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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는 변방에서 시작된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6. 4. 2. 21:21

문화는 변방에서 시작된다

입력 : 2016.03.30 03:00

땅끝마을 작은 절 미황사… 대도시에서 멀어 한때 소외
지금은 번듯한 미술관 들어서 화가들 영감의 터전으로
삶의 속도 느린 변방이 본질에 다가서기 좋기 마련

금강 스님·미황사 주지
금강 스님·미황사 주지
지난해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인천에서 미술 관련 활동을 하다가 해남으로 내려와 미술관을 운영하고 있는 이승미씨가 미황사로 필자를 찾아왔다.

"해남에 매화 보러 오라고 화가들 사십 명을 초대했습니다. 절에서 재워주고 밥도 주십시오."

마침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화가도 몇 명 있어서 반갑기도 하고, 멋진 계획이어서 그러자고 했다. 어느 봄날, 햇살이 좋아 방문을 열고 나오니 절 마당 구석구석 스케치북을 들고 그림을 그리는 어른들이 보였다. 마치 초등학생들 사생대회처럼 무질서한 광경이 비슷했고 눈빛들은 빛나고 진지했다. 이종구, 박재동, 홍선웅, 박방영 등 한국 화단을 대표하는 분들이었다.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깔고 앉아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의 모습이 신선하고 멋져보였다.

이렇게 드로잉한 600점을 모아 전시하고, 또 몇 개월 지나 작가들이 완성한 작품들을 모으니 420점이나 되었다. 해남의 명소 아홉 곳에 나누어 전시를 했다. 절집의 차실에도, 공양 장소에도, 누각에도, 유물관에도, 병원에도, 화가들 작업실에도 내걸었다. 해남 곳곳이 미술관이 됐다. 지난해 여름 내내 미술관 순례객들은 해남 곳곳을 보물 찾기하듯 누비고 다녔다. 화가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전시를 핑계로 봄에 받은 영감을 새로운 작품으로 승화하려고 몇 번이고 해남을 방문했다. 필자가 주지로 있는 미황사에는 여름에만 한문학당과 수련회 장소로 쓰며 8개월을 비워두는 자하루라는 누각이 있는데 이곳을 미술관으로 꾸몄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났다. 또다시 매화가 피었다. 화가 32명이 작품 60점을 들고 찾아왔다.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 윤석남의 '너와에 그린 무희', 소설가 윤후명의 '달마산 위를 나는 새', 민중화가 이종구의 '달마산의 만 불', 서용선의 붓끝에서 강렬하게 살아난 '미황사 대웅전', 박방영 화백의 불화로 살아난 '미황사' 등 30대부터 70대의 현대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신작이 자하루미술관에 나란히 걸렸다. 1200년 동안 가꾸어온 살아 있는 작품, 절집이 이 시대 화가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는 곳이 된다는 건 경이로운 일이었다. 이렇게 변방에서 새로운 문화의 꽃이 피어났다.

[ESSAY] 문화는 변방에서 시작된다
/이철원 기자
숲에 조금씩 화사한 봄 꽃물이 들자 벌써부터 봄 새들이 찾아와 가지 끝에 앉아 노래를 한다. 가지가지마다 물을 잔뜩 머금은 새싹의 빛들이 뽀얗다. 봄의 천변만화 속에서도 그 청정함을 천 년이 넘도록 간직하며 산사는 날마다 신선하게 살아 있다. 해남은 삶의 속도나 문화의 속도가 느린 변방이지만 계절의 변화는 가장 먼저 시작되는 곳이다. 그 계절만큼이나 문화도 변방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300년 전 해남에 공재라는 선비 화가가 살았다. 자신의 감정과 이상을 드러낸 최초의 자화상 작가로 유명하다. 관찰과 사색을 통해 사실에 기반한 그림을 그리고 서양의 원근법과 정물화를 이해하고 화폭에 담았다. 이러한 사실 정신은 실경산수나 진경산수가 조선 화단에 자리 잡도록 했고 풍속화로 발전했다. 그가 근현대 한국미술사에서 자주 거론되는 인물인 이유가 여기 있다. 벼슬을 포기하고 스스로 변방인이 되어 학문과 서화로 일생을 보냈다. 과거의 것들에서 새로운 문화를 여는 개척자 정신이 오롯이 살아 있는 삶을 산 사람이었다.

미황사는 20년 전만 해도 땅끝마을에 있는 작은 절이었다. 대도시 중심의 문화에서 소외된 문화 변방이었다. 그러나 우리 문화의 중심을 다시 들여다보면 우리 문화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은 다름 아닌 절집이다. 특히나 중심에서 비켜서 물러나 있던 미황사 같은 절이 그런 곳이다. 가까이 있으면 잘 보이지 않을 수 있으나 외지에서 온 이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가는 모양이다. 변방은 속도가 매우 느리다. 삶의 속도도 문화의 속도도 그렇다. 주변을 자세히 천천히 바라보며 음미하고,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가서 사색하기에 좋다. 우리 문화의 미래도 그곳, 사람 손이 닿지 않았던 변방에 답이 있다.

'변화와 소통이 곧 생명의 모습이다. 중심부가 쇠락하는 가장 큰 이유는 변화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변방이 새로운 중심이 되는 것은 그곳이 변화의 공간이고, 창조의 공간이고, 생명의 공간이기 때문이다.'(신영복 '변방을 찾아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