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길 따라바람따라(여행기)

진부에서 백봉령까지 / 나호열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8. 31. 10:05

 

 

 

 

 

진부에서 백봉령까지 / 나호열

 

 

 

초겨울이다. 봄나들이는 흥겨웁고 한여름 피서도 좋고 가을 단풍놀이도 제 맛이 나지만 가을과 겨울 사이에 떠나는 여행은 더없이 쓸쓸하다. 베트남 승려 틱냑한은 도회지 삶에 지쳐 교외로 빠져나가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 당신의 차에 시동을 걸기 전에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 삶에 지쳐 허덕이는 그 마음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 마음은 한 치도 나를 벗어난 적이 없으니 어디를 떠돌다 온다 한들 마음이 진정 쉬고 오는 것인가? 그래도 차에 올라 시동을 건다. 누구를 만나고 싶기 때문이다. 그 누구가 무엇이면 어떻다는 말인가? 일상을 묶고 있던 밧줄에서 멀리 벗어날수록 가장 잘 보이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이다. 오래 여행을 해 본 사람이면 알 수 있으리라. 울울한 숲 속에서, 바닷가에서, 산정에서 문득 아주 생소한, 그러나 더 없이 낯익은 자신과 조우할 때의 서러움이 얼마나 진득한 것인지를 잊지 못해 불현듯 행장을 꾸리는 법.

 

차는 가을에서 겨울로 들어가는 길로 접어들고 있다.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대관령에 이르기 전 진부에서 길을 오른 쪽에서 틀면 나전 가는 길이다. 몇 년 전 만큼 한적하지는 않다고 해도 마주치는 차들은 거의 없다. 뒤따라오는 차들도 없으니 기우는 저녁 해가 산 그림자로 길을 덮는 모습이 너무나 평화롭다. 오대산에서 발원하여 수항, 막동, 숙암리 마을을 적시고 나전에서 조양강과 만나 서해로 흘러드는 오대천을 왼쪽 옆구리에 끼고 나전까지 30킬로가 넘는 길을 맨발로 뛰고 싶다. 심장이 쏟아질 듯이 타들어갈 때까지 달리고 또 달리고 싶다. 몇 년 전이었던가, 이 길을 거꾸로 거슬러 온 적이 있었다. 정동진에서 백봉령을 넘고 아우라지를 거쳐 진부로 빠져나가는 길, 폭염이 수그러들지 않는 8월 이었다. 나전에서 길을 틀자 마자 눈에 들어온 오대천은 마치 비단길처럼 부드럽게 흘러내려 홀연히 그 속에 빠져들고 싶은 충동마저 일었었다.

 

빈 손을 내민다/ 나전에서 봉평가는 길에서 마주 친 물길/하늘 끝자락을 잡아당기자 속살 깊이 그려낸 몇 필의 비단/ 그저 끝없이 풀려나가 풀려나가 그곳에 뜬금없이 무늬지고 싶어도/생살로 또렷이 파고드는 꽃말 / 슬픔은 구절구절 꺾이고 /젖혀지는 길 밖에 있다.

졸시 - 「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 1」 중에서-

 

그렇다. 달리고 싶은 충동은 저 길 밖으로, 저 강물을 넘어서 있는 실존의 근원적 슬픔을 만나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로 설 수 밖에 없음을 약속받고 싶기 때문이다.

 

정선, 잊혀지고, 스스로 소외받으며 살아온 사람들의 땅, 그리하여 천 수가 넘는 아라리를 풀어내고 흘러가는 강물조차 아라리 같은 북면 면소재지 여량리에 닿은 것은 거의 해가 져가는 무렵이었다. 한여름에는 밧줄을 당겨서 강을 건너는 함지박 배를 탈 수 있는데 추수가 끝날 무렵이면 임시 다리를 놓아 여량리와 구절리 쪽을 도보로 오갈 수 있다. 다음 해 홍수가 져서 다리가 떠내려갈 때까지 놓이는 다리. 굳이 견고하게 만들지 않음은 떠날 것은 떠나야 하는 자연의 섭리를 외면하지 않는 이곳 사람들의 진경인가. 내친 김에 아우라지 처녀상이 보이는 정자에까지 올라가 본다. 비극적 일수록 아름다워지는 전설, 젊은 부부와 서너 살짜리 남매, 배낭 하나씩 걸쳐 매고 다리를 건너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울컥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기차를 타기 위하여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는 저 서울 사람들, 저 어린 아이들의 가슴 속에 오늘은 어떤 추억으로 남아 있을 것인가

 

그들은 아름답다. 그 흔한 승용차을 거부하고 초겨울의 알싸한 바람을 맞으며 여정을 꾸려가는 그 건강함과 그 도보의 수고로움이 한 마디의 살겨운 대화를 나누지 않았어도 나에게는 힘이 된다. 기쁨이 된다.

 

차는 어느덧 임계를 거쳐 백봉령 고개를 넘어가고 있다. 강원도 고갯길은 밤이 좋다. 삽당령, 운두령, 싸리재, 비행기재 천 미터 가까운 고갯길을 넘다보면 육질 좋은 고기맛 같은 짙은 어둠과 만날 수 있어서 좋고 날이 좋으면 그 무엇보다도 하늘을 잡아 당길 수 있어서 좋다. 바로 머리 위에서 반짝이는 별들은 손을 뻗치면 손에 물기를 가득 담은 채로 뚝뚝 떨어져 내린다. 어디에서 이만큼 많은 별을 가슴에 담아둘 수 있을까? 내일 새벽이면 동해의 일출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수평선 저 너머에서 솟구쳐 오르는 해가 지금 이 밤의 무수한 별들을 태우는 것은 아닌 지 잠깐 생각을 놓아 본다. 늦었다고 어디 이 한 몸 누일 곳이 없으랴! 마음 속에서는 벌써 차의 시동을 껐다.

 

冬柏

 

찬 서리 기운을 받아야 붉어진다지

남들과는 한 자리에 어울리기 싫어한다지

한꺼번에 무너지고 만다지

어디 그것이 남의 마음이던가

한 밤을 새워

님에게 편지를 쓰다

못내 부끄러워 눈 들어 보니

아, 저기

수평선 저 너머에 작은

점점 커지는 불덩이가

동백 꽃 봉오리가

푸른 꽃대에 받쳐져 올라 오더니

울컼울컥 붉어지더니

수 만 송이의 동백꽃으로 찬란히

떨어지더니

해 뜨지 않은 곳 그 어디에 있으랴

 

'길 따라바람따라(여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물머리에가다  (0) 2015.04.18
내성천, 강물에 대한 예의   (0) 2013.09.23
전쟁과 평화의 길을 가다  (0) 2012.06.20
사라짐과 잃음의 경계에서  (0) 2011.02.05
얼굴과 석탑   (0) 2011.0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