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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편지

폐사지 한 켠에서 수천의 봄을 맞이한 나무의 새 봄 노래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7. 3. 6. 01:03

 

솔숲에서 드리는 나무 편지

[나무를 찾아서] 폐사지 한켠에서 수천의 봄을 맞이한 나무의 새 봄 노래

  지난 주 중에 《나무편지》를 한번 더 띄우며 피곤하게 해 드렸습니다. 다른 원고 작업에 밀려 시간을 재우치는 중이었지만, 돌보는 이 없이 홀로 겨울 바람 맞으며 서 있는 오래 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참 서럽고 그리워서 그랬습니다. 큰 몸 안쪽에 쌓인 시간의 자취를 허공에 모두 날려버린 채 텅 빈 몸통으로 비워내면서까지 폐허로 남은 옛 절터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늙은 느티나무 말입니다. 나무가 눈에 어려 떠나지 않았습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쉬지 않고 보내오는 나무의 울림을 떨치지 못했습니다. 기억에서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을 장한 나무, 원주 법천사지 느티나무였지요

 

 

  사람의 자취가 대부분 사라진 또 하나의 절터로 원주 부론면에 거돈사지가 있습니다. 거돈사지는 예의 법천사지에 비하면 그나마 좀더 많은 절집의 오랜 흔적이 남아있는 편입니다. 폐허만 남은 절터라고 하기보다는 이러저러한 옛 자취들을 확인할 수 있는 절터이지요. 거돈사라는 절 역시 법천사와 마찬가지로 한창 때에는 무척 큰 절이었습니다. 절집의 흔적으로 남은 돌담이라든가 몇 기의 탑, 그리고 그 넓은 터만 보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확인된 절터만 약 2만5천 제곱미터, 옛 단위로는 대략 7천5백 평 정도 되는 큰 터입니다

 

 

  거돈사居頓寺는 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 사이에 세워진 절입니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절집의 형식이라든가 가람 배치 방식 등으로 시기를 짐작한 겁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고 하지만, 역시 정확한 기록은 없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에 〈거돈사는 현계산에 있는데, 고려의 최충이 지은 승묘탑비가 있다 (居頓寺在玄溪山有 高麗崔沖所撰僧勝妙碑)〉라는 기록이 있으니, 이 글이 쓰여진 조선 중기까지는 존재했던 절집 아닌가 싶고, 절집이 무너앉게 된 사건으로 임진왜란을 생각하게 되는 거지요.

  거돈사지에 남아있는 사람의

  희미하게 짚어볼 수 있는 옛 사람의 자취 한켠에 매우 큰 느티나무 한 그루가 살아 있습니다. 강원도 원주시 보호수 제9호로 지정된 이 느티나무는 높이 20미터, 둘레 7.2미터의 큰 나무입니다. 보호수 지정 기록을 그대로 따르면 나무의 수령은 무려 1,000년이나 됩니다. 절터의 가장자리인 석축에 매달린 듯 위태롭지만 근사하게 서 있는 느티나무입니다. 뿌리 부분에서부터 줄기가 둘로 나뉘어 있어서 나무의 둘레는 사람 가슴 높이가 아니라, 뿌리 부분의 둘레를 측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의 《나무편지》에 담은 사진들이 그 나무입니다

 

 

 

  나무의 자리가 위태롭기는 하지만, 나무의 생육 상태는 나이에 비해 그리 나쁘다고 할 수 없는 편입니다. 석축 바깥쪽으로 뻗었던 굵은 가지가 잘린 흔적이 있고, 확인할 수는 없지만 적지 않은 가지가 쇠잔해 스러진 듯 전체적으로 허전한 느낌이기는 합니다만, 지난 《나무편지》에서 보여드렸던 법천사지 느티나무에 비하면 훨씬 건강합니다. 원주시에서 측량한 1천 년의 수령이 믿어지기 힘들 만큼입니다. 돌담 아래 쪽으로 조금 떨어진 자리에 서 있는 또 하나의 젊은 느티나무의 풍요에 비할 수는 없지만 늙은 나무만 보여줄 수 있는 세월의 켜가 듬직합니다.

  법천사지에서도 그랬듯이 늙은 느티나무가 없다면 이 폐사지는 얼마나 쓸쓸할까 돌아봅니다. 다시 또 ‘사람 떠난 자리를 오래도록 홀로 서서 사람의 자취를 지키며 남은 나무’를 생각할 수밖에요. 모든 나무가 그렇듯이 참으로 장하고 고마운 나무입니다. 돌틈에 끼인 채 나무는 지금 이 땅에 봄이 오는 소리를 가만가만 탐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천의 봄, 언제나 그랬듯이 다시 또 이 땅의 모든 생명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땅으로부터 물을 끌어올리고, 안간힘을 다해 새 잎을 돋워서, 햇살을 그러모아 양분을 짓겠지요. 텅빈 가지 한가득 푸른 잎이 무성해질 때 다시 찾기로

 

  원주 지역의 나무 답사는 이어졌습니다. 바로 원주 학곡리라는 오붓한 마을 뒷동산에 우뚝 서 있는 소나무입니다. 넉넉해 보이는 한 살림집의 뒤편 둔덕 가장자리에 서 있는 이 소나무는 원주시 보호수 제69호로 지정돼 있습니다. 높이 13미터, 가슴높이 줄기둘레 3.8미터의 큰 소나무입니다. 나이는 3백 살 정도로 추정하는 나무입니다. 오래 전부터 ‘용소나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나무입니다. 아주 옛날에 치악산의 용소라는 못에 아홉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 여덟 마리는 하늘에 오르고 한마리만 남았어요. 그 한 마리의 용이 용소에서 흐르는 물을 따라 이곳까지 내려와서는 바로 이 소나무 줄기를 타고 하늘에 올랐다는 전설을 가진 나무입니다. 땅거미가 뉘엿뉘엿 깔릴 즈음에 찾은 이 소나무는 크기보다는 생김새가 압권입니다.

  오늘의 《나무편지》를 마치기 전에 느티나무 한 그루 더 보여드립니다. 한 자리에서 천년을 살아온 것으로 기록된 또 하나의 나무입니다. 바로 위의 나무입니다. 원주시 행구동 마을 어귀의 개울가에 서 있는 느티나무인데, 전체적인 생김새나 생육 상태가 모두 좋습니다. 마을 길이 바짝 붙어 있는 바람에 나무 뿌리 부분에 돌 축대를 쌓아 나무를 보호했는데, 나무가 워낙 장하다 보니, 화단은 비좁아 보입니다. 그래도 나무는 융융하고 생생합니다. 앞에서 보나 뒤에서 보나 혹은 서서 보나 앉아서 바라보나 매우 훌륭한

 

 

 

  끝으로 최소한 제게는 봄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인 설강화 한 촉을 보여드리며 오늘의 긴 《나무편지》 마치겠습니다. 새하얀 꽃봉오리 드러내며 설강화 한 촉이 봄 소식 전하려 꼬물거립니다. 숲은 그렇게 봄의 교향악을 준비하는 중입니다.

  아직 원주 지역을 대표하는 나무인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 소식을 전해드리지 못했습니다. 다시 또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네요. 언제나 변함없이 《나무편지》를 아껴주시고 성원해주시는 모든 분들께 고마움의 인사 올립니다. 고맙습니다.

- 수천의 봄을 언제나 생기있게 맞이하는 폐사지 느티나무와 함께 2월 20일 아침에 ……
솔숲(http://solsu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