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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대한 내 생각

생에 대한 반역과 번역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1. 11. 6. 00:17

 

생에 대한 반역과 번역

                                                                                                                                          나호열

시를 써 보겠다고 마음 쓴 지 40년이다. 우유부단한 내가 진득하게 한 가지 일에 매달린 유일한 시업 詩業 덕분에 나는 내 생에 반역 反逆을 저지르고 그 반역의 생을 번역하는데 반평생을 보냈다. 이 말에 대해서는 조금 긴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아니, 간단히 말하자면 나는 이 세상에 대해, 인간에 대해 별 기대를 걸지 않았다는 점이다. 내 무딘 감성이 그나마 예리하게 작동하여 피붙이를 포함한 타자로부터 받은 불쾌함과 상처가 도무지 이 세상을 아름답게 보이지 않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말한다면 이해가 가능할까?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남보다는 맑고 깊은 눈을 가져야 한다면 할 말이 없다. 세상의 부조리와 부정에 대한 고발 정신이 남달라야 한다면 더욱 궁색해지는 모양새다.

 

나는 나의 가족사가 남보다 드라마틱하다고 강변할 생각은 없지만 분명한 것은 안온과 평화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점은 힘주어 말할 수 있다. 가깝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로부터 받은 모멸감과 불편한 경제는 지금껏 해소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지만 이상하게도 밑바닥을 긁는 생활을 용수철처럼 튀어오르게 하는 반감이 내게 없는 것은 타고난 성향이라고 해석할 수 밖에 없다. 생활은 궁핍하였으나 출세에 대한 방도를 염려해 본 적이 없다. 가족의 바램을 저버리고 전공을 철학으로 돌린 것도 그렇고 나에게 씻을 수 없는 굴욕과 상처 주었던 사람들에게 복수하는 심정으로 힘을 기르고자 악다문 적도 없다. 그 대신 내가 택한 생존의 방식은 나를 위로하고 내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존재를 찾는 일이었다. 솔직히 나는 문학개론 한 과목도 수강한 적이 없으므로 처음 시를 쓰면서도 이것이 시인지 아닌지를 판별할 능력이 없었음은 분명한 일이다. 이제야 ‘어렴풋이 시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감각이 스멀거리는 것을 보면 둔감하기 이를데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더럽고 치사한 세상을 더럽고 치사하게 살 수만은 없다는 자각이 남달랐던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라고나 할까?

 

내 생은 누구보다 치열하고 약육강식의 장벽을 뛰어 넘으며, 용감하게 헤쳐나가며 호위호식의 길로 뛰어나갔어야 하는데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아니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내가 생에 대한 반역이라고 말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나는 단지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내가 느껴보지 못했던 인간애를 내 힘으로 나의 촉수로 어루만지고 싶었다. 등단이라는 과정을 거치고 작은 상이나마 염치없이 받아 챙기면서도 좀처럼 문단이라는 강호에, 가히 무림 武林이라고 바꾸어 불러도 좋을 시림 詩林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던 것은 그 누구와의 비교를 거부하고( 이것이 열등감의 반증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시 잘 쓰는 시인으로 불리우는 것이 나의 시쓰기와는 무관하다는 오기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도대체 시를 잘 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시대의 조류라고는 하지만 조금 얼굴이 알려지면 성인이나 도인이 되는 사람들, 그윽하게 이 세상을 내려까는 눈길을 가진 시인들에게 주눅들 일도 없고 관심도 없다. 시 쓰기를 감정의 토로나 여기 餘技로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유구무언이다.

 

그렇다. 나는 나의 생을 반역했다. 반역한 나의 생 때문에 애꿎은 가족들이 고생을 도맡아 했지만 그 반역을 통하여 내 생을 다시 번역하면서 삶을 긍정하고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지려고 노심초사하고 있다.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물컹거리는 사랑의 힘과 마음을 어찌 부인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