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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면 보이는 것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6. 3. 4. 00:18

나이 들면 보이는 것들
 
김주영 / 소설가

내게는 매우 수상한 그림 한 점이 있다. A4 용지 한 장 크기보다 작은 규격의 허술한 액자 안에 장전되어 있는 이 그림은, 어떤 지인이 유럽 여행길에 우연히 들렀던 벼룩시장에서 발견하고 서너 푼을 건네주고 구입한 것이었다. 그 지인이 그림을 내게 선물하면서 지었던 애매한 표정 또한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그 그림을 보는 순간 나 역시 가슴이 섬뜩했었고, 그래서 얼른 건네받기가 주저되었다. 그러나 멀고 먼 유럽여행길에서 손에 넣은 그림일뿐더러 선물에 얹혀 있는 정서적 배려를 생각할 때 그 자리에서 냉큼 내치기도 어려워 대충 얼버무리며 그 선물을 받았다.

일단 받기는 하였으나 벽에 걸기도, 그렇다고 책상 위에 두고 보기에도 역겨워서 미안하지만, 종이박스에 아무렇게나 처박아 두었다. 누가 봐도 두 번 다시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혐오스러워 잊어버릴수록 좋은 그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후 십수 년 동안 나는 짐을 싸들고 집필실을 여러 번 옮겨 다녔고, 심지어 먼 시골과 도회지를 옮겨 다니기도 하였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이삿짐을 싸고 풀 때마다 이것저것 버려야 할 것이 많아졌다. 언제나 숫자를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많은 책이 골칫거리였다. 그래서 자료로 쓰겠다고 헌책방을 뒤져 손에 넣었던 책들을 가차 없이 버린 적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옮겨온 집필실에서 그때까지 온전한 상태로 보전되어 있는 이 그림을 발견하곤 소스라쳤다. 혐오감을 주는 데 전혀 손색이 없는 이 하찮은 그림을 나는 어째서 아직까지 버리지 않고 지니고 있었던 것일까. 그뿐만 아니라 그림은 방구석 자리가 아닌, 바로 내 넓은 책상 가에 버젓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놓여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림이 있을 자리를 만들어 준 셈이었다. 지금도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이 그림을 통해서 나는 희미하게나마 내 안에 끈질기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고 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회한, 그리고 인생을 살아오면서 쌓았던 분노 같은 것이 하찮게 생각하고 있었던 이 그림을 통해서 한 켜 한 켜씩 벗겨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삿짐을 쌀 때마다 내 봇짐 속을 떠나지 않도록 싸고 또 싼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강한 자에게 아부하고 약한 자에게 군림하려 했던 삶에 탐닉해, 이 매달린 죽음에 대한 단편적인 해석조차 불가능했기에 오랫동안 그림을 버리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내가 혐오스럽다거나, 두 번 다시 보기가 두렵다고 표현한 것은 이 그림이 가진 직설적인 내용 때문이었다. 채색화도 아닌 단색 드로잉인 이 작은 그림은, 색 바랜 종이 위에 ㄱ자로 목을 맨 채로 이승을 하직해 버린 젊은 남자의 모습을 연필로 쓱쓱 그어 완성했다. 이 그림이 갖고 있는 단순함, 그리고 죽음 이외에는 아무런 배경도 두지 않은 단도직입적인 구성이 시선을 이끄는 유일한 단서다.

이 하찮은 그림이 던지는 메시지는 그러나 그다지 단순하지 않다. 뒷결박이 된 채로 죽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이 죽음은 자살이 아닌 처형이란 매우 비극적인 현실을 안고 있다. 처형되었으나 공식 사형장도 아닌 린치에 의해 목숨을 버린 억울함까지 내포하고 있다. 가학적인 인간 사회가 만든 여러 가지 통제와 착취, 그리고 억압과 투쟁 속에서 살아왔다는 증거는 두 팔을 등 뒤로 돌린 결박에서 충분히 읽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맞이한 담담한 표정에서는 절망과 분노와 두려움, 박해에 대한 복수심 따위를 읽을 수 없다. 두 눈을 부릅뜨고 마지막으로 토해 내는 절규도 없다. 죽음에 임박해서 가졌을 가슴 저린 고통도 보이지 않는다. 흡사 남의 일처럼 태연하다.

이 그림이 아마추어의 그림인지 아니면 널리 알려진 화가의 그림인지 나로선 전혀 알 수 없다. 그러나 가벼운 터치로 형상화한 이 그림의 핵심은 죽은 자의 평온이 살아 있는 자와 혹은 처형을 주동한 자들의 거친 폭력과 야만성에 아무런 가치도 두지 않는 데 있다. 그리고 가물가물 사라져 가는 자신의 생명줄을 평화롭게 마무리하려는 진지함이 아득하게 바라보인다. 상실의 슬픔조차 담지 않으려는 이 그림은 바라보는 사람에게 종교적인 안도감까지 느끼게 한다. 삶의 비장함도 그의 평온한 침묵 속에 묻혀서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죽음 저편에서 기다리고 있는 새로운 세계로 귀환하려는 이 죽음의 처연한 기다림이 부럽다. 비교적 소상하게 표현된 이 사내의 표정에는 죽음에 임박해서 느꼈을 두려움도, 원망도, 뒤숭숭한 번뇌도, 복수심도 보이지 않는 평온 그 자체다.

나이가 들면, 이삿짐을 쌀 때처럼 버릴 것이 많아진다. 젊었을 때는 하찮은 것이라도 게걸스럽게 끌어안고 싶고 끌어모으고 싶었다. 그리고 빼앗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쏟았다. 심지어 남이 가진 것을 빼앗고 싶은 욕구도 참기 어려웠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리고 늙어 가면서부터는 가만두어도 제출물로 떠나가는 것이 숱하게 많아졌다. 굳이 버리지 않아도 저 먼저 수인사도 없이 떠나 버린 것들이 숱하게 많았다. 그것을 덤덤하게, 그리고 처연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나이 먹음의 상징이라는 생각이 든다. 반면에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만나지 않아도 좋다는 해방감을 누릴 수 있다. 그리고 언젠가 죽음이 내 앞으로 다가와 손바닥을 내밀 때, 종이에 연필로 쓱쓱 그어 그린 그림처럼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