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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진 마음으로 사진 읽기

[16] 세상에 없는 창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1. 20. 16:35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16] 세상에 없는 창

입력 2022.03.2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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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희원, '누군가의 창, 스웨덴 여왕', 2011

 

 

낯선 창이 있다. 창밖엔 평온한 공기, 따스한 햇볕, 꽤 울창한 숲, 그리고 멀리 물과 하늘이 보인다. 혹여 보기와 달리 바깥 바람이 매섭더라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창문은 걸쇠까지 잠긴 채로 잘 닫혀 있다. 해가 지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고, 나는 안락한 내부에 머물러 있다. 창가에 놓인 두 개의 화분은 나란히 같은 색 꽃을 피웠다. 화려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답고, 화병에 꽂힌 꽃보다 오래 볼 수 있을 것 같아 푸근하다. 조용히 창 밖을 바라보고 있어도 좋겠고 차 한잔 마시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어도 좋겠다. 이상하다. 분명히 낯선 창인데 나는 그 안에 있다.

 

김희원 작가의 ‘누군가의 창(Someone’s Window)’ 연작은 다른 사람의 공간을 나의 것으로 만들어 준다. 유럽과 한국에서 촬영한 사진들은 모두 건물의 내부로부터 외부를 향한 시선의 방향을 일관되게 유지한다. 이 시선이 불러일으키는 긴장감은 설렘과 안전감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생겨난다. 내 것이 아니고 내가 가까이하기 힘든 장소에 대한 기억을 소환해 보자. 사춘기 시절 짝사랑의 집은 창문 너머로 어렴풋이 인기척이 느껴지는 정도의 거리감이 자연스럽고, 르 코르뷔지에의 빌라 사보이(Villa Savoy)는 필로티 위로 각진 창이 익숙하게 떠오른다. 밖이 아닌 안에서 바라보는 낯선 창은 일견 평범해 보이지만 익숙하지 않은 공간을 사적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충족감을 준다.

 

역사적인 건축물, 수도원, 박물관, 고궁 등 김희원의 사진 속에 담긴 공간은 대부분 강력한 원근적 시각이 가능한 지점에서 촬영되었다. 또한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되 창틀을 그대로 살려 두어 크게 프린트 한 작품을 벽에 걸었을 때 아주 정교한 속임수 그림, 즉 트롱프뢰유(trompe l’oeil) 효과를 만든다. 공간 디자이너를 겸하는 작가는 사진을 이용해서 막힌 벽에 창을 낸다. 실감나게 연출된 장면은 사진인 줄 알면서도 매번 기꺼이 속아 넘어가게 한다. 사진으로 만들어진 ‘세상에 없는 창’은 마치 마법사에게만 허락된 문처럼 안과 밖을 구분하면서 동시에 연결한다. 답답한 벽을 훌쩍 열어 제치고 싶은 마음 때문인지, 오늘 따라 저 너머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