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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대한 내 생각

육화되지 않은 새로움은 뼈만 남은 생선에 얹히는 허공과도 같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2. 1. 5. 01:16

 

육화되지 않은 새로움은 뼈만 남은 생선에 얹히는 허공과도 같다.

 

나호열

 

1.

군집 群集생활을 하는 아프리카의 얼룩말의 줄무늬는 같은 것이 없다고 한다. 우리 인간도 예외는 아니어서 지문과 목소리도 다 다르다. 이 ‘다름’이야말로 전체와 부분을, 집합과 분할을 각성하게 하므로서 개별적 존재에 대한 인식을 일으키는 요소로 작용한다. 폴로스(풍요의 신)와 페니아(빈곤의 여신) 사이에서 태어난 에로스의 신화는 그래서 양립할 수 없는 중간자의 깨달음으로 여전히 슬프다. 군집이 주는 소속감과 안온함, 군집이 주는 억압과 순종의 굴레 사이에서 ‘다름’의 의식은 사람마다 그 강도가 다를 것이다. 분명한 것은 시인이란 존재는 이 ‘다름’에 대한 인식이 남다른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다름’의 인식은 천부적 天賦的일 수도 있고,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 오관 五官을 발달시키므로서 정밀하고 예민한 비판적 성향으로 키워나갈 수도 있다. 예나 지금이나 이름을 떨친 시인묵객들은 후자보다는 전자에 가까운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천부적 재능을 가진 시인은 현대물리학에서 말하는 11차원의 시공은 아니라 할지라도 범박한 3차원의 시공을 넘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하고’, ‘생각이 없는 곳에 존재하는’ 포스트모던의 경지에 이미 다다른 것은 아닐까? 거기에 한 가지 덧붙여 귀 따갑게 들었던 ‘언어와의 싸움’이라는 지루함 너머 언어의 규칙을 일거에 깨부수고 새로운 문법을 건설해 버린 존재는 아닐까?

 

이런 저런 생각 끝에 시는 계몽 啓蒙의 시대를 지나서 바야흐로 값싼 지극과 흥분을 유발하는 길거리의 간판처럼 쓸쓸해져 있다고 위로한다. 그 옛날처럼 노래로 흥얼거릴 수도 없고, 옛날 얘기처럼 교훈이 될 수 없으니 시는 시인 앞에 드리운 막막한 그림자일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만의 생각일 뿐, 여전히 지면에는 ‘다름’을 내세우는, 오늘을 질타하고 내일을 예언하는 시들이 건재하고 있으니 다행한 일. 여기저기서 뽑혀온 시들이 ‘좋음’과 ‘잘 쓴’의 수식어를 달고 낙엽처럼 힘없이 떨어지기도 하고 밤하늘의 별처럼 승천의 기쁨을 누리기도 하니 이 또한 즐거운 일. 이백과 브레히트가 나란히 걸어가고, 공자와 마키아벨리가 막창을 굽고 있는 목로주점을 지나 거의 일 년을 헤매이다 이제야 다시 책상 앞에 앉은 기분이다. 이제 어디로 갈까?

 

2.

천부가 없으니 공부를 해야 한다. 세상을 넓게 보면 성인에 이르는 것이고 깊이로 내려가다 보면 심성 心性에 닿는다. 이 심성을 품성이란 말로 바꿔보니 거칠고, 난잡하기 이를 데 없다. 시가 입신양명의 도구가 될 수 없음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시는 거칠고 난잡한 내 심성을 사람의 길로 인도할 것임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부끄러움을 은폐하지 않고 그 옛날 주희가 그랬고 퇴계가 그러했던 것처럼 한 편의 시를 내 얼굴에 붙여놓고 활보할 수 있다면 그만이겠다.

 

3.

내 마음을 벗어나 지면으로 옮겨진 글은 이미 타자화 他者化된 것이다. 타자의 범위를 너무 넓히다 보면 불특정의 독자들을 의식하게 되고, 그들의 눈치를 보게 되며, 그들의 동감 同感을 얻으려는 포즈를 취히기 쉽다. 동감이 아니라 공감 共感할 수 있는 독자는 그리 많지 않을 지도 모르고 어쩌면 시를 쓴 당사자인 나만이 고개를 끄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상황이 오더라도 한 편의 시는 시를 쓴 시인의 독백임을 결코 잊고 싶지는 않다.

 

4.

한 때 나는 형편없는 어휘력에 대한 열패감에서 헤어나지 못했었다.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개념(단어)이 풍부하다는 것은 시의 부피를 키우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는 무한히 많은 단어들을 불러내는 것도 아니고 뜻을 살피기 위해 언어를 배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와 언어를 서로 충돌시키고 이로 말미암은 뜻의 해체를 통해 새로운 개념을 서술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도 있다.

 

5.

그리하여 나는 오늘날의 시가 당면하고 있는 위기가 사진이나 회화를 비롯한 영상매체나 음악에 비하여 즉각적이고 다양한 이미지를 표출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다. 서로 미끌어 질 수밖에 없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숙명을 인정하는 대신에 아주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시간만큼만 읽을 수 있는 애매하고 모호한 시의 늪에 빠지고 싶은 것이다.

 

6.

어차피 시는 시인이라는 모체를 통하여 배출되는 부산물이다. 고통스럽게 사유의 좁고 긴 산도 産道를 통해 세상에 나오는 순간 시인의 피와 살은 그 시의 지문으로 지워지지 않는다. 구조주의 이론이 그러하듯이 불변하는 구조가 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문학의 정의, 시의 정의가 새로이 갱신되는 것은 막을 수 없다. ‘다름’에 대한 강열한 열망이 새로움을 낳고 그 새로움은 변화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다름’에 강박된 나머지 육화되지 않은 새로움은 뼈만 남은 생선에 얹히는 허공과도 같이 니힐 Nihil에 빠질 수밖에 없다. 철저한 부정이 없으면 한 걸음도 긍정의 세계로 나아갈 수 없는 일. 지금 나는 그 부정과 긍정 사이의 어디쯤에서 탐미 眈美의 유혹에 빠져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계간 <<미네르바>> 2012년 봄호 신작시 특집 : 시작메모로 게제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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