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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명절 잘 쇠셨지요. 다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7. 1. 31. 22:21

 

[나무 생각] 설 명절 잘 쇠셨지요. 다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솔숲에서 드리는 나무 편지

[나무 생각] 설 명절 잘 쇠셨지요. 다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설 명절 잘 쇠셨지요. 숫자로 된 새해가 우리 앞에 놓이고 어느 틈에 한 달이 지났습니다. 우리의 오래 된 방법대로 헤아린 새해, 닭띠 해가 밝았습니다. 설 명절 전부터 새해를 맞이하는 서설 瑞雪이 하얗게 온 세상을 덮은 탓에 분위기도 제법 괜찮았습니다. 멀리 고향 길 오가느라 애쓰신 분들께는 죄송스러운 말씀입니다만, 그저 바라보기에는 하얗게 눈 덮인 새해 풍경은 새해다웠고, 겨울다웠기에 제법 좋았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네요. 누가 뭐라 해도 고향 가는 길이었으니까요. 이제 해와 달과 사람, 모두가 다시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큰 걸음을 내디뎌야 할 때입니다.

  숲에서 말 없이 살아가는 나무들에게야 새해가 따로 있을 리 없지요. 하늘과 바람과 별을 따라 숲의 생명들은 그저 흐름 따라 더불어 살아갈 뿐입니다. 자연에서 조금씩 떨어져 나오려 애쓰는 사람에게야 숫자로 헤아리는 달력 없이 자연의 흐름을 감지하기 어려운 노릇이지만, 자연의 생명에게 달력이니 새해니, 그게 무에 그리 필요하겠습니까. 겨울 바람 깊어지면 동백나무 붉은 꽃 피어나고 쌓인 눈 녹이는 봄 바람 불어오면 목련 하얀 꽃 피어나는 게 숲 속 나무의 생명 살이입니다. 겨울 바람 불어오자 피어나기 시작했던 애기동백의 빨간 꽃은 이제 한 생명의 고비를 넘어서는 중입니다. 아직 이 꽃이 살아남아야 할 시간은 더 남아있지만, 나무는 사람보다 더 빨리 하늘과 바람과 별의 흐름을 알아챕니다. 이 숲에서 피어날 다른 꽃들을 위해 애기동백 꽃은 서서히 돌아갈 채비를 해야 합니다.

  계절의 흐름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아채는 식물들이지만, 때로는 시절에 어긋나게 꽃 피고 열매 맺는 식물들이 있습니다. 겨울 나그네의 발길을 멈추게 한 한 떨기 풀꽃도 그런 식물이었습니다. ‘늦개미취’라고 부르는 식물입니다. 우리 땅에서 자라던 식물이 아니어서, 모두가 함께 부르는 온전한 이름을 가지지 못한 작은 국화과의 풀꽃입니다. 개미취와 가까운 친연관계를 가진 식물이지만, 꽃이 조금 늦게 피어난다 해서 ‘늦’ 자를 앞에 붙인 것이라고 합니다. 그 동안 우리가 불러왔던 개미취에 비하면 꽃송이의 크기가 작고 빛깔은 더 선명해 더 예쁘네요.

  국가표준식물목록에서도 아직은 늦개미취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식물을 이 땅에 들여오는 과정에서 우선 붙인 이름이 통용되는 겁니다. 모두가 똑같이 부를 이름을 가지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한 모양입니다. 늦개미취의 보랏빛 꽃을 만난 건 우연이었지요. 예상도 하지 않은 시간, 그런 자리에서 만났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앙증맞은 꽃이 돌틈에서 반짝이며 피어있는 앞에 무릎을 꿇고 바라보았습니다. 늦게 꽃을 피워서 늦개미취라고는 하지만, 늦어도 너무 늦은 개화입니다. 그래서 더 예뻐 보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시절을 벗어나긴 했지만, 그도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의 사명에 성실한 겁니다. 추위 속에 안간힘하며 피어있는 보랏빛 꽃노래가 기특하고 장합니다.

  예년에 비하면 분명히 이른 시간입니다만, 복수초도 꽃을 피웠습니다. 아무리 눈 내린 겨울 숲에서 얼음을 뚫고 피어나는 꽃이어서 ‘얼음새꽃’이라는 별명까지 가졌지만, 아직 겨우 설날 즈음인 걸요. 복수초 꽃이 노란 얼굴을 내민 건, 벌써 열흘도 더 지났습니다. 그때만 해도 날씨가 겨울답지 않다 할 만큼 온화하던 날이었습니다. 며칠 째 그런 날씨가 계속되던 일월 초순이었지요. 복수초 꽃 피고나서 다시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지면서 강추위가 다가오고 눈도 많이 쌓였습니다. 봄 바람 다가온 줄 알고 제 키를 낮춘 채 살금살금 피어난 복수초 노란 꽃송이들이 며칠 동안 이어진 추위를 잘 이겨내야 할텐데 걱정입니다.

  늦개미취도 복수초도 뜻밖이어서 더 반가웠지만, 시절에 맞지 않은 개화는 아쉬움도 함께 남기는 게 사실입니다. 늦가을에 피어나야 할 늦개미취와 이른봄에 피어나야 할 복수초를 같은 날 같은 숲에서 만났다는 것부터가 벌써 계절의 흐름에 맞지 않는 일일테니까요. 땅 밑에서 가만히 봄을 기다리던 복수초도 제대로 알아채기 힘들었을 만큼 날씨의 변화가 우심했던 모양입니다. 늦개미취의 꽃이야 하릴없이 금세 지고 말겠지만, 복수초 꽃까지 자취를 감추지 않기를 바라야 합니다. 복수초 꽃 없이 맞이하는 봄이 오는 길목은 아무래도 어색하지 않을까 싶으니까요. 여느 봄꽃에 비해 비교적 긴 시간 동안 꽃을 보여주는 복수초이니 잘 견뎌내리라 믿으며, 아직 남아있는 겨울 추위에 몸살하지 않고 남아있기를 바랍니다.

  숲의 겨울을 지내는 거개의 나무들이 가장 눈에 띄게 보여주는 건 아무래도 열매입니다. 언제 보아도 화려하기만 한 남천의 빨간 열매도 그렇습니다. 시절에 맞춤하든 그 흐름에 조금 벗어났든 모두 오래도록 함께 살아가야 할 벗들입니다. 숲 속의 벗들을 떠올리게 하는 옛 시 한 수 옮겨 읊으며 오늘의 《나무편지》 마무리합니다. 초록의 벗들과 함께 새해 좋은 일 많이 이루시기 바랍니다.

  들꽃과 벗하여 / 病還孤山舡上感興
    - 윤선도 / 尹善道

  人?知己少 / 사람 사는 세상에 동무 적어도
  象外友于多 / 산에 들어서면 벗 투성이예요
  友于亦何物 / 누가 동무냐 묻지 마세요
  山鳥與山花 / 새도 꽃도 모두 내 벗이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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