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한시] 눈
입력 : 2015.12.05 03:00
눈
밤도 아닌데
봉우리마다 달이 떴고
봄도 아닌데
나무마다 꽃이 피었네.
천지 사이에는
오로지 검은 점 하나
날 저물어 돌아가는
성 위의 까마귀 한 마리!
雪
不夜千峰月
(불야천봉월)
非春萬樹花
(비춘만수화)
乾坤一點黑
(건곤일점흑)
城上暮歸鴉
(성상모귀아)
인조 연간의 문신 만주(晩洲) 정창주(鄭昌胄·1608~1664)가 지었다. 놀랍게도 이 시는 일곱 살 때 지었다. 어느 겨울날 대설이 내려 천지가 눈에 덮이자 일곱 살 난 아이는 갑자기 시심이 일어났다. 온통 눈에 덮인 설경을 어떻게 묘사해야 좋을까? 밤에나 뜨는 달이 오늘은 모든 산에 밝게 떴고, 봄에나 피는 꽃이 오
늘은 모든 나무에 활짝 폈다. 온 세상이 달빛처럼 하얗고, 꽃처럼 화려하다. 그런데 그 순백의 천지에 티끌 하나 보인다. 저물녘 자러 가는 까마귀란 놈 하나가 막 성 위를 날아가고 있다. 옥에 티처럼 하얀 천지에 찍힌 까만 점 하나! 그런데 그 점이 오히려 세상을 더 하얗게 보이게 한다. 순수한 동심에 비친 설경이 한 영재의 손끝을 통해 산뜻하게 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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