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길 따라바람따라(여행기)

사라짐과 잃음의 경계에서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1. 2. 5. 01:17

 

사라짐과 잃음의 경계에서

- 목계 장터

나호열

 

 

 목계장터는 없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목계는 있으되 장터는 사라졌다. 나루터가 있던 자리는 밭으로 변했고 강을 오르내리고 강을 건너던 배 대신 긴 콘크리트 다리가 가로질러간다. 야은 길재는 나라가 망하고 충절을 지키는 신하가 없음을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다"고 한탄했지만 산천도, 사람도 너무 빨리 변하는 요즘의 세태는 목계를 시(詩)에서나 만나는 추억일 뿐이다.

가을도 빨리 지나가 버리고 성큼 겨울비가 내릴 때 한 두 시간쯤 동네 어귀에서 서성거릴 만한 곳이 목계이다. 시인 신경림의 시 「목계장터」는 사라진 사람들의 삶의 공간과 풍요와 실용의 가치를 얻는 대가로 아쉬움 없이 잃어버린 인간의 순수한 열정을 증언하는 시이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창작과 비평사에서 1979년에 간행한 시집 『새재』에 수록된 시 「목계장터」는 「농무」와 더불어 민중적이고 토속적인 정서를 읊은 신경림의 대표시가 되었지만 정작 신경림 시인의 고향은 목계가 아니라 현재 충주시 노은면 연하리이다. 장석주가 쓴『나는 문학이다:장석주, 신경림편』에 의하면 1947 년 초등학교 4학년 때 신경림은 당숙을 따라 낙원의 이미지로 나오곤 하던 목계에 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공책에 그 때의 인상을 적었다고 하는데, 시기적으로 보아 구전(口傳)되던 목계장터의 흥청거림은 그가 목계에 갔을 때에는 이미 과거로 흘러가 버린 이야기에 불과했을 것이다.

 

 충주에서 38번 국도를 따라 제천으로 가다보면 남한강을 건너는 목계교가 있다. 다리 저편은 엄정면 목계리, 이쪽은 가금면 가흥리와 장천리이다. 다리가 놓이기 전 이곳에 있던 목계나루는 남한강 뱃길에서 가장 큰 포구 가운데 하나였다. 목계나루는 서울과 충주 사이에 충북선 철도가 놓인 1930년대 이전까지 남한강 수운의 중심이었다. 쌀이나 소금 등을 실은 배가 수시로 드나들었고, 배가 들어와 강변장이 설 때면 각지에서 장꾼과 갖가지 놀이패 등이 몰려 난장을 벌이고 북새를 이루었다고 전한다. 이렇게 성하던 곳이니만큼 한해 뱃길이 무사하고 장이 잘 되기를 비는 별신제도 해마다 크게 치러졌으며, 그 과정에서 줄다리기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처럼 목계나루가 성황을 누린 데는 가흥창이 큰 몫을 했다. 가흥창은 지금 목계교가 있는 데서 하류로 조금 더 내려간 강가에 있던 조창으로 세조 11년(1465)에 설치되어 개항 전까지 존속하였다. 남한강을 이용한 수로교통이 편리한 중원에는 일찍이 고려시대부터 세곡을 운송하기 위해 12조창의 하나로 덕흥창이 설치되었고 여기에 곡식 200섬을 싣는 배 20척이 배치되었다. 덕흥창은 조선 초기에 경원창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세종 때 다시 덕흥창이 되었으며 세조 때 창터를 가흥역 근처로 옮긴 후 가흥창으로 불리게 되었다.

 

태조 때부터 영조 때까지 가흥창에서는 충청도 일대 뿐 아니라 경상도 각 읍에서 거두어 들인 세곡의 수납을 담당하였다. 가을걷이가 끝난 후 가흥창에 수납된 세곡은 봄에 얼음이 풀리면 남한강 물길을 따라 서울의 용산창까지 운반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강가에 그냥 곡식을 쌓아두었으나 중종 16년(1521)충청도 관찰사 이세응이 부근의 폐사를 헐어 창고 건물을 지었는데 1879년에도 70여 칸의 목조창고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충주에 철도가 놓이면서부터 목계나루는 점차 생기를 잃었고 1973년 콘크리트 다리가 놓이면서 나룻배의 모습마저 사라졌다. 가흥창터는 밭으로 변해버렸고 목계나루의 옛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것은 목계교 남쪽 둔덕에 조금 남은 솔밭뿐이다. 이곳은 목계나루가 북적거리던 시절에 뱃사공과 행인들이 쉬어가던 곳이라고 한다.

 

                                                        - 경희대학교 중앙박물관 답사 자료집에서 발췌 -

 

 위의 글을 읽어보면 시「목계장터 」는 유년기에 이상향으로 자리 잡았던 과거의 흥성과 쇄락이 시인의 고단한 삶과 연루되면서 탄생한 절창이라고 생각된다. 인간을 둘러싼 희노애락은 그들이 발 붙이고 사는 땅과 더불어 생멸을 거듭한다.

 

 이 때 내게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이 증오심뿐이었다. 이 증오심만이 나를 지탱해주고 있었다. 나는 모든 사람을 미워했다. 잘 사는 사람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학식있는 사람을 미워했다. 가난한 사람을 미워하고 무지한 사람을 미워했다. 더욱 미워한 것은 시인들이었다. 나는 이들의 성실성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얘기는 전부가 거짓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이것이 다분히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로서 이들에 대하여 갖는 질투심에 연유함은 물론이었다.

 

                                                                         - 신경림 「내 인생의 책」동아일보 1999. 4. 30

 

태생이 맑고 부드러운 사람도 있겠으나 삶의 완숙을 결정짓는 것은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인간을 부정하고 또 부정한 환멸 끝에 새살로 돋아 오르는 인간애를 오롯이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일 것이다.

 

사라진 목계장터는 신경림에 의해, 그의 시 「목계장터」에 의해 부활을 꿈꾸고 있다. 2006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추진하던 '문화역사마을 가꾸기 사업'에 '충주 목계 문화·역사마을 가꾸기 사업'이 선정되어 사업비 15억이 투입되어 목계1구·2구 마을회관 리모델링과 증축, 목계문화전승관 등 기반시설과 주민교육, 목계블라스밴드 복원, 향토음식(갖채) 개발 등 주민 역량강화사업, 홈페이지 구축, 안내판 설치, 간판교체, 인포맵 제작, 안내 책자발간, 마을로고와 달력 발간 등의 사업을 2009년 11월까지 마무리한다고 한다.

 

그래도 여전히 쓸쓸함과 아쉬움은 남는다. 경제력이 튼튼해지고 과거 역사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음은 틀림이 없지만 서울로 내려가던 돛단배와 장터를 서성거리며 삶을 이어가는 장삼이사들의 눅눅한 삶까지 복원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낱 눈요깃거리, 추억거리로 사람들이 몰려들어 목계사람들의 입거리가 분주해질지는 모르지만 사라진 것은 다시 더 깊이 사라지고 잃어버린 것은 더 많이 잃어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말이다.

 

목계에 잠시 머무르다 발길을 되돌리다 보니 충주시 이류면에 닿는다. ?충주이류면 야철유적 지표조사보고서(忠州利柳面 冶鐵遺蹟 地表調査報告書)?(1996)에 의해 본격적으로 충주지역의 鐵 産地에 대한 조명이 이루어지고 고려사, 세종실록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에 알려져 있었으나 유적의 성격이나 규모 등이 확인되지 않았었던 충주 ‘다인철소’가 1998년 중원문화재연구원이 발굴 조사한 결과 제철소인 야철 유적과 관련시설 및 유물 등이 확인되었다.

 

다인철소의 중심지로 전해져오는 노계마을도 목계처럼 바람처럼 흘러가는 나그네에게는 한촌에 불과하지만 땅 밑에 숨어 있는 역사는 숯가마, 공방터, 조선시대 민묘들로 증언되고 있고 역사서에 언급되지 않은 대몽항쟁전투는 고려사 지리지 충주목에 “고종 42년(1255) 다인철소 사람들이 몽고병을 막아내는데 공로가 있어서 소를 익안현으로 승격시켰다”는 기록으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1254년 9월 차라대(車羅大)가 이끄는 오 천의 기마병은 말굽의 교체를 위해서는 철소의 점령이 급박 했는바, 이를 간파한 다인철소민들이 인근의 유학산성(游鶴山城)에 올라가 항전하여 몽고군을 격퇴함으로써 몽고군의 남진을 저지했던 것이다. 변변한 무기도 없이 훈련받지 않은 민병(民兵)으로 수적 열세와 장비의 부족함을 극복하고 몽고군을 격퇴한 것은 개인의 명리를 도모함도 아니고 부귀를 얻고자 함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렇게 싸웠고 역사 속에 아무 말 없이 사라져 갔다.

 

이미 사라진 것은 다시 되돌릴 수 없다. 그러나 다인철소의 중요성 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다인철소의 사람들이다. 이 세상의 낮은 곳에서 천대받으며 험한 일을 하며 살았어도 그들은 입으로 애국을 떠들지 않고 몸으로 애국을 증명한 사람들이다.

 

역사를 과거의 일로 치부해 버리고 이웃나라들이 그들 나라의 주체성과 정체성을 후대에게 내려주기 위해 역사왜곡을 서슴치 않는 마당에 우리는 피와 땀으로 점철된 우리의 역사를 홀대하는 이상한 풍조에 휩싸여 있음은 누구를 탓할 일인가!

 

 

 

'길 따라바람따라(여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부에서 백봉령까지 / 나호열  (0) 2013.08.31
전쟁과 평화의 길을 가다  (0) 2012.06.20
얼굴과 석탑   (0) 2011.01.25
서천 가는 길   (0) 2011.01.18
1999년 여름 백담사 / 나호열  (0) 2011.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