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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8. 7. 26. 17:10

못난

-신성리 갈대밭에서 / 나호열

  

아들 아버지 형 아우 오라버니 지아비 할아버지 학생 스승…… 이 빛나는 이름 앞에 못난을 붙여 호명하면 일제히 고개 숙이며 앞으로 나아간다

 

   수많은 내가 흰머리 휘날리며 바람의 매를 맞고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알고 있다』, 문학의전당,2017.

 

 

   * 지난해(2017,12) 국립국어원에서 ‘못나다, 못생기다, 잘나다, 잘생기다, 낡다’ 이상의 5개 어휘를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로 인정한다고 발표한 뒤, 표준국어대사전에 바뀐 품사로 등재한 바 있다. ‘못나다’의 경우 ‘나다’가 동사인데다, ‘못났다’처럼 ‘-었’이 들어가서 현재의 상태를 나타내는 게 변경 이유라고 한다.

사진 속 시인은 동사로든 형용사로든 ‘잘생긴 얼굴’이라고 편들 만하다. 그런 시인이 고향에 내려와 갈대밭에 들렀나 보다. 갈대는 억새에 비해서 덜 깔끔한 모습인데, 고개도 반반히 못 들고 바람에 이리저리 치이는 갈대의 생김생김에서 시인은 하나같이 자신의 못난 구석을 맞닥뜨린다.

아들로서 부모에게, 아버지로서 자식에게, 학생으로 스승에게, 스승으로 학생에게 어느 자리에서든 부족한 부분이 있는 게 당연지사다. 할 만큼 했어도 그 이상으로 실망스럽고 후회되는 일들이 있다. 잘난 것보다 못난 것에, 상대보다 자신의 불찰에 더 마음이 쓰인 시인은 결국, ‘못난’ 타이틀의 주인임을 자처한다. 이제 흰머리에 깃든 연륜 때문인지 “바람의 매”도 모질어 보이지 않고 스스로 매를 대려는 마음만 귀해 보인다. 하지만 못난 얼굴을 오래오래 들여다보는 날이 단지 수사만은 아닐 것이다.

‘못나다’의 품사 변경 논란이 여전한 가운데, ‘못났다’는 건 과거의 한때도 그러했고,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러하다는 거다. 겉으로는 과거와 현재가 같은 얼굴이지만, 내적으로는 숱한 굴곡과 주름을 더하는 시간일 게 분명하다. 이렇듯 가열한 시간이 있기에 ‘동사’로 부르기로 했다면 더 그럴듯한 설명이 되었을까. 이 또한 못난 사람의 넋두리에 가깝다. (이동훈)

 

* 월간 우리시 2018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