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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은 인동초이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6. 2. 14. 00:09

젊음은 인동초이다.

 

문정희 / 시인, 동국대 석좌교수

지구 온도가 상승하고 있다는 우려를 잠시 잊게 해줄 만큼 이번 겨울은 한동안 춥고 매서웠다. 날씨가 풀려가는 것 같아 어깨를 펴고 하늘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혹독한 계절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봄날의 생명은 모두 인동초(忍冬草)구나 하는 것이다. 군사 독재 시대를 거쳐 모질게 민주화의 길을 걸었던, 이제 고인이 된 유명 정치인만 인동초가 아닌 것이다.

얼마 전의 일이다. 한 젊은 기자가 간곡한 목소리로 인터뷰를 요청해 왔다. 그와는 우수 문학 도서를 추천하는 일로 한동안 얼굴을 익힌 사이인데, 이번에 다른 매체로 직장을 옮겼다며 나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것이다. 그 지면의 제목이 하필 ‘인동초’여서 잠시 갸우뚱했지만 그냥 응하기로 했다.

그와의 인터뷰는 처음엔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얘기가 깊어질수록 그는 자꾸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그가 듣고자 하는 대답이 내 입에서 나오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내가 시인으로서 경제적 가난을 어떻게 견디고 인동초처럼 살아남았는지를 듣고 싶은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리 크게 가난한 기억이 없었다. 물론 젊은 날부터 시에 매달려 살아오는 동안 나라고 왜 경제적 시련이나 가난의 한파를 겪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진실로 나는 그런 것을 한 번도 한파나 위기라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보다는 문학에 대한 좌절과 위기가 더 큰 한파로 느껴져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그의 질문 앞에 내 대답이 계속 빗나갔던 것이다.

언젠가도 고백했지만, 나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겁도 없이 결혼을 단행한 나머지 셋방조차 제대로 얻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신촌 어느 좁은 골목에서 하숙을 했었다. 부부 하숙생으로 출발한 것이다. 그래도 크게 불행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숙집 창밖으로 내리는 폭설을 보며 네 줄짜리 우쿨렐레로 하염없이 당시 유행하던 ‘부베의 연인’이나 ‘맨발의 청춘’을 켰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곤 곧 변두리 외딴 단칸 셋방으로 옮겼는데 근처 논에서 밤새도록 맹꽁이가 울었다. 그 맹꽁이 울음을 들으며 스탠드 전등 대신 기역자로 된 군용 손전등을 켜놓고 밤마다 시를 썼는데 그렇게 집중이 잘 될 수가 없었다.

전쟁이 남긴 사금파리나 탄피로 소꿉놀이를 하며 자라난 세대라 가난이나 고통에 익숙해서가 아니다. 중학교 때 4·19와 5·16을 만났고, 대학 시절 데모 때문에 계절병처럼 휴교를 치르며 최루탄 범벅이 되었던 세대여서도 아니다. 유신과 광주 민주화운동을 목격하고 절망하고 참담한 시절을 참아냈기 때문만도 아니다. 펄펄 끓는 젊음이 그 모든 것들을 그냥 이기게 했던 것이다. 그렇게 살아오며 나는 아직도 시를 쓰고 있다. 그 사실만으로 나는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이 두려운 개발과 자본의 속도와 물량 가치 속에서 돈과는 무관한 시를 쓰며 살아왔다는 것! 나는 스스로 이것이 인동초 이야기가 아니라면 무엇이 인동초인가 하고 생각한다.

한국이 외채 4위국이었던 1980년대 중반, 아이 둘을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대 대학원에 입학했다. 바퀴벌레 우글거리는 퀸스의 좁은 아파트에 살며 말 한마디 못하는 아이들을 공립학교에 집어넣고 어렵사리 대학원에 등록했다. 공부가 힘든 것은 접어 두더라도 하루는 아이들이 머리에 이를 옮아와 독한 샴푸로 머리를 감기며 기막히고 참담해서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이를 악물기도 했었다. 삶이 온통 추웠고 온통 더웠고 피폐하고 외로웠다. 맨해튼 14가 지하 남성복 가게 카운터에 서 있다가 바지를 사러온 흑인이나 남미인의 바짓단을 재봉틀로 줄여주어 판매를 돕기도 했다. 그리고 소호의 길에서 산 펑크 옷을 입고 학교에 가면 누가 봐도 나는 뉴욕에 유학 온 예술가였다. 그때 그 지하 카운터에서 손님들과 싸우며 익힌 스트리트 영어는 지금 세계 어디를 가도 겁이 안 날 만큼 당당한 힘의 근간이 되었다. 마치 이상한 연극에 출연했던 것처럼 그 시절 우드사이드 아파트와 그 지하 가게가 그립고 스스로 멋지게 느껴지기도 한다.

부동산으로 대박을 친 적도 없고, 주식으로 재산이 눈덩이로 불어난 일도 없고, 권력을 가진 적도 없고,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빚을 단숨에 갚은 경험도 내게는 없다.

아마도 그 젊은 기자는 그런 스토리 하나쯤을 들려줄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닐까. 처음에 나를 인동초로 보아준 것은 고맙지만 나는 기실 그런 인동초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인동초와 나의 인동초는 이렇듯 너무 멀고 다른 것이었는지 인터뷰 기사는 끝내 불발(不發)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최근 젊은 세대들이 말하는 3포 세대, 또는 5포 세대라는 말을 듣고 정말 놀랐다. 취업·결혼·출산, 이 3가지의 포기를 뜻한다는 3포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이 3가지의 포천(fortune·행운)이거나, 또는 파시빌리티(possiblity·가능성)를 뜻하는 것인 줄 알아 부럽기조차 했다. 그런데 포기라는 것이 아닌가. 물론 현재 우리 사회, 젊은 세대가 당면하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나 모순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포기라는 단어는 젊음에 갖다 대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젊음이 있는 한 어떤 것도 기회요, 가능이요, 밑거름이라는 것을 나는 확실히 말하고 싶다. 포기라는 단어만은 쓸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땅의 혹독한 겨울을 이겨낸 저 주름지고 늙고 피로한 인동초들의 깊은 얼굴들을 떠올려 보라. 검푸른 넝쿨마다 흰 꽃이 향기로운 인동초를 어찌 사랑하지 않고 배길 수 있으랴. 감히 나도 인동초라고 우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