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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서 만난 조동익&장필순]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0. 6. 22. 13:54

 

조동익·장필순 “돼지·벌레 같은 마음…바람에 다 날려보내리”

한겨레 등록 :2020-06-22 05:01수정 :2020-06-22 10:51

[제주서 만난 조동익&장필순]
26년 만의 조동익 정규 앨범…파도·바람·새 소리로 빚어

지난 2005년 제주에 둥지를 튼 장필순(왼쪽)과 조동익. 도이키뮤직 제공

지난 16일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두근거림을 안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하루하루 내가 무얼 하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거진 엇비슷한 의식주로 나는 만족하더군/…/ 그래 멀리 떠나자 외로움을 지워보자/ 그래 멀리 떠나자 그리움을 만나보자”출발의 설렘을 고스란히 담아낸 노래 ‘출발’. 포크 듀오 어떤날이 1989년 발표한 2집 앨범 첫번째 곡이다. 20대의 파릇한 두 청년 조동익과 이병우가 결성한 어떤날은 이 앨범을 마지막으로 흩어졌다. 이병우는 자신이 만든 ‘출발’의 노랫말처럼 훌쩍 유학을 떠났고, 조동익은 한국 포크의 거장인 형 조동진과 함께 1990년대 전설의 음악공동체 하나음악을 꾸렸다.

 

비행기는 어느덧 제주공항에 착륙했다. 바람의 섬 제주. 재생 버튼을 누르니 아득한 피아노 소리가 저 멀리서부터 천천히 다가온다. 반복되는 소리는 가까워질수록 첼로 등 다른 소리의 옷을 겹겹이 입더니 기어이 내 몸을 감싼다. 그러고는 갑자기 사라진다. 5분 좀 넘는 연주곡의 제목은 ‘바람의 노래’. 조동익이 지난달 발표한 정규 2집 <푸른 베개>의 첫번째 곡이다. 그는 이 곡에 대해 이런 설명을 남겼다. “아직도 제 가슴속에 남아 있는 희망, 열정, 상처, 분노…, 이젠 부는 바람에 다 쓸려 보내고 가슴을 텅 비웠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2005년 제주에 둥지를 튼 조동익(왼쪽)과 장필순. 도이키뮤직 제공

차를 달려 닿은 곳은 제주시 애월읍 소길리. 푸른 나무와 풀로 뒤덮인 그 공간에 두 사람이 있다. 삶과 음악의 동반자 조동익과 장필순. 둘은 2005년 이곳으로 내려와 둥지를 틀었다. 그때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떤날의 ‘출발’ 같은 마음이었을까? 조동익은 고개를 저었다. “그때는 ‘티브이(TV), 돼지, 벌레’ 같은 마음이었다”고 했다. 조동익이 작사·작곡하고 장필순이 불러 장필순 5집(1997)에 실은 노래다.“도로 위엔 오늘도 미친 자동차/ 아이들은 어디에 텅 빈 놀이터/ 나는 TV 앞에서 하루를 보냈죠/ 채우고 채워도 부족한 세상/ 우리의 욕심은 하늘을 찌르네/ 나는 하루종일 먹고 또 먹었죠 돼지처럼/ 들여다봐요 두려워 말고/ 헛된 꿈으로 가득 채워진 세상/ 이 슬픔의 강은 언제쯤/ 그 푸른 바다를 만날 수 있을까”그들은 욕심과 헛된 꿈으로 가득 찬 세상을 떠나 푸른 바다를 만나러 이곳에 온 걸까?

조동익이 올해 5월 발표한 26년 만의 정규 앨범 <푸른 베개>

1972년 12살 소년 조동익은 토요일만 되면 그간 모은 용돈으로 담배 한 갑을 사서 작은형과 작은형수의 집으로 달려가곤 했다. 13살 터울의 작은형 조동진은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고, 작은형수는 그에게 사탕을 주었다. 작은형은 그에게 음악을 가르쳐준 적이 없다. 하지만 그는 작은형을 동경하며 자연스럽게 음악의 길에 들어섰다. 2014년 작은형수 김남희가 세상을 떠났다. 3년 뒤 조동진도 아내 곁으로 갔다. 그는 1972년의 기억을 꺼내 짧은 글을 썼다. 곡을 만들고 그 위로 동생인 싱어송라이터 조동희가 자신의 글을 대신 읽게 했다. ‘farewell. jdj, knh(1972)’라는 제목을 붙여 이번 2집 앨범에 실었다. 그렇게 두 사람에게 뒤늦은 작별 인사를 전했다.1980년 20살 청년 조동익은 조동진 2집 수록곡 ‘어떤날’을 만들어 작곡가 데뷔를 했다. 이는 몇 년 뒤 이병우와 결성한 듀오의 이름이 됐다. 1986년 나온 어떤날 1집은 한국 대중음악 명반을 꼽을 때면 늘 열 손가락 안에 든다. 어떤날이 2집을 마지막으로 해체한 뒤, 조동익은 형 조동진과 함께 1992년 하나음악을 세웠다. 하나음악은 단순한 기획사가 아니었다. 구성원들이 가족처럼 어울리는 공동체였다. 조동익은 이곳에서 자신의 첫 솔로 앨범 <동경>(1994)을 발표했고, 장필순의 최고작으로 꼽히는 5집(1997)을 프로듀싱했다.

2013년, 제주에 온 지 8년 만에 내놓은 장필순의 7집 <수니 세븐>

조동익과 장필순은 이 시절부터 30년 동안 음악뿐 아니라 삶도 함께해왔다. 2003년 하나음악이 문을 닫고, 2005년 훌쩍 아무 연고도 없는 제주도행을 택할 때도 함께였다. “그땐 정신적으로 너무 지쳐서 음악이고 뭐고 아무것도 하기 싫었어요.” “재미도 없고 보람도 없고 껍데기만 남은 그런 기분이었죠.” 왜 ‘티브이, 돼지, 벌레’의 마음이었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제주에서 이들은 음악 대신 농사와 목공 일에 몰두했다. 자갈을 골라내고 텃밭을 일구다 보면 손톱에 새까맣게 흙때가 끼었다. 나무를 자르고 대패질을 해서 가구를 만드는 일도 점차 익숙해졌다. “대팻날을 날카롭게 하려고 반복해서 갈고 있으면 아무 생각도 안 들어요. 나중엔 대팻날에 내 이빨에 낀 고춧가루까지 비칠 정도가 되죠.”제주의 작은 집에 둘만 있는 건 아니다. 유기견이었다가 가족이 된 반려견이 한때 8마리까지 불었다. 지금은 1마리를 다른 곳으로 보내 7마리와 산다. 그뿐만 아니다. 장필순은 동네를 다니며 방치되다시피 한 개들에게 먹이를 주고 산책을 시켜준다. “우리가 외롭지 않으려고 필요에 의해 길들여놓고 이제 와서 모른 척하는 건 도리가 아니죠. 남편을 반려자라고 하는 것처럼 반려견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장필순은 유기견 보호 활동에도 적극적이다. 조동익도 개들을 자식처럼 아낀다. 매사 ‘솔메이트’처럼 통하는 둘은 2018년에야 뒤늦게 작은 성당에서 반지를 주고받으며 혼배성사를 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고 후배들이 등 떠밀어서 한 것”이라며 장필순은 멋쩍게 웃었다.

조동익의 첫 솔로 정규 앨범 <동경>(1994)

이곳에서의 삶은 음악적 결실로 이어졌다. 제주에 온 지 8년 만인 2013년, 오랜 침묵을 깨고 장필순 7집 <수니 세븐>을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조동익이 프로듀싱하고 장필순이 노래한 앨범의 첫 곡은 ‘눈부신 세상’이다. 전반부에서 잔잔하게 흐르던 노래는 중반부터 폭포수처럼 터져 나온다. “그동안 안에 응축돼 있던 게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 같다”고 둘은 입을 모았다. 한번 터진 물꼬는 흐름을 멈추지 않았다. 2015년 옴니버스 앨범 <강의 노래>, 2016년 조동진 6집 <나무가 되어>, 2018년 장필순 8집 <수니 에이트: 소길화>에 이어 올해 3월 장필순 새 앨범 <수니 리워크-1>까지 이어졌다. 장필순은 ‘어느새’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 ‘풍선’ 등 예전에 불렀던 노래를 새로 편곡하고 다시 불렀다. “베스트 앨범 개념이 아니라, 지금 꼭 새롭게 다시 부르고 싶은 노래들을 골랐다”고 했다.조동익은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내건 앨범 <푸른 베개>를 지난달 내놨다. 1집 <동경> 이후 꼭 26년 만의 정규 앨범이다. “진작부터 마음이 있었지만, 필순이와 동진이 형 앨범을 먼저 하느라 자꾸 뒤로 미뤘다”는 그는 스스로 마감 시간을 정하고 나서야 1년여 만에 앨범을 완성됐다. 집에 있는 작은 작업실에서 컴퓨터 전자음과 씨름하며 만든 앨범은 놀랍게도 자연의 소리를 닮았다. “주변이 온통 파도·바람·새소리라 음악도 따라간 거죠.” 그는 앨범을 내기 전 두려웠다고 했다. ‘내가 끝낼 수 있을까? 사람들 반응은 어떨까?’ 앨범을 내놓은 지금, 불안한 마음은 사라진 대신 아쉬움이 남는다 했다. “더 단순하게 만들고, 더 비워냈어야 했어요.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생기더군요.”

장필순의 최고작으로 꼽히는 5집(1997)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다음날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륙하니 저 아래로 푸른 바다가 보였다. 조동익의 이번 앨범 수록곡 ‘날개 Ⅱ’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한때 날개를 펼치고 높이 비상하다 지금은 날개를 잃은 한 사내에 관한 노래다. 조동익은 노래 속 사내에 자신을 투영했다고 했다.“나의 희망과 나의 열정이 소금처럼 녹아내리도록/ 나의 상처와 나의 분노가 소금처럼 녹아내리도록/ 저기 푸르고 창백한 그곳 소금처럼 녹아내리도록”그의 희망과 열정과 상처와 분노가 소금처럼 녹아내린 바닷물이 유난히 새파랬다. 무의 경지를 향해 소멸해 가는 그곳에서 눈이 시리도록 빛나는 음악의 결정체가 빚어지는 듯 보였다.제주/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