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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혹은 시적인 것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2. 2. 26. 12:34

 

시 혹은 시적인 것

강동우(한양대교수)

 

 

1. 들어가며

 

최근에 읽은 시부터 하나 소개하자.

 

인도 동부 서벵골의 한 마을에서 코끼리가 주민들을 잡아먹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농촌마을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한 야생 코끼리들이 종종 출현하는 곳. 힌두교에선 가네사(코끼리신)가 존재할 정도로 코끼리는 성스러운 동물로 추앙받지만, 논밭을 망치는 등 피해를 끼치는 코끼리들은 골칫덩이가 된 지 오래였다.

 

마을주민들은 고민 끝에 사냥용 총으로 코끼리들을 마을에서 몰아냈다. 이 과정에서 어미 코끼리 한 마리가 사살됐는데, 놀랍게도 부검을 해보니 사람을 잡아먹은 흔적이 발견됐다. 코끼리 위에 아직 소화되지 않은 17명의 DNA가 검출된 것.

 

동물학자 데이브 살머니는 “이상기후와 폭발적인 인구증가로 서식지가 파괴되면서 상대적으로 쉬운 먹잇감인 인간들을 공격했을 수 있다.”고 추측했다.

 

마을 사람들은 문제의 어미 코끼리가 새끼를 사람들 손에 잃은 뒤 식인 코끼리로 돌변해 인간들을 공격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코끼리의 지능지수는 3살 아이들과 비슷한 50~70수준.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기준일 뿐이며, 제 새끼를 학대한 사육사의 얼굴을 기억했다가 10년 뒤 사육사를 공격한 어미 코끼리가 있었을 정도로 남다른 모성애를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방송은 “지난해 인도의 한 마을에서는 벵갈 호랑이가 주민 14명을 잡아먹은 일도 있었다.”면서 “환경을 파괴해 동물들을 궁지로 내모는 인간들의 이기심이 동물들을 괴물로 만드는 건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고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강경윤 기자 newsluv@seoul.co.kr

기사일자 : 2011-02-23

-「유괴된 내 딸의 혼은 초록색 벽을 뚫고 시간이 없는 곳을 향해 걷고 또 걷고 있다… 나는 너희들에게 학대받을 이유가 없다」 전문

 

 

 

맨 먼저 드는 의문. 과연 이것을 ‘시’라고 할 수 있는가. “서울신문 나우뉴스 강경윤 기자”의 기사문을 그대로 옮겨 놓고 제목 「유괴된 내 딸의 혼은 초록색 벽을 뚫고 시간이 없는 곳을 향해 걷고 또 걷고 있다… 나는 너희들에게 학대받을 이유가 없다」만 따로 붙였을 뿐이다. 물론 제목과 기사문의 내용을 연관지어서 세밀하게 그 의미를 파악할 수도 있다(실제로 제목만으로도 충분히 시적 효과를 지닌다). 바흐친은, 소설은 시나 희곡과 같은 다른 문학 장르를 흡수하고 병합시키는가 하면 심지어는 편지나 일기와 같은 비문학적 장르를 흡수하고 병합시킨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소설화된 장르들은 형식 면에서 자유롭고 융통성이 있으며 언어의 사용에 있어서도 비문학적인 언어를 사용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재학은 소설이 아니라, 시에 다른 문학 장르나 비문학적 장르를 흡수하고 병합시킨다. 이러한 작업을 설명하는 데에 크리스테바의 주장은 눈여겨 볼 만하다. 크리스테바는 “모든 텍스트는 마치 모자이크와 같아서 여러 인용문들로 구성되어 있다. 모든 텍스트는 어디까지나 다른 텍스트들을 흡수하고 그것들을 변형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이른바 상호텍스트성이다. 일반적으로 상호텍스트성은 주어진 어느 한 텍스트가 다른 텍스트와 맺고 있는 상호 관계를 의미하지만, 크리스테바는 상호텍스트성을 한 문학적 체계에서 다른 문학적 체계, 이보다 한 발 더 나아가 비문학적 체계에서 문학적 체계로 전이되는 기호적 과정의 일부로 파악한다. 이런 점에서 정재학의 시는 주어진 텍스트를 다른 기호 체계,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비문학 체계와 문화 일반까지 포함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정재학의 작품은 어느 한 텍스트가 한 문화의 다양한 언어나 의미 행위와 맺고 있는 관계, 그리고 그 문화의 가능성을 표현하는 텍스트들과 맺고 있는 관련성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

 

그러나 내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이런 관련성과 의미가 아니라, 이 작품이 ‘시’라는 문학적 제도를 정면으로 비판하며, 근본적으로 시의 본질을 탐구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시의 본질은 무엇인가.

 

2. 시의 본질

 

1990년대 중반 이승훈과 최동호의 ‘시와 시적인 것’에 대한 논쟁이 있은 후 2000년대 초반부터 우리 시단에서 시의 본질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전개되었다. 견고한 모든 것이 문화로 수렴되었던 1990년대의 급격한 문학 지형의 변화를 거쳐 2000년대로 진입한 우리 시의 모습이 ‘시 혹은 시적인 것’의 전통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시란 무엇인가 또는 시는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은 너무도 당연한 과정이 아닐 수 없다. 즉 시의 본질을 둘러싼 다양한 논의는 2000년대 우리 시가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현실적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문제제기가 감각의 과잉이 만들어낸 젊은 시단의 미학적 실험들을 현상추수적으로 해석하려는 의도를 지나치게 부각시킨 사실이 없지 않은 측면도 있다. 그 결과 한편에서는 시의 본질에 대한 의미를 의도적으로 축소하거나 왜곡함으로써 ‘변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서의 본질을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시대착오적인 논리로 폄하하고 있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시 혹은 시적인 것의 본질은 무엇인가.

 

여기서 가정할 만한 사실은 영미와 대륙(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등)의 입장이 다를 것이고, 중국과 일본, 한국의 입장이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시의 전통에서 시는 주로 ‘서정시’로 각인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시의 본질에 대해 기본적으로 ‘서정’을 노래한다는 점에서는 일면 공통되어 보이기도 한다. 문제는 ‘서정이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서정’의 문제는 단순히 전통서정시에서 말하는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이라는 주체 중심의 시학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1) 서정과 모더니즘의 본질 문제

 

서정의 본령이 있을까. 없다. 물론 극단적이긴 하지만, 이때 없다는 것은 그 실체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규정할 수 없다는 말이다. 우선 이 질문에서 우리는 서정의 문제와 서정시의 문제를 분리해서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흔히 우리는 서정과 서정시를 동일한 범주에 두고 논의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서정’이라는 용어와 ‘서정시’라는 용어는 엄밀하게 별개로 다루어져야 할 개념들이다. 우리가 두 용어를 특별한 구분 없이 사용하는 것은 서정시의 본질적 속성을 추상화한 것이 ‘서정’이라는 용어로 집약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비단 ‘서정’만이 아니라 ‘모더니즘’에 대한 한국문단의 이해 역시 마찬가지이다.

 

모더니즘의 본령이 있을까. 역시 없다. 물론 여기서도 규정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특히 모더니즘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르고 지역에 따라 다르다. 더군다나 모더니즘은 전적으로 서구의 개념이었다. 그것이 한국적 상황에서는 때로는 이미지즘으로 때로는 신고전주의(주지주의)로, 때로는 초현실주의나 다다와 같이 아방가르드까지도 포함한다. 그러다보니 모더니즘은 때로는 순수시를 지칭하기도 하고 때로는 해체시나 반시적인 시들까지 포함하기도 한다.

 

물론 서정을 ‘전통’의 등가물로, 모더니즘을 ‘새로움’ 혹은 ‘반전통’의 등가물로 등치시켜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긴 하지만, 저간의 사정을 보면 막연하고 혼란스럽지 않을 수 없다. 서정=서정시=전통, 모더니티=모더니즘시=새로움 등의 등식과 개념혼란은 종종 ‘서정’과 ‘모더니티’가 양 극단에서 서로 대립하고 있는 개념으로 오해되기도 한다. 이런 오해의 원인은 서정시가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을 그 원리로 삼고 모더니즘시가 주객 분리나 차이를 강조하는 데서 연유한다.

 

그러나 나는 서정과 서정시를 분리해서 이해해야 한다는 입장이고, 모더니티와 모더니즘의 이해도 마찬가지다. 특히 ‘서정’은 모든 시에서 나타나는 속성이라 생각한다. 즉 서정시뿐만 아니라 모더니즘 시에도 서정은 그 바탕이 된다. 문제는 ‘서정’이 시대와 역사, 상황에 따라 어떻게 변모되었는가가 중요하다. 굳이 시의 구조 자체가 서정적 구조라는 점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서정=전통, 모더니티=새로움이라는 단순한 도식은 지양해야 한다(물론 이런 등식은 서정과 서정주의(리리시즘)를 혼동한 데서 따르기도 한다). 서정이 모든 시에 나타나는 기본적 속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서정과 전통, 서정과 모더니티는 서로 등치되거나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다. 전통이니 모더니티니 하는 것들은 표출된 서정의 한 형태일 뿐이다. 특히 ‘서정’은 각각의 사물이나 대상들에서 주체가 겪는 순간적인 경험에 일차적 관심을 가지며, 거기서 비롯되는 주체의 인지적․정서적 반응에 가장 직접적인 자기 근거를 둔다. 따라서 ‘서정’은 그 속성상 다양하게 발현될 뿐만 아니라 어느 하나로 귀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서정’의 본령이 ‘없다’고 하는 것은 이런 의미이다.

 

모든 시가 서정을 바탕으로 한다고 할 때, 그렇다면 서정시의 개념과 본질은 무엇인가. 통상적인 서정시의 개념을 정의해 보면, 역사적 개념으로서의 서정시(좁은 의미의 서정시)와 개인의 체험과 감정을 표현한, 자아탐구의 다양한 형식으로서의 서정시(넓은 의미의 서정시)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좁은 의미의 서정시는 19세기 낭만주의 시론이 나오기까지의 ‘자연-주체’의 동일화에 기반을 둔, 동일성의 시학을 전제로 한 시를 말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전통서정시 혹은 순수서정시라는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잘 아시다시피, 이때 서정시의 본령은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 “세계의 자아화”, “회감의 작용에 따른 주체와 객체의 단절이 없는, 세계와 자아의 조화”(에밀 슈타이거), “근원 회귀 혹은 마법성의 복원”(에른스트 피셔) 등으로 일컫어지는 ‘동일성’의 원리로 대표된다. 나는 이때의 서정시의 본령이 ‘동일성’을 지향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개인의 체험과 감정을 표현한, 자아탐구의 다양한 형식으로서의 서정시, 곧 넒은 의미로서의 서정시는 동일성의 시학뿐만 아니라 비동일성의 시학, 신서정, 반서정 등을 포괄하는 현대시(모더니즘)의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물론 나는 신서정이니 반서정이니 하는 개념 정의에도 찬성하지 않는다. 앞서 언급했듯이 ‘서정’은 다양하게 발현되고 어느 하나로 귀결될 수 없는 복수성(複數性)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모든 시는 서정시이며, 이때 ‘서정’은 그것이 동일성을 지향하든 분리와 파편화를 지향하든, 자연과 현실을 노래하든 욕망과 환상을 담아내든 특별히 규정된 원리나 본령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모든 시는 서정시(후자의 개념)라고 했지만, 한국적 특수성을 감안할 때, 그리고 통상적으로 분류되는 기준에 따른다면, 서정시는 좁은 의미의 서정시, 곧 역사적인 개념으로 쓰이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서정’과 ‘서정시’를 동일한 범주로 사용하기도 하고 ‘신서정’, ‘반서정’과 같은 용어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문제는 평자나 연구자들이 위의 두 개념의 서정시를 편의에 따라 구분없이 사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대립되는 개념으로 사용하기도 한다는 데 있다. 이러한 것은 모두 서정을 ‘동일성의 지향’이라는 좁은 개념으로 이해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서정시의 개념에 대한 논의는 좀더 필요하리라 본다.

 

2) 모더니즘과 서정시의 관계

 

현대성(모더니즘)은 전적으로 서구적인 개념이다. 서구에서 현대성은 항상 전통과의 연속과 단절의 논의에서 이해된다. 흔히 우리는 모더니즘을 전통과의 단절 속에서만 이해해 왔지만 모더니즘은 새로움이면서 전통이며, 동시에 그 자체를 부정한다. 모더니즘의 이런 모순은, 옥타비오 파스에 의하면, 모더니즘 내부에서 작용한다. 사실, 그 자체를 비판하는 것은 모더니즘의 한 가지 기능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모더니즘을 충족시키는 한 가지 방법이다. 모더니즘은 현대성 혹은 새로움을 긍정하면서도 부정한다. 모더니즘은 이미 그 내부에 이런 양면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모더니즘은 전통(과거)과 현재, 미래를 동시에 내포한다. 여기서 ‘과거’ 혹은 ‘현재’를 서정시로 본다면, 모더니즘은 서정시의 연속이과 단절 속에 존재한다.

 

혹자는 아도르노의 “아우슈비츠 이후 시(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적이다”라는 것으로 서정시의 종말을 얘기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아도르노가 말하는 시(서정시)의 개념은 무엇일까. 그가 말하는 시의 개념을 좀 더 면밀하게 살피도록 하자.

 

아도르노가 서정시에서 일정한 사회적 연관성을 찾아 그것을 “사회적 모순과 갈등의 주관적 표현”(「시와 사회에 대한 강연」)이라고 말했을 때의 서정시는, 리리시즘으로 대표되는 시도 아니고, 감상적이거나 낭만적인 시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이때의 서정시는 가장 개인적인 정서를 표현하는 시, 그러니까 우리의 관점에서는 좁은 의미의 전통서정시라기보다는 외부적 현실과는 상관없이 표출되는, 내면의 무의식이나 충동을 표현하는 현대시(일종의 표현주의 시)에 가깝다. 반면, 그가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는 끝났다”라고 했을 때의 서정시는, 넓은 의미의 서정시를 말한다기보다는 꽃과 나무를 읊조리고 찬미하는 좁은 의미의 서정시(전통서정시)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도르노의 이 말은 좁은 의미의 서정시를 비판하는 자들이 흔히 인용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것은 야만적이라고 한 것은 사회와의 연관성에서 시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비판이론가로서의 아도르노에게는 아우슈비츠 이후 더 이상 시가 비판적 기능을 할 수 없다는 것이며, 때문에 비합리적인 것은 비합리적인 체로,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부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시가 굳이 사회적 의미를 재생산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의미, 특히 사회적 의미란 의도되는 것이라기보다는 부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시대에 혹은 앞으로의 시대에 서정시(이하 좁은 의미)가 의미가 없다거나 사라져야 한다는 데에는 완전히 동의하지 않는다. 변화가 있으면 반대급부로 불변적인 것에 대한 갈망이 있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더군다나 서정시가 시의 본질이라고 믿는 자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리라. 과학기술이 첨단을 향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도 여전히 서정시는 있을 것이며, 우리 시단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것이 양산되거나 그것만이 진정한 가치이고 진리라고 주장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는 시에 운율을 맞추는 것이

형식적인 허영이라고 생각한다.

과꽃에 대한 감동의 정서와

미장이의 연설에 대한 분노의 정신이

나의 내부에서 싸우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 시를 쓰도록 만드는 것은

분노의 정신이다.

 

브레히트의 시 <서정시를 쓰기 어려운 시대>의 마지막 연이다. 이 시는 두 가지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선 자연(“과꽃에 대한 감동”)이 더 이상 시적 상상력의 원천이 되지 못한다는 점이며, 또 하나는 문학 혹은 시가 사회의 비판적 기능(“분노의 정신”)을 수행해야 한다는 점이다. 한국문단에서 전자는 서정시가 그 기능을 수행하고 있고, 후자는 리얼리즘 시가 수행해왔다. 더군다나 아우슈비츠와 비슷한 상황이 우리에게도 있었고(광주 민주화 운동), 그 이후 서정시가 힘을 잃은 것이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나무와 꽃을 노래하는 서정시는 더 이상 가치가 없어 보인다.(실제로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전통서정시의 가치는 역설적으로 여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모더니즘 시의 ‘속도’와 ‘변화’에 대한 타자로서, 그리고 리얼리즘 시가 놓치고 있는 인간 내면 의식에 대한 자각이라는 측면에서 서정시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옥타비오 파스의 다음과 같은 말은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현대성(모더니티)은 결코 그 자체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언제나 다른 그 무엇, 곧 타자(他者)에 해당한다. 현대의 특징은 신기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 즉 타자에 있다. 기이한 전통과 기이한 것의 전통, 현대성은 이처럼 이중성으로 규정된다. 낡은 전통은 언제나 똑같고 현대는 언제나 다르다. 전자는 과거와 현재의 통일성을 요구하고, 후자는 그 자체의 차이점을 강조하는 데에만 만족하지 않고 과거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라는 점까지도 확신한다. 따라서 현대의 전통은 철저한 타성(他性)과 과거의 복수성(複數成)에 있다”(옥타비오 파스, ?낭만주의에서 아방가르드까지의 현대시론?)

 

그러니까 모더니즘은 전통서정시의 시적 아우라나 본질을 부정한다고 하더라도 전통적인 시관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빚지고 있다. 그런 면에서 모더니즘은 전통적인 서정시 속에서 존재하고, 그 차이에서 의미를 갖는다. 모든 것은 타자와의 무한히 복잡한, 역동적 관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런 역동적 관계의 산물이 단순히 시의 내부에서만 작용할까. 아니다. 시의 바깥에서 시와 맺는 관계는 다양하다.

 

3. 시적인 것은 무엇인가.

 

다시 정재학의 시로 돌아가자. 따지고 보면, 문학적 텍스트는 결국 다른 텍스트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맥락 안에서 생산된 것들이며, 정치나 사회와 마찬가지로 제도의 산물이다. 다시 말해 정재학의 작품이 신문에 실린다면 기사문이겠지만, 제목을 따로 붙이고 ‘시집’이나 ‘시 잡지’에 실린다면 어떻게 될까. 물론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것은 분명 시가 된다. 시 또한 제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좀더 발전시킨다면, 예술 작품은 ‘실재 사물’이라고 부르는 것과 대조되게 특별나게 보여야 하는 특별한 방식은 없다는 사실을 시인은 보여주는 셈이다. 이와 유사한 예로, 우리는 뒤샹의 ‘샘’이나 앤디 워홀의 ‘브릴로 박스’를 잘 알고 있지 않는가. 아서 단토가 워홀의 ‘브릴로 박스’와 개념 미술의 상관성에 대해 논의한 것 중 일부를 옮긴다.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와 슈퍼마켓에 있는 브릴로 상자 사이에는 외적으로는 어떤 차이도 없다. 또한 개념미술은 어떤 것이 시각예술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시각적 대상이 될 필요조차 없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제는 더 이상 실례를 들어서 예술의 의미를 가르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외관에 관한 한 어떤 것도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그것은 당신이 예술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고자 한다면 감각 경험으로부터 사고로 전환해야 하는 것을 의미했다. 간단히 말해서 당신은 철학으로 향해야 한다.(아서 단토, 「모던, 포스트모던, 그리고 컨템퍼러리」, 『예술의 종말 이후』)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와 슈퍼마켓에 있는 브릴로 상자는 외적으로는 차이가 없다. 워홀의 작품은 이른바 창조한 게 아니다. 그러나 워홀의 ‘브릴로 상자’가 예술이 되는 것은 기존의 예술에 대해 감각 경험으로부터 사고로 전환하게 만드는 것, 그러니까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의문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헤겔에 의하면 예술은 우리를 지적 고찰로 인도하고, 그것은 창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술이 무엇인지를 철학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다. 단토가 강조하는 것은 이런 의미로서의 철학적 인식이며, 예술 자체의 본질을 탐구하는 ‘사고’이다. 마찬가지로 정재학의 작품은 시에 대한 전통적인 인식, 곧 시는 사람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 내지 형상화하는 언어 예술이라는 정의에 철학적 의문을 던져준다.

 

정재학의 작업에서 의미를 찾는다면, 예술 작품은 하나의 감각적 대상이라는 기존 관념은 더 이상 의미를 지니지 못하며, 무엇이나 예술이 될 수 있고 시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될 때 남는 문제는 시작품이라는 감각적 대상에 대한 지각과 체험, 즉 미적 체험으로부터 ‘이것이 왜 시가 되는가?’라는 철학적 질문이며 사고이다. 이런 의미에서 시인은 창조하는 자가 아니라 시의 본성을 탐구하고 따라서 철학자가 된다. 헤겔은 예술의 본질을 탐구하면서 한편으로 예술의 본질도 강조했지만, 이 시대, 특히 2000년 이후 몇몇 젊은 시인들은 이런 본질을 부정하고 ‘무엇이 시인가’를 탐구한다. 최근 진은영의 시와 정치에 관한 일련의 논의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진은영이 시의 본질을 탐구하면서 시의 본질을 강조한다면, 정재학은 시의 본질을 탐구하면서 시의 본질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시인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정재학이 강조하는 것은 시에 대한, 미학에 대한 비판이고 시의 본질에 대한 탐구이다. 일반적인 시 문법에 익숙해 있는 독자라면 혀를 찰 일이겠지만, 정재학의 이번 시들은 다시 ‘시’와 ‘시적인 것’에 대한 물음과 자각을 불러일으킨다. 시란 무엇인가. 다시 생각해 보자.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시에서 최초의 자유시로 평가받는 주요한의 「불놀이」는 단순히 외적 운율(율격)에 대한 자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때의 자유는 시와 산문의 경계에 대한 자유이며, 행과 연 구분으로부터의 자유이기도 하다. 또한 단시(短時)로부터의 자유이기도 하다. 사실, 서양에서는 단시보다는 원래 장시(長時)가 주를 이루지 않았는가. 워즈워드가 “감정의 자연스러운 발로”라는 서정시의 개념을 말하기 이전으로 돌아가 보자. 시는 일반적으로 긴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영시에서 가장 걸작의 하나로 간주되는 밀턴의 서사시『실락원(Paradise Lost)』은 10,565행에 이르며, 서사시, 극시, 설화적 시 등도 오히려 긴 것을 본질로 한다. 또한 서정시의 대표적인 작품, 예를 들면 키츠의 죽음을 애도하는 셜리의 만가『Adonais』(1821)는 495행, 뜨거운 사랑의 추억에 핑계 삼아 인생의 무상을 감탄하는 빅토르 위고의『올림피오의 슬픔 Tristesse d’Olympio』(1821)도 168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양에서 시가 이렇게 긴 것은 자연을 대하는 그들의 사유 방식에 연유한다. 서양인에게 현실은 단지 신의 창조물일 뿐이지 현실에 신이 깃들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그들은 바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나 나뭇잎이 떨어지는 풍경을 바라보는 감성적인 것보다도 시학적이거나 철학적인 것을 사고하느라 정신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양인들에게 시는 어떤 사고를 전개하기 위한 충분한 길이가 필요했던 것이다.

 

내가 뜬금없이 시의 길이를 말하는 것은 최근 젊은 시인들의 산문화 경향을 옹호해 보자는 의도에서이다. 나는 오히려 최근의 젊은 시인들의 작업에서 시의 본질에 대한 고뇌의 흔적을 본다. 시대가 변하고 매체가 변하고 자연도 변했다. 그 속에 사는 사람도 변하는 것은 당연하고, 그 사유가 변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따라서 젊은 시인들의 산문화 경향은 ‘자연’이 더 이상 서정적인 감상과 감각적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은 아닐까. 시를 하나의 감각적 대상이라기보다는 미적 체험으로부터 ‘시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질문과 사고를 전개하기 위해 필요했던 길이 때문은 아닐까. 물론 말이 너무 어렵고 잡다한 수다와 요설 등 혼란스러운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을 시의 본질을 탐색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해 주면 어떨까. 오히려 문제는 황지우가 지적했듯이 ‘양식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를 양식화한다’는 것의 패턴화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재학의 시는 시 양식을 파괴하고 시 제도에 정면으로 도전한다는 점에서 새롭다. 이승훈의 표현을 빌리면, “일반화된 시, 시라는 장르에 침묵하는 시, 너무나 시 같은 시, 장르라는 일반의 옷을 입고 행세하는 시, 말하자면 일반화되고 평준화된 시에 대한 비판이다. …… 아니 좀더 근원적으로 생각하면 시라는 개념이나 제도에 대한 회의, 시와 비시의 경계에 대한 비판이다”(「시적인 것도 없고 시도 없다」). 정재학의 시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창조된 언어, 언어의 창조성, 언어의 자명성을 파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지시적 의미를 파괴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시적 언어는 특별나게 보여야 하는 특별한 방식은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한다.

 

그렇다면 문학이, 예술이 너무 허무하며 인간에게 무엇을 던져줄 수 있는가에 대한 회의적인 반응도 있을 수가 있다. 시의 기능과 효용에 관한 회의감이나 위기감이 잠복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 또한 단순하지 않다.

 

실용적 관점, 즉 시의 효용론은 수단과 목적의 관계이다. 시 작품이 독자에게 주는 효과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심리적 효과이며 다른 하나는 교훈적 효과이다. 실용적 관점에서 시는 독자에게 실제적 효과를 주는 도구이다. 즉, 시는 실제적 효과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그 효과는 ‘쾌락’과 ‘교훈’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쾌락과 교훈이라는 두 명제는 동시에 다른 명제, 곧 움직이게 함(to move)이라는 명제를 함축하고 이 말은 시의 ‘정서’(emotion)와 관계된다. 그러나 이 세 명제 가운데 어느 명제를 강조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이론들이 전개된다. 잠시 대략적으로 살펴보자.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 이론가인 카스텔베트로는 시의 근본 목적이 교훈이라는 주장을 부정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시의 목적이 구성, 곧 필연성의 세계에 있다고 본다. 따라서 시의 윤리적 측면은 부수적인 현상일 뿐이다.

 

한편 마조니는 시의 사회적 효용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의 경우 시의 사회적 효용성이란 바로 오락적 기능과 통하고 그 오락적 기능은 사회적 정치적 목적에 부합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시는 교육적 오락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시드니는 시의 교훈성을 정서와 결합시킨다. 정서(emotion)는 움직임(moving)에서 온 말이고 따라서 정서는 독자를 움직이게 한다. 그러나 시에 있어서 정서는 실제적 행동과는 무관한 정서, 곧 감동의 세계이다. 여기서 시드니는 플라톤적 딜레마를 극복한다. 플라톤에 의하면 정서(passion)는 인간을 사악하게 만든다. 그러나 시드니에 의하면 그것은 덕성을 도야하는 도구이며, 그것은 시인이 창조한 세계, 곧 이상의 세계가 환기하는 윤리적 선 때문이다.

 

이런 시드니의 견해는 시의 독립성을 희생한다는 점에서 비판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의 정당성과 독립성을 동시에 주장했다면, 시드니는 시의 정당성 곧 시의 사회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시의 독립성, 곧 자율적 본질을 희생한다. 그러니까, 시가 국가․사회․공동체의 유지․발전을 위한 유용한 도구로서 그 기능을 다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시 창작과 감상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순수한 미적 쾌감을 위한 것이냐에 따라 시의 자율성과 사회성은 끊임없는 긴장 관계를 맺는다.

 

사실, 시를 독자의 윤리적 세계와 관련시켜 논하는 것은, 동양의 경우 뿌리가 매우 깊다. 이른바 도학적 관점이 그것인데, 이때 시는 도덕교육과 사회비평의 도구로서도 유효하다. 유약우(劉若佑)에 의하면 중국의 이런 효용론은 시란 개인의 덕성에 영향을 끼치는 도구이며, 풍유(諷諭)와 우언(寓言), 곧 풍간(諷諫)에 의해 정부에 대한 백성들의 감정을 반영하고 사회악을 고발해야 하고, 도덕에 관계되는 시는 아(雅)해야 한다는 원리에 선다. 아(雅)란 ‘우아(優雅)하다’, ‘정치(精緻)하다’는 뜻으로 원래는 ‘정확(正確)하다’의 뜻을 지닌다. 우리시의 전통에서 조선 전기를 중심으로 할 때, 효용론은 ‘文者 載道之器’라 하여 도(道)와 풍교(風敎), 성정순화(性情純化), 사대외교(事大外敎)와 사장중시(詞章重視)로 요약된다. 그러니까, 동양적 전통에서 시의 효용성은 정치와 직접 관계되며, 독자의 ‘윤리’뿐만 아니라 작가의 ‘윤리’ 의식과도 밀접하게 관련된다. 이런 사정으로 볼 때, 시의 사회적 기능, 혹은 정치성은 시인의 ‘윤리’의 문제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더군다나 우리처럼 문학을 ‘재도지기’의 관점에서 보아왔던 오래된 전통 속에서 작가가 현실 상황을 무시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의 목적은 교훈인가, 쾌락인가, 정서인가?

 

시의 목적이 쾌락이나 정서가 아니라 교훈이라고 할 때, 사실 문학의 정치적 힘보다는 문학의 무능함이 일단 먼저 모습을 드러내 보인다. 시인의 희망과는 달리 문학이 저주 또는 정치적 발언이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으며, 반대로 군중 속에서 정치적 힘을 가져야 하는 저주마저 문학을 통해서 정치적으로 무장 해제된 노래로 바뀌어버리고 만다. 문학은 안전한 유통구조 속에서 사고 팔 수 있는 무해한 즐거움이 되고 사회 안에서 일거리가 없어진다. 이러한 비판적 풍경은 문학이 시장의 논리에 깊숙이 종속된 오늘날에는 더욱 더 심각한 상황이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에서 문학(시)은 과연 그 소임을 다한 것일까? 그래도 문학이 담당해야 할 진정한 몫이 남아 있다면, 그 어디에서 그것을 찾아야 할까?

 

나는 그것을 ‘부정의 정신’에서 찾고 싶다. ‘부정’은 사회를 미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이 시대의 문학정신일 것이다. 부정의 대상은 수없이 많다. 우리문학은 부정에 대한 참다운 인식뿐만 아니라, 아니 오히려 부정의 방식에 대해 괴로워해야 한다. 사회 자체가 예술이나 문학을 부정하는 마당에, 따라서 예술이나 문학이 사회로부터 소외된 마당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일상적 언어의 자명성을 파괴하는 일, 문학을 부정되어야 할 부정의 상태에 놓는 일, 좀 어렵게 말하면 부정의 역설을 제시하고 소외의 아이러니를 극단까지 밀고 나가는 일일 것이다.

 

4. 나가며

 

 

이 시대는 분열의 시대이자 자체 부정의 시대, 비판의 시대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 문단 전체의 경향을 말한다면 여전히 서정시가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양산된다는 것이며, 양산되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고통의 부재이다. ‘자연’은 정태적이고 자족적인 완결체가 아니다. 그러니까 자연은 절대화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의 과정 속에 있는 역동적 실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수서정시나 전통서정시에서는 자연을 절대화하거나 보편화하면서 단순하게 완상하거나 반문명의 포즈로 수단화시킨 면이 없지 않다. 그러다 보니 자연적으로 주객합일의 안이한 경지를 지속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는 이미 이런 조화와 화해가 하나의 환상으로 되어버린 지 오래다. 그렇다면, ‘새로운 시대의 서정’은 무엇인가.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나는 ‘새로운 시대의 서정’은 무의식과 일상을 표출하는 방식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서정의 본질이나 본령이 있다고 믿는 본질주의자들이라면 새로운 서정에 대해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역설적일 것이다. 그들에게 ‘새롭다’는 것과 ‘서정’이라는 말은 어울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못 되기 때문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서정’과 ‘새로움’이 미묘한 대타적 성격을 띠는 것은 ‘서정’이 마치 서정주의(리리시즘)를 구현하는 원리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리리시즘은 이미 근대적 낭만주의의 전통 속에서 확립되어 그 생명력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질주의자들에 의하면 서정 혹은 서정시만큼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은 없으며, 오히려 혼탁한 시대일수록 주객 합일, 자연과의 조화, 세계와의 화해를 추구하는 전통서정시의 본질을 더욱더 강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시의 본질이나 서정의 본질이라는 말에 절대성을 부여하고 싶지는 않다. 엄밀히 완벽하게 ‘순수한 것’, ‘본질적인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수천 년 전 노자도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이라 하지 않았던가. 순수주의와 본질주의는 세계와 대상을 폭력적으로 구획하고 분류하고 위계화하는 이성적 사고가 만들어낸 거짓 신화일 뿐이다. 문학도 예외가 아니다. 가장 문학적인 것, 문학의 가장 순수한 정수를 추출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실패로 돌아갔다. 비빔밥이 그런 것처럼, 뒤죽박죽 섞이고 혼합됨으로써 새로운 순종을 만들 수도 있다. 아니, 처음부터 순수한 것 혹은 절대적인 것은 이 세상에 없다. 노자는 이러한 것을 “視之而弗見 名之曰微 聽之而弗聞 命之曰希 抿之而弗得 名之曰夷 此三者 弗可至計 故混而爲一”(14장)이라 말한다. 해석해 보면,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고 해도 들리지 않으며, 만지려고 해도 만져지지 않는 것, 이것들은 따져 헤아릴 수 없다. 따라서 서로 섞여서 하나가 된다”. 처음부터 ‘하나(一)’는 ‘섞여있는 것(混)’이었던 것처럼, 우리가 순종이라고 믿고 있는 것들은 애초부터 순종이 아니라 새끼줄처럼 꼬여서 하나가 된 잡종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새로운 시대의 서정은 그 형태가 분명하지는 않겠지만, 여러 가지 성질의 서정이 뒤섞이고 혼합되고 융합된 서정, 잡종의 서정일 것이다. 게다가 서정과 서사가 함께 섞여서 그 형체를 알 수 없는 형태의 시가 될 것이다. 물론 본질주의자나 순수주의자들은 잡종으로서의 시를 거부하고 순수의 신화를 강조하겠지만, 이미 현실은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순수와 잡종이라는 이분법이 무너진 지 오래다. 생각해 보면, 동일성의 원리가 곳곳에서 자체 균열을 보이면서 생겨나고 있는 서정시의 반서정 경향 혹은 비동일성의 흐름이 어색하지 않으며,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도시 서정’이라는 말을 우리는 너무 자연스럽게 쓰고 있지 않은가. 어떻게 알겠는가. 정재학의 경우처럼, 미래의 서정이 단순한 혼합의 수준을 넘어 파괴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지.

 

 

 

참고: ‘소통’에 관한 시 몇 편.

 

목월 선생님이 내려오셨다. 춘천교대 교수 시절. 서울에서 택시로 모시고 오는 동안 계속 기분이 좋으셨다. 택시가 교문으로 들어갈 때 선생님은 “이군! 자네 연구실부터 가 보세.” 하신다. 난 작은 연구실로 선생님을 모셨지. 선생님은 의자에 앉으시더니 “이군! 연구실이 한양대보다 좋군.” 웃으시며 기분이 좋으셨다. 그때는 아프시기 전이다. 선생님은 학장실에 들려 잠시 학장님과 말씀을 나누고 곧장 강당에서 시에 대해 말씀을 하셨다. 겨울 저녁 문득 눈이 내리고 눈발이 머리칼에 닿던 느낌에 대해! 오늘 저녁에도 눈이 내린다. 머리칼에 닿는 눈발 하나!

 

-이승훈, <눈발>

 

 

 

송기원이 '실천문학' 주간으로 정신없을 때 그는 멀쩡한 제 명함에다 문구 형님 집 전화번호를 찍어 다녔다. 덕분에 문구 형님 집에선 밤이나 낮이나 걸려오는 그놈의"송기원씨 좀 바꿔주세요"라는 천하 술꾼들의 전화질 때문에 생몸살을 앓았다고 하는데, 그런데 그보다 더 심한 경우가 당시 중앙일보 문학 담당 임재걸씨였다. 그는 수시로 그런 송기원에게 전화를 걸어 "거기 임재걸씨 있습니까?"라고 물어 그때마다 그를 깜짝깜짝 놀라게 했다며 그에 비하면 자기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 송기원은 펄쩍 뛰면서 얘기하는 것이었다.

 

-이시영, <건망증>

 

 

만난 첫날부터 결혼하자던 한 남자에게

꼭 한 달 만에 차였다

헤어지자며 남자는 그랬다

 

너 그때 버스 터미널 지나오며 뭐라고 했지?

버스들이 밤이 되니 다 잠자러 오네 그랬어요

너 일부러 순진한 척한 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너 그때 「두사부일체」보면서 한 번도 안웃었지?

웃겨야 웃는데 한 번도 안 웃겨서 그랬어요

너 일부러 잘난 척 한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너 그때 도미회 장식했던 장미꽃 다 씹어 먹었지?

싱싱하니 내버리기 아까워서 그랬어요

너 일부러 이상한 척한 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진정한 시의 달인 여기 계신 줄

예전엔 미처 몰랐으므로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사연끝에 정중히

號 하나 달아드리니 son of a bitch

 

사전은 좀 찾아보셨나요? 누가 볼까

가래침으로 단단히 풀칠한 편지

남자는 뜯고 개자식은 물로 헹굴 때

비로소 나는 악마와 천사 놀이를 한다,

이 풍경의 한순간을 시 쓴답시고

 

-김민정, <피해라는 이름의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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