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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한승원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2. 12. 19. 14:53

소설가 한승원

 

남도 끝자락 토굴에서 바다가 낳은 分身들과 놀고 있다

남해를 떠돌다 숨어든 바다를 기꺼이 품고, 땅의 기운이 흘러 닿은 곳. 민물과 짠물이 몸을 섞어 끊임없이 생명을 잉태하고, 질펀한 삶이 속살을 드러내는 남도의 자궁 같은 곳, 장흥반도에서 득량만에 이르는 바다가 바로 그런 곳이다. 바다를 바라보고 천관산, 제암산, 사자산, 억불산 등 명산들이 호위하듯 늘어서 있다. 소설가 한승원(73)은 그 바다에 탯줄을 묻었다. 1968년 ‘대한일보’에 소설 ‘목선’이 당선되어 등단한 이래 40여년, 고향의 바다와 갯벌은 한승원 문학의 텃밭이었다. “내 소설의 9할은 고향 바닷가 마을의 이야기”라는 그의 고백처럼 그의 뼛속까지 바다와 갯벌의 삶이 새겨져 있다. 고향의 바다 냄새가 닿지 않은 도시생활은 그의 몸을 지치게 만들었다. 심장은 엇박자로 뛰고, 비릿한 갯내음에 익숙한 그의 위장은 도시의 음식을 거부했다. 몸의 병만큼 마음의 고통도 깊어졌다. 고향의 바다를 보면 부정맥도 위장병도 씻은 듯이 나을 것 같았다.
   
   50대 중반, 17년 서울살이에 마침표를 찍고 ‘어머니의 자궁’ 같은 고향 바다로 되돌아왔다. 고향을 떠난 것이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 진학하고부터이니 35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서울 광화문에서 정남진(正南津), 물리적인 거리만큼 문단에서도 사람들의 관심에서도 멀어짐을 감당해야 하는 길이었다.
   
   전라남도 장흥군 안양면 율산마을, 득량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토굴’을 마련하고 지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실제 거처가 ‘토굴’은 아니지만 스님이 수행하듯 글쓰기에 몰두하겠다는 그의 의지를 담아 자신의 호인 해산을 붙여 ‘해산토굴(海山土窟)’이라 이름 지었다. 해산토굴을 방문한 한 스님이 현판을 보고 농담을 하더란다. “날마다 해산(解産)을 하겠구먼요.” 나이 들어서도 작품 활동의 속도를 늦추지 않는 그가 이곳에서 해마다 새로운 소설을 생산하고 있으니 틀린 말도 아니다. ‘포구의 달’ ‘해산 가는 길’ ‘아제아제바라아제’ ‘화사’ ‘사랑’ ‘초의’ ‘키조개’ ‘다산’ ‘추사’ 등 소설을 비롯해 시집, 수필집, 동화책에 이르기까지 그가 40여년간 펴낸 책이 80여권에 이른다. 그는 대표적인 ‘다산(多産)’ 작가로 꼽힌다.
   
   
   해산토굴 가는 길
   

▲ 장흥군에서 지어준 한승원문학학교.

 

장흥 읍내에서 해산토굴로 가는 길, 오른편 산 중턱에 큰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가 고향에 진 빚을 갚는 마음으로 썼다는 소설 ‘피플 붓다’(2010년)의 배경이 된 억불산(憶佛山)이었다. 그의 소설 속을 달리고 있는 것처럼 장흥의 풍경들이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율산마을 입구에는 ‘해산토굴 가는 길’이라고 쓰인 커다란 안내석이 서 있다. 장흥군에서 방문객의 길 안내를 위해 세워놓았는데, 간혹 젓갈 삭히는 토굴로 오해를 하고 “새우젓 안 파느냐”면서 불평을 뱉고 돌아서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해산토굴은 70여가구가 사는 마을의 맨 위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토굴 입구에 서 있는 비석이 낯선 방문객을 막고 나섰다. 비석에는 ‘당신의 출입이 저의 글쓰기를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토굴주인 아룀’이라는 글귀가 써 있다. 예고 없이 작가의 작업실을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많아 세워둔 것이란다. 붉은 기와를 얹은 작업실은 지붕이 높은 것 외엔 특별해 보일 것이 없다. 바닷바람이 울타리를 대신하고 있는 대나무를 흔들고, 처마 끝에 매달아놓은 풍경을 건드리고 지나갔다. 풍경이 귀를 씻어 주듯 맑은 소리를 냈다. ‘해산토굴’이라고 쓰인 나무현판 밑의 문을 열고 작가 한승원이 나왔다. 그의 얼굴은 맑고 건강해 보였다.
   

▲ 한승원 문학의 텃밭인 득량만이 내려다보이는 장흥 율산마을.


   토굴로 들어서자 입구부터 신문·책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바닥에도 돋보기며 신문, 편지들이 제멋대로 널려 있다. 그가 바닥에 있는 신문을 보며 “올해 신춘문예 당선 작품들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고 말했다. 토굴은 거실과 집필실을 비롯한 작은방 두 개, 화장실이 전부. 글쓰기에 필요한 것 외에는 일절 장식도 가구도 없이 단출하다. 빈 공간은 모두 책꽂이가 차지하고 있다. 집필실로 쓰고 있는 작은 방은 거실에서 서너 계단 위에 올라가 있다. 그가 “집 짓는 사람이 괜히 멋을 부린다고 계단을 만들어 오르내리기만 불편하다”고 말했다.
   
   집필실에는 책장과 구형 컴퓨터 모니터가 놓여 있는 낡은 책상뿐이다. 그나마 글쓰기 외에는 관심도 없고 시간을 나눌 생각도 없는 주인 덕분에 곳곳에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다. 모니터 가장자리며 책상 옆, 책꽂이 등 빈 공간엔 메모지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메모지엔 문서 작성 등 컴퓨터 사용법부터 작품과 관련된 정보들이 빼곡히 적혀 있다. 이 작은 공간에서 문단에 ‘한승원’이라는 한 세계를 구축한 작품들이 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곳을 ‘공장’이라 불렀다. 집필실도 어질러져 있기는 마찬가지. 이곳저곳 책들만 뒹굴고 있는 공간은 진짜 ‘토굴’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소설 속 주인공들과 하루 종일 놀지!”
   

▲ 해산토굴 뒤에 손수 일군 차밭.


   “원체 정리하는 데는 취미가 없어서…, 그나마 온다고 해서 아침에 힘들게 치운 거요.”
   
   그가 겸연쩍게 웃으며 녹차를 내놓았다. 녹차는 집 뒤에 그가 일군 1983㎡(600여평)의 차 밭에서 직접 수확하고 덖은 것이라고 했다. 정남쪽을 향하고 있는 거실 창호지 문을 열자 시선을 막아서는 것 하나 없이 바다가 내려다보였다. 바다 건너편으로 보이는 고흥반도 끝자락과 소록도, 거금도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이곳이 원래 그의 고향은 아니다. 서쪽으로 30여분 더 달려 회진면 회진리 맞은편에 있는 덕도라는 섬이 그의 고향이다. 지금은 연륙교로 연결이 돼 있고 제주행 배가 떠나는 노력항이 근처다. 회진리 옆에 있는 진목리는 소설가 이청준이 태어나고 묻힌 곳이다.
   
   그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덕도와는 떨어져 있지만 ‘해산토굴’ 터가 마음에 들어 진즉부터 점찍어 뒀었다. 주인이 땅을 안 팔아 마을 가운데에 살림집을 먼저 짓고 살다가 3~4년 늦게 ‘해산토굴’을 지었다. 토굴 뒤 차밭은 대밭이었다. 부인(임감오·71)과 함께 대나무를 뽑아내고 밭을 일군 후 차나무 씨앗을 심었다. ‘병아리 키우듯’ 작은 싹부터 키운 차나무가 올해로 여덟 살이 됐다. 인위적인 재배가 싫어 내버려둔 차나무는 어른 허리 높이만큼 자라 있다. 차밭을 위해 움직이는 일은 봄에 무섭게 번식하는 죽순을 솎아내는 일뿐이다. 차밭 중간중간에 일부러 남겨 놓은 대나무가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다.
   
   “이게 바로 대나무 이슬을 먹고 자라는 죽로차예요. 자연이 알아서 다 키워주니 그야말로 유기농이죠. 이제 다른 차는 못 먹어요.”
   

▲ 한승원이 자신의 무덤이라고 마당에 만들어 놓은 삼층석탑과 석상.

 

이태백은 마음이 흔들리면 술을 마시지만 나는 차를 마신다. 차를 마시면 슬픔과 우울에서 깨어난다. 차는 깨달음을 낳는 자궁이다.’ 그가 어느 책에선가 차에 대해 쓴 글이 생각났다. 대밭 자리여서인지 지네가 들끓어 고생을 했다. 지네에게 몸 보시를 한 이야기는 글로 쓰이기도 했다. 이곳의 소소한 일상들은 모두 그의 작품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매일 오전 6시에 일어나 아침밥 먹기까지 1~2시간, 아침밥 먹고 1~2시간 작업을 한다. 오후엔 주로 낮잠을 자고 따뜻한 날엔 바닷가로 산책을 나간다.
   
   질문에만 대답하며 말을 아끼던 그가 창가에 놓인 난 화분 쪽으로 다가갔다.
   
   “난이 땀 흘리는 것 봤어요? 이게 난이 사력을 다해 꽃을 피우느라 흘린 땀이 굳어진 거예요. 보석 같죠.”
   
   이슬이 맺혀 있는 것 같은 동양란 꽃대를 보여주며 그는 아이처럼 얼굴이 환해졌다.
   
   “양란 뿌리 올라온 것 좀 봐요. 내 혼령이 공중에 떠다니면 빨려 들어갈 것 같아.”
   
   적적하지 않으냐는 물음에 “내 소설 속 주인공들하고 사느라 심심할 틈이 없다”고 하더니 보잘것없는 나무뿌리 하나도 소설가에게는 무한한 상상의 세계가 되는 모양이었다.
   
   
   “미쳐야 한다”
   
   책장 옆에 놓여 있는 그림 한 점이 눈에 띄었다. 장흥 출신의 한국화가 김선두(54·중앙대 교수)의 작품이라고 했다. 메모판으로 쓰라면서 유리 액자를 만들어준 것이란다.
   
   ‘광기(狂氣)’.
   
   유리판에 낙서처럼 휘갈겨 써놓은 단어가 궁금했다.
   
   “미치지 않으면 안 돼요. 미친 듯 글을 쓰자는 생각으로 늘 가슴에 담고 있지.”
   

▲ 해산토굴 앞에 예고 없는 방문객을 막는 비석이 서 있다.

 

최근 2~3년 그가 펴낸 소설을 보면 미친 게 맞다. 2010년 자전적 소설인 ‘보리 닷되’에 이어 ‘피플 붓다’를, 지난해 3월엔 역시 항구와 포구를 배경으로 한 장편 ‘항항포포’를 펴냈다. 완성해 놓은 소설도 두 편이다. 판소리에 대한 이야기와 전봉준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 출간 대기 중이고 올 봄엔 시집도 한 권 낼 예정이다. 젊은 작가들도 따라오기 힘들 만큼 왕성하다.
   
   알려져 있다시피 ‘글쟁이’의 유전자는 아들, 딸에게로 이어졌다. 그는 가장 큰 효도는 “業을 잇는 것”이라고 말했다. 소설 ‘유령’을 펴낸 한동림(44)이 큰아들이고, 소설가 한강(42)이 딸이다.
   
   딸은 아버지에 이어 ‘이상문학상’ ‘한국소설문학상’을 수상, 부녀가 같은 상을 받는 기록을 남겼다. 사위 홍영희씨도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는 등 대표적인 문학가족이다. 남매는 1995년, 1996년 잇달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한강은 최근에 장편 ‘희랍어 시간’을 펴냈다. 그에게 딸의 소설을 어떻게 읽었느냐고 물었더니 한마디로 끝내고 만다.
   
   “너무 어려워.”
   
   서로의 색깔이 다르니 남매에게 작품에 대해 말을 보탠 적은 없다. 아버지의 큰 그늘이 남매에겐 부담일 것이었다. 그는 단지 아이들이 치열하게 글쓰기를 바랄 뿐이다. 한길을 걷는 아이들에게 앞서서 걷고 있는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치열함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말한다. “살아있는 한 글을 쓰고, 글을 쓰는 한 살아있을 것”이라고.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글을 쓰고 뼈를 묻을 생각이다.
   
   
   “여기가 바로 내 무덤”
   


   “여기가 바로 내 무덤이오.”
   
   그가 마당에 있는 삼층석탑을 가리켰다. 근처 보림사의 삼층석탑을 축소해 만들었다고 한다. 석탑 앞에는 상석(床石)도 만들어 놓았다.
   
   “아이들한테도 나 죽으면 화장해서 저 바다에 뿌리고 나머지는 이 석탑에 보관하라고 일러두었어요. 앞에 묘비도 만들어두었어요.”
   
   상석 옆 시비에는 그의 시 ‘나무’가 적혀 있었다.
   
   “푸른 우듬지 하늘로 쳐들고 있는 나무 근본 진리에 귀의한다는 뜻을 천축나라 왕자가 ‘나무南無’라 말하라 했는데 나는 나 없음의 ‘나무我无’라 소리냅니다. 나 이르고 싶은 곳 어딘지 아십니까. 푸르른 내 고향 하늘太虛입니다.”
   
   죽어서도 고향의 하늘에 이르고 싶다는 그를 위해 고향 장흥군은 ‘해산토굴’ 바로 밑에 토굴보다 훨씬 큰 한승원문학학교를 세웠다. 그곳엔 그의 시 제목을 따서 ‘달 긷는 집’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1년이면 1500여명이 와서 그의 문학 강의를 듣고 간다. 군은 또 해산토굴에서 바로 내려다보이는 여닫이 해변길에 한승원 산책로도 만들었다. 600m의 산책로를 따라 20m 간격으로 그의 시가 적힌 시비 30여개가 이어진다.
   
   그와 함께 산책로로 나갔다. 남도의 겨울바람도 꽤 매서웠다. 산책로와 나란히 아름다운 곡선을 자랑하는 해변이 이어졌다. 그가 ‘꼬마 나폴리’라고 자랑했다. 해변엔 그의 소설 속에서 튀어나온 넓은 갯벌이 싱싱하게 살아 숨을 쉬고 있었다. 그에게는 돈으로 쌓아올린 거창한 집이 필요없어 보였다. 그 바다가, 그 갯벌이 그를 품고 키워준 어머니의 자궁이자 그의 영혼이 숨 쉴 수 있는 집이기 때문이다. 그 집에서 그는 오늘도 갓 건져 올린 싱싱한 언어들로 삶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