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치 큰 동물일수록 저출산, 조직도 커지면 혁신 줄어
자연에서 배우는 생존 이치
서광원 칼럼
부자들은 대체로 자녀를 많이 낳지 않는다. 잘 살면 키우기도 쉬울 텐데 왜 그럴까? 우리야 유례없는 저출산 시대라 두드러지진 않지만, 이런 기조가 약한 곳에선 지금도 이런 현상이 뚜렷하다. 산업혁명 이후 생활수준이 전반적으로 나아지고, 자녀를 선택적으로 낳을 수 있게 되면서 생겨난 변화라는데 얼핏 이해하기 쉽지 않다.
가장 설득력 있는 연구 중 하나는 재산보다 부모의 성향이 자녀 수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부자인 경우 남자들은 아이를 많이 낳으려고 하지만, 여성은 그 반대가 많다고 한다. 교육 수준이 높고 부유할수록 자녀수를 제한하는 셈이다. 영국의 인류학자 루스 메이스에 의하면 ‘잘 사는 가정일수록 양육비가 더 많이 든다’고 생각한다. 여력이 있으니 그만큼 투자하기 때문인데, 사실 어디 돈만 들어가는가? 신경 역시 많이 써야 한다. 이러니 양육을 더 많이 책임져야 하는 여성들이 많이 낳기보다 적게 낳아서 잘 키우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하다. 자신을 위한 시간을 더 많이 확보할 수 있기도 하고 말이다.
사실 ‘많이 낳기’보다 ‘적게 낳아 잘 키우기’는 더 진화적인 성향이기도 하다. 알다시피 생명의 역사는 어류에서 양서류로, 양서류에서 파충류로, 그리고 포유류와 조류로 큰 흐름이 이어져 왔는데 어미가 한 번에 낳는 알이나 새끼의 숫자는 이 순서에 반비례한다. 그러니까 최근으로 올수록 적어진다. 어류는 수천에서 수만 개의 알을 낳지만, 양서류인 개구리는 수백 개의 알을 낳고, 파충류인 악어는 수십 개의 알을 낳는다. 포유류는 많아야 열 마리 남짓한 새끼를 낳고, 공룡의 후예라는 새들도 대개 대여섯 개의 알을 낳는다. 포유류 중에서도 덩치가 큰 동물들은 새끼들의 숫자가 현저하게 적다. 코끼리나 기린이 그렇듯 보통 한 마리 정도다. 덩치가 크면 들어가는 비용도 상당할 것이니 선택과 집중을 통해 생존율을 높이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을 것이다.
조직 역시 살아있는 유기체여서 그런지 예외가 아니다. 조직의 규모가 커질수록 그 조직의 미래를 만든다고 할 수 있는 혁신이 줄어든다. 만들던 대로 만들면 되는 일반 제품 수는 많아지지만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혁신적인 제품은 줄어든다. 이유는 같다. 조직의 위로 올라갈수록, 그리고 덩치가 커질수록 ‘많이 낳기’보다 ‘적게 낳아서 잘 키우기’ 쪽으로 ‘자연스럽게’ 기울어지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많이 만들면서 실패율이 높은 것보다, 적게 만들면서 성공률이 높은 쪽을 선호한다. 혁신보다는 유지 쪽으로 방향을 튼다. 더구나 조직이 커지면 커질수록 내부 경쟁이 치열해지는데다, 위로 올라갈수록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것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높아지니 조심성은 필수다. 대기업이 될수록 혁신이 드물어지는 이유다.
부자인 남자들이 더 많은 아이를 낳고 싶어 하는 것처럼, 회사에서도 일을 주는 회장이나 사장은 더 많은 혁신(적인 제품)이 나오기를 원한다. 하지만 양육을 떠안아야 하는 여성들처럼 실제로 일을 해야 하고 책임까지 져야 하는 중간 리더들은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 실패하면 모든 걸 떠맡아야 하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성공한다고 해도 그 과실은 대부분 회장이나 사장에게 돌아가고 당사자가 손에 쥘 수 있는 건 얼마 되지도 않는데 말이다. 그나마 그마저 손에 쥘 수 있을지 알 수 없을 때도 많고. “일단 해 봐!” 지금도 이런 말이 횡행하는 곳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면서 성공하면 다 같이 나누고, 실패하면 혼자 뒤집어써야 한다.
혁신은 그냥 ‘한방’이 아니라 수많은 작은 축적이 모여 어느 순간 눈에 보이는 ‘한방’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과정 속에 있는 작은 성공도 중요한데, 최고경영진이 눈에 보이는 것만 보는 것도 장애물 중 하나다. 보이지 않는 기여자들을 사실상 조용히 묻어버리니 다들 눈에 보이는 것만 하려 든다. 주인의식을 가지라고만 하지 주인이 될 수도 없게 하고, 그럴 기회를 주지도 않는다. ‘다 된 밥’에 숟가락 들고 나타나는 사람들은 또 어떤가. 이들은 낄 수 없다 싶으면 재를 뿌리거나 ‘밥상’ 자체를 엎으려 한다.
몇 년 전 방한한 세계적인 미래학자 다니엘 핑크가 한 말이 있다.
“(변화와 혁신에 대한) 가장 큰 저항이 어디서 나오는지 아는가? 최고경영진이 아니라 중간관리자들이다.”
왜 그럴까? 이유는 간단하다. 가장 많은 걸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리적으로 많은 게 아니라 그나마 가진 걸 전부 잃을 수 있어서다. 그래서 “작게 시작하라”고 했는데, 사실 요즘 같은 때에는 이조차 쉽지 않다. 사소한 일이 부지불식간에 일파만파가 되는 게 어디 한둘인가. 저항과 책임 회피는 현상일 뿐 본질이 아니다. 앞 일에 대한 두려움이 본질이다. 위축되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는 말이다. 변화가 워낙 거칠다 보니 ‘윗분’들의 마음이 급해지는 게 당연하지만 그럴수록 조직은 위축된다. 사람들을 겁나게 해서는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 겁은 적에게 주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겁나는 세상 아닌가.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araseo11@naver.com
경향신문과 중앙일보 이코노미스트에서 기자 생활을 했다. 2005년부터 자연의 생존 전략을 연구하며 지속 가능한 생명력을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지를 탐구하고 있다. 『사장으로 산다는 것』 『사장의 길』 등의 책을 냈고,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서 ‘지식탐정의 호시탐탐’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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