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고규홍의 나무편지

아름다움의 씨앗을 키워나가는 겨울 정원, 나무의 신비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7. 1. 26. 10:51
받는사람
나호열님 <prhy0801@hanmail.net> 주소추가
솔숲에서 드리는 나무 편지

[나무를 찾아서] 아름다움의 씨앗을 키워나가는 겨울 정원, 나무의 신비

  “1월과 2월, 정원은 조용히 자라고 있지만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스태니슬라우스 케네디 수녀의 명상록 《영혼의 정원》 첫문장입니다. 겨울 정원 혹은 겨울 숲의 분위기를 절묘하게 묘사한 이 명상록의 문장을 몇 줄 더 읽겠습니다. “향기도 없고, 소리도 없으며, 생명의 징후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정원 안에서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비록 땅 위에는 서리가 내렸을지라도 지구의 온기가 남아 있는 저 땅속에서는 뿌리들이 봄을 준비하고 있고 생명이 꿈틀거린다는 것을, 비록 지금은 볼품없지만 그들이 밝은 세상을 향한 모험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고 그는 첫 단락을 이어갑니다.

  케네디 수녀는 일월과 이월을 그래서 “고요한 영혼의 정원과 만나는 시간”이며, “내면의 힘과 아름다움의 씨앗을 발견하는 시간”이라고 했습니다. 기왕에 겨울 정원을 이야기한 다른 글을 옮겨 쓰는 김에 생태칼럼니스트 마이클 폴란의 글까지 보태겠습니다. 마이클 폴란은 “정원의 겨울은 사색하기 좋은 계절”이라고 한 뒤, 봄이 올 때까지 정원사는 “눈 덮인 대지의 캔버스 위에 자신이 상상하는 정원을 수도 없이 그려낸다”고 그의 책 《세컨 네이처》의 〈제11장 겨울 정원〉의 첫문장을 시작했습니다. 고요 속에서 사색에 몰입해야 하는 곳, 그곳은 겨울 정원입니다.

  이 고요한 숲에서 중뿔나게 생명 활동에 활발하게 나선 나무가 있습니다. 지난 주 《나무편지》의 끝 부분에서 예고해드린 것처럼 생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신비로운 삶을 살아가는 식물, 뿔남천입니다. 뿔남천이라고 부르는 식물에 속하는 나무가 여럿 있어서 정확히 부르자면 긴 품종명을 붙여서 불러야 하겠지만, 뭉뚱그려 그냥 ‘뿔남천’이라고 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겁니다. 오늘 사진에서 보여드리는 노란 색 꽃이 바로 이 뿔남천 종류의 나무들이 피운 꽃입니다.

  중뿔나게 노란 꽃을 피운 이 나무는 뿔남천 종류 가운데 〈중뿔남천 Mahonia x media 'Round Wood'〉입니다. 국가표준식물목록에서는 〈라운드우드 메디아뿔남천〉을 추천명으로 한 식물입니다. 더 정확히는 〈메디아뿔남천 ‘라운드우드’〉이죠. 조금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뿔남천 종류 가운데 메디아뿔남천을 기본종으로 하여 선발하여 ‘라운드우드’라는 이름을 붙인 품종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의 ‘메디아뿔남천’을 한동안 ‘중뿔남천’으로 옮겨 쓴 것이었습니다. 한 말씀 보탭니다. 따옴표로 표시한 품종명을 앞에 놓느냐, 뒤에 놓느냐에 대해서는 여러 생각이 있습니다만, 저는 그 동안 품종명을 앞에 놓는 게 우리말의 일상적 어순에 자연스럽지 않나 하는 생각으로 그렇게 씁니다.

  지난 주에 보여드린 납매처럼 뿔남천 종류의 나무들도 이 추운 겨울에 꽃을 피웁니다. 기후에 따라서 조금씩 차이가 생기기야 하지만 대개의 경우 납매보다 조금 먼저 피어나는 편이지요. 납매와 달리 뿔남천의 꽃은 샛노란 꽃잎이 화려합니다. 화사하지요. 자잘한 꽃송이가 가지 끝에 다닥다닥 모여서 피어나기 때문에 마치 꽃방망이처럼 보입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봄에 피어나는 조팝나무 꽃방망이를 떠올릴 수 있지 싶기도 합니다. 무채색의 한겨울에 이처럼 화사한 꽃방망이를 볼 수 있다는 게 흥미롭습니다. 쁠님찬 꽃이 피어있는 겨울 정원에 들어서면 온 눈길이 바로 뿔남천 꽃방망이에 모이게 마련입니다.

  십이월에 피어난 뿔남천의 꽃은 십이월 말에서 일월 초 쯤에 절정을 이룹니다. 긴 시간이었지만 이 꽃이 존재의 이유이자 목적을 이루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납매와 마찬가지로 벌이나 나비와 같은 매개곤충을 끌어들여 혼사, 즉 꽃가루받이를 치러야 하니까요. 뿔남천 꽃이 화려한 건 그래서입니다. 향기가 없는 대신 모양과 빛깔로 곤충을 끌어들일 속셈인 거죠. 그러나 아무리 홀로 화려해도 수가 적어진 곤충들을 끌어들이는 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삭풍이 불어오든, 눈보라 몰아치든 견뎌야 합니다. 납매처럼 오래도록 피어있을 수밖에 없는 이치입니다.

  작고 여린 꽃송이들이 서로의 꽃잎을 부벼서 언 뺨을 녹이면서 곤충들을 기다려도 목적을 이루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하나의 자손이라도 더 얻으려면 기다려야 합니다. 더 튼튼한 자손을 세상에 내보내기 위해서는 근친혼 즉 자가수분도 피하는 게 좋습니다. 나무는 그걸 잘 압니다. 하나의 꽃송이 안에 돋아난 암술의 머리 부분과 수술의 꽃가루 사이는 그래봐야 오 밀리미터도 채 안되는 짧은 거리이지만 참아야 합니다. 그래서 또 기다립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더 이상 견딜 힘이 떨어질 즈음, 잔뜩 신경이 예민해집니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게 됐다고 해도 될 겁니다.

  그때 만일 암술과 수술의 아래 쪽 부분에 뭔가 작은 자극이 나타나면, 나무는 최후의 수단으로 제 꽃 송이 안의 수술을 순간적으로 빠르게 오므라들여서, 암술 머리에 꽃가루를 묻힙니다. 순간을 놓치지 않고 감행하는 비장한 작업입니다. 하지 않으려 발버둥치며 안간힘을 다했지만, 할 수 없는 일이 있었던 겁니다. 결국 좋은 일이 아닌 줄은 알지만, 그냥 시들어 떨어지는 것보다는 낫다는 판단이었을지 모릅니다. 결국 원하는 만큼의 결과는 아니라 해도 나무는 최소한의 결과를 이루고 참담한 심정으로 눈보라 속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고 서서히 한 송이 두 송이 땅 위에 떨어집니다. 돌아보자면 비참한 최후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앞에서 보여드린 케네디 수녀의 이야기처럼 고요하게 자라고 있는 겨울 정원의 식물들, 그 안에는 이처럼 내면의 힘과 아름다운 씨앗을 잉태하기 위한 나무의 신비로움이 있습니다. 그 신비를 발견하는 아름다운 공간이 겨울 정원입니다. 맨 끝의 사진은 겨울 정원의 뿔남천 앞에서 이르게 피어난 매화 한송이입니다. 제게는 올해의 첫 매화입니다.

- 고요한 겨울 정원에서 매운 바람 맞으며 1월 23일 아침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