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시창작 도움자료

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오세영)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2. 1. 12. 00:07

 

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 시와 인식 대상

오세영

 

1.

 

시와 산문의 구분에 대하여는 여러 관점에서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발화(發話)라는 측면에서도 그 둘은 차이를 드러낸다. 시는 대체로 대상에 대한 인식을 기술하지만 산문은 주관의 생각 그 자체를 표출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산문이란 운문(verse)의 반대말이 아니라 시(poetry)의 반대말이다.

 

산문이 주관의 생각을 그대로 표출한다는 것은 연설이나 강연 혹은 일상의 대화를 살펴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정치가가 연설을 하고자 할 때 그의 머리에는 대중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자신의 주장이나 이념이 미리 예비되어 있다. 그리하여 이렇게 이미 준비된 내용을 ‘연설’이라는 담론을 통해 대중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주관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발설하는 방식이다. 그 누구도 자신의 마음속에 이야기하고자 할 내용 없이 대중 앞에 설 수는 없다. 즉흥적인 연설일지라도 평소에 무엇인가 말하고 싶은 내용이 있으므로 대중 앞에서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다. 강연이나 강의, 신문의 논설이나, 편지, 일상의 대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산문은 주관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표출하는 담론 형식을 취한다.

 

그러나 시는 다르다. 시는 시인 자신의 주관을 일방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의식이 대상과 만나 그 대상에서 파악한 어떤 총체적인 의미 ―아마도 이것은 시적 의미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른다―를 언어화하는 담론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엄밀히 말하자면 시의 언어란 대상과 주관이 일원화하여 만드는 언어이지만 한편 산문과의 대척 관계를 강조한다면 시는 대상이 지닌 의미 그 자체를 제시하는 언어이기도 하다.

 

대상이 지닌 의미라는 말에는 물론 오해의 소지도 있을 수 있다. 과학 역시 대상(예컨대 자연)이 지닌 의미를 탐구하는 담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대상이라 하더라도 시가 관심을 갖는 의미와 과학이 관심을 갖는 의미는 다르다. 시는 감성과 이성이 통합된 대상의 총체적 의미에 관심을 갖는 반면 과학은 오직 이성과 판단이 허락하는 대상의 부분적인 의미에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시적 진실이 직관적이고 모순되는데 반하여 과학적 진실이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편 시가 항상 대상을 전제로 하지만은 않는다는 반론도 있을 수 있다. 소위 ‘비대상’의 시로 명명될 수 있는 이러한 시적 경향은 쉬르레알리즘과 같은 20세기 초 유럽의 아방가르드 시와 그 흐름을 계승한 우리 시대 실험시의 중요한 본질―실제로 그들은 그들의 시에 ‘대상’이 없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선언하였다.―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러나 상식적 차원의 이 같은 말도 심층적 차원에서 이야기하자면 이 역시 대상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시는 주관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식이란 미묘한 것이어서 대체로 그 대상을 외적(객관)인 것에서 구하지만 때로는 내적(주관)인 것에서도 구하는 것이다. 가령 대상이 없다는 쉬르레알리즘 시 역시 자신의 주관에 내재한 ‘무의식’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인간의 의식은 그 어떤것도 대상이 없는 의식이란 있을 수는 없다. 쉬르레알리즘 시도 무의식을 내용으로 담는다지만 그 무의식을 내용으로 담는 행위 그 자체는 이미 의식의 활동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대상’이란 객관을 전제하는 것임으로 주관을 대상으로 한 것은 언뜻 대상이 없는 것 같이 생각될 뿐이다.

 

이렇듯 산문이 주관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표출하는 담론 형식이고 시가 대상의 인식을 언어화하는 담론 형식이라면 당연히 이렇게 정리될 것이다. 즉 전자는 언어의 전달적 기능에 따르고 후자는 존재론적 인식을 따른다. 전자가 언어의 실용성을 따른다면 후자는 언어의 발생에 관련된다. 전자가 인위적인 말이라면 후자는 사물 혹은 자연의 말이다.

 

2.

 

시 창작이란 일종의 정신활동의 하나이다. 어떤 정신 현상을 특별한 언어로 표출시키는 작업인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시 창작은 대상(세계)에 대한 인식행위라 할 수 있다. 즉 대상의 전제가 필연적이라는 말이다. 이는 두 가지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는데 첫째 언어 행위가 대상에 대한 인식행위라는 점, 둘째 언어활동을 포함하여 모든 정신활동이 기본적으로 의식활동이라는 점이다.

 

쏘쉬르에 의하면 발화자의 입장에서 볼 때 언어는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referent) 없이 성립 될 수 없다. 그리고 그 대상에 대한 인식은 필연적으로 어떤 개념(conception)을 수반한다. 이렇게 그의 머리 속에 개념이 확립되면 그 다음 단계로, 그는 그것을 청각영상(image acoustique)으로 환치시키게 되는데 이 청각영상이 바로 원초적인 의미에서 언어(langue)라는 것이다. 그것은 아직 머리 속에 잠재되어 있는 말로서 이것이 발음기관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되면 실제 우리 귀로 듣는 말(parôle)이 된다. 물론 이 대상에 대한 호명(呼名)은 존재의 현시(顯示)이자 의미의 생성인 까닭에 이 원초적인 언어는 의미 전달 이전의 언어 즉 존재의 언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어떻든 이처럼 시는 본질적으로 그것이 언어활동의 하나인 까닭에 대상의 전제 없이 씌어질 수 없다.

 

한편 모든 정신활동이 그렇듯이 시가 의식활동의 하나라면 이 역시 항상 대상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의식이란 그 자체로 독립하여 존재할 수는 없고 본질적으로 ‘―에 대한’ 의식 즉 지향성(intentionalität)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의식은 주관 안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에서 대상으로, 혹은 대상에서 주체로 움직이는 지향성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가령 우리가 무엇을 생각한다고 할 경우 그 생각은 대상 혹은 세계와 절연하여 순수하게 주관 안에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대상과의 만남에 의해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데카르트의 코기토에서도 ‘나는 생각한다’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생각의 주체(res cogitans)와 대상(res extense)이라는 양 요소의 전제가 필연적이라고 했던 것이다.(데카르트와 같이 주체와 대상을 구분하는 경우는 말할 필요가 없으나 현상학에서와 같이 상호작용하는 것으로 보는 경우도 이 양자의 존립자체는 부정될 수 없다. 현상학에서 즐겨 쓰는 ‘지향성’이라는 용어가 이미 이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선 의식이나 무의식 모두 마찬가지이다. 무의식도 넓은 의미에선 의식의 범주 안에 들어가며 다만 그것이 주관에 의해서 지각되지 않았다 뿐이지 일종의 의식활동이라는 점에서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서구 아방가르드들은 소위 ‘비대상의 예술’을 주장한다. 특히 그것은 미술에서 강조되는데 추상미술 또는 쉬르 레알리즘 미술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쉽게 말하자면 종래의 예술이 반영론 혹은 모방론의 토대 위에서 자연(사물)이든 세계든 하나의 대상을 주관으로 수용하는 데서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자신들(아방가르드)의 예술은 대상을 반영하거나 수용하지 않고 단지 주관을 표출하는 방식으로 창작된다는 것이다. 언뜻 듣기에는 그러한 관점에서 그들의 예술에는 대상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엄밀하게 생각해 보면 그 진술 역시 모순에 빠져 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인간의 의식활동이나 언어화의 과정에는 기본적으로 대상의 전제를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소위 비대상론을 주장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대상’이라는 개념을 잘못 파악한 데서 비롯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대상이라는 말을 객관 혹은 세계라는 말과 혼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관만을 표출한다고 했을 때의 주관 표출도 그것이 의식 혹은 언어화의 행위인 한 거기에 대상이 없을 수 없다. 비록 객관을 배제했다 하더라도 이때의 주관표출에는 주관 그 자체가 의식 혹은 언어화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고 혹은 의식행위는 꼭 객관만을 대상으로 삼지는 않고 주관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 경우도 많다. 최초로 ‘소외’라는 개념을 만들어 낸 바 있는 헤겔의 소위 즉자(an sich)와 대자(für sich)도 자기 자신을 부단히 대상화하는 정신활동에서 대상화하는 자기와 대상화되는 자기를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아방가르드가 비대상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에 있어서 대상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객관 즉 외재적 세계가 없다는 뜻이다. 그들은 주관 그 자체를 대상으로 삼은 자신들의 예술 창작을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말하자면 주관을 객관화시켜 인식대상으로 삼는다는 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일차적으로 시는 객관을 대상으로 삼은 시와 주관을 대상으로 삼은 시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종류의 시는 다시 그것을 수용 혹은 인식하는 시인의 태도에 의해서 각각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으로 나뉘어진다. 전자는 주관이 작용하여 대상을 변형시키는 경우요, 후자는 주관의 개입 없이 대상을 순수히 수용하는 경우이다.

 

따라서 시는 결과적으로,

 

(1)객관을 대상으로 하여 그것을 객관적으로 수용하는 시,

(2)객관을 대상으로 하여 그것을 주관적으로 수용하는 시,

(3)주관을 대상으로 하여 그것을 객관적으로 수용하는 시,

(4)주관을 대상으로 하여 그것을 주관적으로 수용하는 시의 네 유형으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