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유학에 눈뜬 박세당, 왜 마흔에 산으로 숨었나
수락산 서계 종택
김정탁 노장사상가
수락산 자락 의정부 석천동에는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1629~1703)이 살던 집이 있다. 원래는 고택이었는데 한국전 때 불타 없어지고 지금은 새로 지은 한옥이 반듯하게 자리한다. 여기서 5분 정도 더 걸어서 올라가면 노강서원을 만난다. 숙종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영의정으로 추증한 박태보의 충절을 기려서 세운 서원이다. 박태보는 아버지 박세당에 이어 장원급제한 인재였는데 인현왕후 폐위에 앞장서 반대하다가 장희빈에 빠진 숙종의 미움을 받고 모진 고문 끝에 유배길인 서울 노량진에서 죽었다.
박세당의 아버지 박정은 요직인 이조 참판을 지낸 데다 인조반정 공신이어서 수락산 근처에 많은 땅을 하사받았다. 현재 마들역에서 장암동 일대에 이르는 넓은 지역이다. 집안의 이런 풍요로운 배경과 달리 박세당은 편치 않은 삶을 살았다. 네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며, 관직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부인 남씨가 죽었다. 재혼한 부인 정씨와도 11년 만에 사별했다. 게다가 첫째 아들 태유와 둘째 아들 태보를 일찍 저 세상으로 보내야 했다. 또 유년시절에는 병자호란으로 할머니와 어머니를 모시고 원주·청풍·안동을 전전했다.
청나라 문물 접하고 신학문 일궈
다른 생각 배척하는 노론의 횡포
“유학 어지럽힌다”며 사상 탄압
서경덕·이지함·윤휴도 깎아내려
이 시대 반지성주의 비추는 거울
노자에 심취해 도덕경·장자 역주
청나라 문물에 자극을 받아 새로운 유학을 일군 서계 박세당 종택에서 바라본 도봉산. 집 앞의 은행나무는 박세당이 직접 심었다. [사진 김정탁]
박세당은 장원급제로 장래가 보장됐어도 관리로 7년 봉직하고 40세 나이로 일찍 은퇴해 수락산 자락에서 평생 연구하고 제자만 가르쳤다. 한때 서장관(書狀官·기록 담당 사신)이 되어 청나라를 다녀온 일이 있었다. 서장관을 지내면 대개 대감 반열에 오르는데, 그는 관직보다 학문을 선택했다. 서장관으로 청나라의 눈부신 발전을 직접 목격해서인지 그의 학문관에 큰 변화가 있었다. 주자학에서 한 발짝도 못 벗어난 당시 사대부와 달리 새로운 유학에 눈을 떴다. 그건 관념이 아니라 실용에 입각한 유학이었다. 또 조선에서 이단시해 온 노장사상에 심취해 『도덕경』과 『장자』역주를 펴냈다.
박세당
조정에선 정3품 당상관 벼슬을 내리고 그를 등용하고자 했지만, 끝내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백성을 위한 제도 개혁과 사대숭명(事大崇明)에서 벗어난 실리주의 외교를 함께 펼칠 만한 동반자가 조정에 없었기 때문으로 본다. 그런데도 주자학의 절대성을 고집하는 송시열 후예인 노론에겐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이들은 유학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서계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았다. 척화파 상징인 김상헌의 손자이자 송시열 문도였던 김창흡이 이에 앞장섰다. 서계는 75세 나이에 삭탈관직 돼 유배에 처해 졌고, 그해 사망했다.
한국정치 팬덤 현상과 비슷
서계 종택의 사랑채. [사진 김정탁]
생각이 다르다고 인신을 구속하거나 죽음에 이르게 하는 건 반지성주의 행동의 전형에 해당한다. 중국에서 홍위병들이 일으킨 문화혁명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늘날 한국정치를 지배하는 팬덤 현상도 이와 성격이 같다고 본다. 이런 반지성주의 풍토로 박세당과 같은 시대 지성이 희생됐으니 이는 서계의 비극을 넘어서서 조선의 비극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이 머지않아 무너진 것도 주자학만 신봉한 결과이지 않은가. 중국과 일본은 주자학에 더해 양명학을 수용해서 유가와 도가의 균형을 이뤘다. 물론 조선 후기에 실학이 대두했지만, 대세를 되돌리기엔 이미 늦었다.
박세당의 아들 박태보가 귀양가다 죽은 노량진에 들어선 노강서원. 한국 전 때 불타 없어져 수락산 자락에 다시 세웠다. 원래 청절사 터였다. 청절사는 박세당이 수락산 북쪽에 살던 김시습을 기리려고 만든 절이다. [사진 김정탁]
이지함
조선의 반지성주의 풍토는 오래전에 형성됐다. 『토정비결』의 저자 이지함은 과거에 합격했는데도 장자 말을 인용한 게 뒤늦게 발견돼 합격이 취소됐다. 선조는 “유교 경전에 인용할 내용이 많은데 어째서 장자의 밝지 못한 말을 인용했느냐”라고 그를 꾸짖었다. 그래서 거의 평생 낭인 생활을 했는데 이것이 『토정비결』이 나온 계기다.
윤휴 “싫다고 죽일 이유 있나”
박세당이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을 양성했던 궤산정. 원래 정자는 없어지고 지금 것은 후대에 중건했다. [사진 서계문화재단]
또 기(氣) 일원론을 주장한 서경덕이 율곡이나 퇴계와 비교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그의 『화담집』은 조선의 책 중 청나라 『사고전서』에 유일하게 포함될 정도로 국제 경쟁력을 갖췄는데 그의 생각이 노장으로 흘렀다고 해 조선에서 평가절하됐다.
조선 후기 오랜 집권세력이었던 노론은 소론의 영수 박세당뿐 아니라 남인의 영수 윤휴(尹鑴·1617~1680)도 이런 식으로 몰아냈다. 병자호란의 치욕을 겪은 후 정국 최대의 관심사는 청나라를 치자는 북벌이었는데 이를 두고 윤휴는 송시열과 정면으로 대결했다.
윤휴
송시열은 말로만 북벌을 주장한 데 반해 윤휴는 실제로 북벌을 준비했다. 이에 입장이 궁색해져서인지 송시열은 “경전을 배척해 장구를 바꿨다”라고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았다. 그리고 송시열 세력과 결탁한 김석주가 그를 반역으로 죽였다. 윤휴는 사약을 먹기 전 “나라에서 유학자가 싫으면 쓰지 않으면 그만이지 죽일 이유가 어찌 있느냐”라고 항변했지만, 사문난적이 지닌 음모의 심각성을 모르고 한 소리로 들린다.
서양이라고 반지성주의 풍토가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공리주의자 밀(J S Mill)은 이를 이론적으로 일찍이 잠재웠다. 그는 『자유론』에서 “99명의 의견이 옳아도 1명의 의견을 침묵시킬 수 없다”라고 주장하면서 한 명의 의견을 수용해야 진리로 영속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이것이 후에 의회제의 이론적 근거가 됐다. 그래서 의회는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라는 위험한 교조로 무장한 세력들의 단순한 표 대결장이 아니라 다수가 소수의 의견을 수용해야 하는 용광로여야 한다. 설령 세종과 같은 훌륭한 군주가 등장한다 해도 군주제가 의회제보다 나을 수 없는 근거가 이것이다.
자기 오류 인정한 아인슈타인
이런 태도는 과학자에게도 똑같이 요구된다. 아인슈타인은 뉴턴의 세계관을 공유한 사람으로, 확률로 이루어지는 보어의 양자물리학을 수용할 수 없었다. 이에 아인슈타인은 “신은 (확률로 이루어지는) 주사위 놀이를 즐기지 않는다”라고 보어를 공격하자 보어는 “신에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라”라고 반박했다. 그 후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틀렸음을 공개적으로 시인했는데 보어는 논쟁을 통해 자신의 이론이 완벽하게 됐다고 오히려 그에게 고마워했다. 이처럼 자신이 틀렸음을 솔직히 인정할 줄 알고, 또 상대에 대해 고마워할 줄 아는 게 지성인다운 모습이다.
그런데 사회문제 해법을 찾는 일은 과학이론을 발견하는 일보다 훨씬 복잡하다. 그래서 사회문제 해법을 두고 좌가 옳으냐 우가 옳으냐 하는 이념 논쟁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사회이론은 과학이론처럼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 진리가 나올 수 없는 구조여서다. 예를 들어 조선의 해법이 좋아도 지금 해법으로 수용할 수 없고, 중국 해법이 옳아도 한국의 해법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사회과학자는 보편적 진리를 찾는 일보다 해법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여건을 찾는 일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선 이론 적용에 있어 타이밍이 중요하고, 또 해법 간 균형을 맞추는 게 필수적이다.
권력투쟁의 도구가 된 학문
그런데 조선의 선비들은 조선사회 해법으로 주자학이 옳은지 여부만을 두고 시간을 허비했다. 아니 주자학만 옳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생각을 일절 허용하지 않았다. 송시열과 그를 따르던 무리가 특히 심했다. 그러니 조선의 사상적 토대는 허약해질 수밖에 없다. 아무리 주자학이 옳아도 다른 사상의 견제와 도전을 받아야 사상적 경쟁력을 지닌다. 이런 견제와 도전이 생략되면 주자학을 가리켜 온실 속 학문이라 비판해도 할 말이 없다. 그런데 조선의 주자학은 온실 속 학문을 넘어서서 박제화로까지 진행됐다. 철저히 권력투쟁의 도구로 변질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가 망하고 한 세기가 지났어도 이런 풍조가 없어지기는커녕 더욱 심해진다. 작금의 현실이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보고 싶은 것만 선택하고, 다수의 힘으로 상대방 의견을 억압하는 반지성주의적 행동이 똑같이 되풀이되어서다. 이런 행동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이자 공동체가 지닌 자연의 결을 깨뜨리는 주범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조선의 잘못된 역사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알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하는 걸까. 수락산을 오르는 길이 오늘 따라 더 힘든 게 이런 생각으로 마음이 어지러워져서인 듯싶다.
김정탁 노장사상가
'문화평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시 골목길 산책 ‘플라노’ 시대 초월한 감성을 느끼다 (0) | 2022.07.18 |
---|---|
덩치 큰 동물일수록 저출산, 조직도 커지면 혁신 줄어 (0) | 2022.07.14 |
서울의 중심 상권 ‘명동 재생’에 국가 자존심 걸렸다 (0) | 2022.07.01 |
필연과 우연이 얽혔다…靑과 용산집무실 관통한 이 선의 비밀 (0) | 2022.06.10 |
한탄철교에 부러진 38선 표지, 77년 분단의 상처 보여줘 (0) | 2022.06.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