보이지 않는다.

 

이와 다른 측면에서 「천안삼거리」나 「밤의 가족어 사전」은 현대사회의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 보게 하는 작품들이다.

 

어머니는 비극의 정점에 계셨다. 집에서 운명하시려 했으나 그러질 못하셨다. 혼신의 힘을 다해 네가 날 고려장 시키는구나 말씀하셨다. 어머니의그 다음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어머니를 고려장시켰다. 전주기도원대구기도원용산기도원을 두 차례 다니면서 이미 경지에 도달하시지 않았을까? 기다리던 同生들과 아버지의 슬픔을 위해서 그 말을 하셨을 거다. 큰아들이 고려장 시켜서 그런 거라고, 큰아들에 분노해야한다고, 어머니는 비극의 정점에 계셨다.

 

「천안삼거리」는 전문을 읽어야 한다. 그저 먹먹하게 읊조려야 한다. 언제부터 우리는 객사 客死의 운명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자신의 몸을 뉘었던 방에서 자신이 덮었던 이불을 덮고 이승을 떠나야 하는 것이 순리인데, 어찌하여 이제는 죽음조차 혐오의 대상이 되어버려 응급실에서 병원의 차가운 냉동실로 옮겨지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을까?

 

아버지 어머니 그래서 카르마 karma

셋이 되었을 때 느끼는 어설픈 안정감

편안한 순간에 끼어드는 초조함은 각자의 것

 

....중략 ...

 

아버지 어머니 그러나 다르마 dharma

셋이 모여도 일인용 베게 위에서

다르고도 같은 어둠을 베고 눕는다

 

이 사전에는 감정어가 지워져 있다.

 

- 「밤의 가족어 사전」 2연, 7연. 마지막 연

 

전통 유교사회에서 부모와 나는 업 業으로 맺어진 끊을 수 없는 운명이었다. 부모는 하늘이었고 자식들은 그 하늘 안에서 엄격한 삼강오륜이 주는 긴장과 인격의 성장을 기다리는 초조함을 견뎌야 하는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어느새 부모와 나는 슬그머니 혈연의 연대의식을 벗어나서 탈 권위의, 각자도생의 고독으로 이끌리는 법 法의 베개를 감정 없이 베고 있는 현실에 당면하고 말았다. 끈끈한 혈연의식이 사라지자 출현한 노마드의 ‘나’만 남게 된 것이 누구의 잘못인가?

 

또 다른 측면에서 현대시의 형태적 측면을 살펴보기로 하자.「나의 여름정원을 보여줄게」(김이듬),「덴마크어」(양수덕),「푸줏간」(이재훈).「전후지」(정지우).「밉상」(이학성)등의 작품은 산문시의 형태를 띠고 있다.

 

요즘 시의 경향이 심심치 않게 산문시에 기울어져 있음을 하나의 유행으로 보아야 할 지 아니면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당위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의 단서를 명확히 이야기할 자신은 없다. 다만 위의 언급한 시들이 갖고 있는 공통적 특성으로 어설프게나마 ‘우리’를 빠져나온 ‘나’는 정처 없이 불확실하고 부재한 ‘너’에 부딪친다는 급박한 상황을 강조할 때 산문시의 축조의 의의를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해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너’는 ‘나’ 속에 숨어 있는 히든 셀프 hidden self, 타자화 他者化된 또 하나의 ‘나’이며 드러난 자아 open self와의 불편한 조우가 연속적으로 새로운 의식을 파생시킬 때 취할 수 있는 형식이 산문시의 등장을 촉발하는 것은 아닐까?

「나의 여름정원을 보여줄게」의 화자인 ‘나’는 또 다른 ‘나’인 ‘너’의 지루하고 고요한 일상을 관찰하고 기록한다. ‘나’이면서 ‘너’인 존재는 현실과 꿈이 뒤엉킨 이 세계의 부조화를 끈질기게 관찰하고 이미지화 한다. 의미 없는 시의 의미!

이재훈의 「푸줏간」은 인공 人工에 길들여진 ‘우리’가 자연 속으로 쫓겨 가는 역설적 상황을 반추한다. 모텔로 명명된 문명사회에서 진정한 나만의 거류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문명에서 이탈한 ‘나’는 도처에 깔린 푸줏간의 약육강식을 목도하고 전율한다. 이와 같이「푸줏간」또한 결코 조화롭지 못한 세계, 불안한 생존의 일상을 하나의 역동적 풍경으로 보여주는데 집중하고 있는 듯하다. 분절된 의미를 제거한 채 ‘살진 송아지를 바라보는 늑대의 눈이 사방에서 번뜩’이는 상황의 제시!

 

굴러가면서 남겨지는 돌, 한없이 풀리며 떠지는 눈, 사라진 꼬리가 검열하던 가슴을 아파서 만질 수 없었다. 가쁜 호흡을 도려내어 폴짝, 침았던 숨 사이에 묻었다. 짧은 뒷길과 우묵한 기억 속에 들어가 버린 마음

 

육지와 물속을 구분하지 않게 풍경을 뒤섞였다. 가고 오는 중에 숨소리에 들어갔다 나왔다. 이곳이 어디인지 가슴에 손을 얹어보고 알았다. 구르는 중에 나는 나를 옆으로 낳아, 희미해져가는 꼬리에게 젖을 물려주고 쪽쪽 빨아당겼다.

 

- 정지우,「전후지」 마지막 부분

 

개구리는 올챙이 시절을 기억하고 있을까? 올챙이는 알이었던 기억을 잊지 않고 있을까? 변태를 거듭하면서도 존재의 경계를 인지하는 자아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육지와 물의 경계, 삶과 죽음의 경계는 실재하는 것일까? 아날로그 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신예 시인이 보여주는 어법 語法에 당혹하면서도 세밀한 필치에 드러나는 존재에 대한 화두를 얻게 되었음을 기쁘게 생각한다.

 

 

나호열

 

충남 서천 출생 (1953).월간문학 신인상(1986), 시와 시학 중견시인상(1991)으로 등단. 시집『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알고 있다』(2017), 『촉도』(2015),『눈물이 시킨 일』(2011) 등 17권. 공저 『남양주 봉선사』,『석실서원』등

 

현재 서일대학교 민족문화학과 교수, 도봉학 연구소장, 한국탁본자료관 관장

 

*계간 『문학과 의식』 2019년 여름호 시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