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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의 詩學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2. 3. 10. 00:22

 

높이의 詩學

 

조 정 권

 

 서양에서는 높이에 대한 상상력이 있었을까.

산은 지상에서 우뚝 솟아 있는 ‘어떤 높이’이다. 동양 시인들은 예부터 그 높이 위에 정신의 거처를 올려놓고 있다. 산은 눈으로 목측하는 가시거리가 아니라, 정신의 눈동자가 假側한 드높은 정상. 도달하려는 피안의 측정불가능의 높이. 그리고 그곳에서 바라보는 세상의 넓이와 위에로의 또 다른 높이를 의미했다. 마음이 넓이의 세계였다면 높이는 정신의 세계이었다.

 

地上에 비 내리고 山頂엔 눈 내린다.

눈은 어찌하여 지상까지 오기 꺼리는가.

산봉우리에 학처럼 깃들고 싶은

저 뜻 숨기기 위함인가.

 

- 「산정묘지 20」 전문

 

 동양시인들의 상상력 속에서 찾아낸 높이의 의미는 수평적 공간을 벗어나 수직적인 공간에서 올려다보는 높은 곳을 향하는 경험이다.

하늘을 지붕처럼 받든 산맥과 산맥이 치달아간 드높고 광활한 하늘, 오랜 세월 암벽과 암벽 사이로 쌓아올린 시간의 고요가 깃든 험준한 봉우리를 직상에서 올려다보는 경험은 삶의 물음에 대한 방향으로 틀을 잡을 때 경건하고 숭고한 정신적 표상으로 나타난다.

특히 산은 산수화에서 현실적 의미보다도 정신적 의미를 갖는 것으로 드러난다.산수화에서 인간은 언제나 자연의 한 부분으로 미세하게 그려진다. 표현의 주 대상은 기암절벽 위로 높이 솟은 산봉우리들이며 인간은 그속에 아예 생략되어 있거나 낡은 모옥 茅屋을 그려 넣음으로서 누군가가 기거하고 있다는 사실만을 암시한다. 은둔자의 누추한 움막집을 바위나 소나무 아래 배치해놓은 산수화의 공간적 구성은 어떤 정신적 상태를 암시하게 위한 명상적 훈련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언제나 눈에 잘 띠지 않는 존재로서 자연에 파묻혀 있거나 점 몇 개로 암시된다.

산수화의 여백 역시 원근법과 대칭적 사고로서 풍경의 파노라마를 연출하는 서구 조형정신에서는 볼 수 없는 극소지향의 정신의 소산이다. 화폭을 꽉 채우면서 직점 의미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지 않고 비워둠으로서 의미를 암시할 수 있다고 믿어왔다. 여백의 미학은 인간보다는 자연이 중심이라는 서구 조형정신에서는 볼 수 없는 극소지향의 사고를 담고 있다. 반면에 서양화는 인물이 중심이며 산수는 인물 뒤의 배경으로 그려진다.

자연에 인간의 감정을 이입함으로써 주관과 객관의 합일된 세계에 인간을 융화시키는 것이 동양의 조형정신이라면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의 주관이 주축이 되는 것이 서양의 정신이다. 소크라테스조차 ‘산이나 나무, 자연으로부터 나는 아무 것도 배울 것을 느끼지도 알지도 못한다.’라고 자연과 화해하지 못하는 정신을 고백하고 있다. 동양인들의 조화로운 삶의 이상향은 구름과 안개를 벗 삼은 산이다. 산은 세상과의 격절공간이요 하늘의 숭고함이나 초월을 보다 근접하게 여길 수 있는 은유를 경험 안에 가능하게 해주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곳은 지상위에 솟아있는 땅의 끝이 아니라 쳐다보아도 언제나 시작되는 처음의 장소인 것이다.

 

 높이 솟은 산이 인간에게 불러일으키는 심리 상태를 철학자 질베르 뒤랑 Gillbert Durand 은 ‘상상력의 인류학적 구조’에서 바슐라르의 말을 빌려 ‘왕자적 명상 la contemplation monarchique' 으로 설명하며 지배와 피지배자의 체험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세속의 번뇌를 끊는 고행과 금욕의 삶으로 마음을 변화시키는 데 적합한 장소로서의 신성성과 상징성을 가진다. 산은 지형적 특성상 분명히 지상이지만, 지사일 수만은 없다. 높이 솟은 산봉우리는 하늘도 아니면서 땅 만일 수도 없는 어떤 자리이다.

산봉우리는 인간은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다. 그곳은 인간이 오를 수 있는 지상의 ‘높이의 끝’이자 하늘이 열리는 접점지대이다.

작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다음의 시를 보자.

 

산은 무심히 푸르고           山自無心碧

구름은 무심히 희구나       雲自無心白

홀로 오른 그 사람              其中一上人

역시 무심한 나그네일 뿐  亦是無心客

 

 이 시는 산에 오른 자의 정복심리가 아닌 자연에 대한 겸허를 담고 있다. 그 겸허는 깨달음과 만나고 욕망의 무화정신과도 상통한다. 그리고 그 정신은 무한하고 무궁한, 그리고 드넓은 무소유의 마음, 한없이 가볍고 가쁜한 존재의 거울을 만난다.

 

 산이 푸른 이유는 산에 무슨 ‘푸른 마음’이 있어서 푸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름에 무슨 ‘흰 마음’이 있어서 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산과 구름은 본시부터 아무 뜻도 없이 저 혼자 생긴 대로 푸르고 흴 뿐이다. 산은 그저 푸를 뿐이다. 인간이 관념으로 만들어 낸 것이 ‘푸른 마음’이요‘ 흰 마음’이다. 관념이란 무얼까. 담배연기이다.

 

 삶이란 환기구가 없는 방과 같다. 그 안에서 인간은 서로 질식한다. 공기구멍을 뚫는 자가 시인이다. 숨을 쉬기 위해 산소를 마시기 위해, 시는 산소가 들어오는 구멍을 뚫는 행위이다.

 

 나는 시의 오존층을 정신에서 기대하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가끔 산으로 올라간다. 산에 홀로 오른 자 무슨 곡절이 있을까 뜻을 만들어 부치지 말라고 싶다. 나는 나그네로서 그저 답답해서 올라왔을 뿐.

 

 앞에서 내가 인용한 시에는 사람이 가져다 붙인 한갓 속절없고 부질없는 구름과 푸름의 의미의 덧없음을 애써 의미 부여하려는 마음을 꾸짖는 가르침이 들어 있다. 산과 구름의 빛깔은 인간의 심리 상황에 따라 의미를 갖는 것도 아니요 인간과 관련하여서 의미가 부여되는 것은 더구나 아니다. 사물의 현상을 인간이 자신의 심리에 따라서 해석하려는 태도를 나무라는 것이다. 산은 그저 푸르고 구름은 그저 생긴 대로 흰 것이다. ‘ 이 시에서 주목할 부분은 ’無心‘이란 말이 세 번 반복되어 있다는 점이다. 산자체도 아무 마음이 없다. 구름 자체도 그냥 흴 뿐 아무 뜻도 없다. 그리고 산에 오른 인간도 그저 올라와 있을 뿐, 아무 마음도 없다. 아무런 마음도 없다는 마음속엔 오랜 세월이 지나간 흔적이 있다. 그것은 도의 경지에서 얻어진 열려진 마음을 뜻하고 있다.

시는 道도 아니고 철학도 아니지만 동양의 시에는 이러한 요소를 포함하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싱싱한 無 ’로서의 인간의 마음을 열어주는 시들이 많다. 無는 얼마나 싱싱할까. 얼마나 넓은가. 그리고 넓은 만큼 얼마나 깊은가. 그 안정감은 무를 인식하는 마음에서 온다.

 

홀로 오른 사람 역시

무심한 나그네일 뿐

 

 적어도 이 시에서의 나그네의 마음은 소외의 개념과 닿아 있지 않다. 나는 이 시에서 더 중요시 여기는 사실이 하나 있다.

시의 내용보다도 시인 자신이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느 시대나 시에서 창작자의 이름은 시와 함께 특권적 권위를 지닌다. 아니 그 이상일 것이다. 그러나 동양의 시인은 이름을 남기지 않고 텍스트만 남긴다. 이른바 逸名詩이다. 나는 이름을 스스로 없애버린 시인의 無慾, 無化정신에서 극단까지 간 은자의 정신을 엿보고 있다.

 시인이란 어떤 존재일까.

 

조정권

1949년 서울 생

1970년 박목월 선생 추천으로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

시집

 

『비를 바라보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 『시편』, 『虛心頌』 . 『하늘이불』, 『산정묘지』, 『신성한 숲』,『떠도는 몸들』, 『먹으로 흰꽃을 그리다』 ,『고요로의 초대』

불어판 산정묘지 ( 프랑스 시르세 출판사)

 

수상

녹원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김수영문학상, 소월시문학상, 현대문학상, 김달진문학상, 질마재문학상, 목월문학상 등

 

『문학의 집 서울』, 제 125호, 2012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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