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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 의 생애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1. 12. 30. 21:47

 

                                                                                               2011년 11월 30일 406 강의실

비트겐슈타인 [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오스트리아/영국 철학자 | 브리태니커

 

1889. 4. 26 빈~ 1951. 4. 29 잉글랜드 케임브리지셔 케임브리지.

오스트리아 태생 영국의 철학자.

개요

1925~50년 영국 철학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논리학 이론과 언어철학에 관한 독창적이며 중요한 철학적 사유체계를 제시했다.

 

제1차 세계대전중의 초기생애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의 뛰어난 제철업자의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이들은 모두 부모에게서 풍부한 예술적·지적 재능을 물려받았다. 부모는 음악적 재능을 지닌 사람들이었고 그들의 가정에서 음악은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14세 때까지 집에서 교육을 받은 뒤 수학과 자연과학을 중점적으로 가르치는 오스트리아의 한 학교에서 3년간 공부했다. 그후 베를린에서 2년 동안 기계공학을 공부했다. 1908년에 영국에 있는 항공학연구소에 들어가 대기권 상층부에서 연의 비행을 실험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곧 비행기 엔진을 개발하는 데 쏠리게 되었다. 맨체스터대학교 공학실험소의 연구생으로 등록하여 일하면서 프로펠러의 각 날개 끝에 역추진 제트를 달아보려고 생각했다. 또 그는 실험용 엔진을 고안하여 그 제작을 지휘했으며 시험비행에도 성공했다. 프로펠러의 고안과 관련된 문제들 때문에 그는 수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곧이어 수학의 기초를 이해하려는 욕구에 사로잡혔다. 버트런드 러셀의 저서 〈수학원리 The Principles of Mathematics〉(1903) 는 그에게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1911년 비트겐슈타인은 맨체스터에서 공학연구를 포기하고 케임브리지로 가서 러셀과 함께 연구했다. 그는 수리논리학 분야의 지식을 매우 빠르게 터득해갔다(→ 색인 : 논리학). 러셀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은 내가 가르쳐야 할 모든 것을 금방 알아버렸다"고 했으며, 비트겐슈타인을 알게 된 것이 자신의 삶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적 모험 가운데 하나"였을 뿐 아니라 "그는 아주 비상한 정열과 통찰력과 지적 순수성을 지닌 인물"이라고 술회했다.

비트겐슈타인은 1913년 내내 케임브리지에 머물면서 논리학 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러셀과 기나긴 토론을 하며 지냈다. 그뒤 노르웨이의 스홀덴으로 가서 논리학에 관한 연구에 전념한 채 은거생활을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오스트리아 군대에 입대해 처음에는 도하(度河) 부대에 있다가 나중에 포병부대에서 근무했다. 1916년에 러시아 전선에 배치된 곡사포 연대에서 포대관측병으로 복무하면서 용맹을 떨쳐 여러 가지 훈장을 타기도 했다. 그뒤 장교훈련을 받고 포병장교가 되어 1918년 이탈리아 전선의 한 야산포대로 전속되기까지 동부전선에서 근무했다.

 

'논고'시기

 

비트겐슈타인은 전쟁 동안에도 논리학과 철학의 문제들을 계속 연구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공책에 적어 군장 속에 넣고 다녔다. 전쟁이 끝날 무렵 이탈리아군의 포로가 되었을 때 그는 이 논고를 완성하여 영국에 있는 러셀에게 보냈다. 석방된 뒤 비트겐슈타인은 이 논고를 출판해줄 사람을 찾아다녔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그렇지만 결국 러셀의 영향력 덕택에 1921년 〈논리철학 논고 Logisch-philosophische Abhandlung〉(〈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1922)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논리철학 논고〉는 새롭고 심오하고 영향력 있는 저서로 널리 인정받았다. 이 책은 일련의 간결한 명제들을 주의깊게 배열하고 소수점을 사용해서 번호를 매긴 것이다. 이 책은 비록 75쪽에 불과하나 광범위한 주제를 포괄하고 있다. 언어의 본성, 말할 수 있는 것의 한계, 논리학·윤리학·철학, 인과성과 귀납, 자아와 의지, 죽음과 신비, 선과 악 등이 그 주제들이다. 〈논리철학 논고〉의 핵심적 물음은, 어떻게 언어가 가능한가? 어떻게 어떤 사람이 일련의 단어를 입밖에 냄으로써 무언가를 '말할' 수 있는가? 어떻게 다른 사람이 그를 이해할 수 있는가? 등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놀랍게 생각한 점은 사람들이 그 전에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문장들을 이해한다는 사실이었다. 그에게 떠오른 해결책은, 무언가를 말하는 문장(명제)은 '실재(實在)의 그림'이어야 하고, 그 의미를 '보여'주며 또한 세계의 어떤 상황을 보여준다는 것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의 그림이론은 종이 위에 씌어진 기호들과 외부세계의 어떤 상황 사이의 연관을 설명하는 것처럼 보였다. 명제가 그림이라는 점을 깨닫지 못하는 까닭은 명제를 완전히 분석된 형식으로 고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식 속에서 명제는 실재의 단순요소들과 상호 관련되는 단순 기호들을 배열한 것이며 따라서 '그림이 실재에 닿는다'(→ 색인 : 의미, 분석명제, 언어).

 

〈논리철학 논고〉가 지닌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언어의 한계에 대한 생각이다. 명제적 그림은 그것이 표상하는 상황과 정확하게 똑같은 수의 요소를 포함해야 할 뿐만 아니라 모든 그림들과 세계 내의 가능한 모든 상황은 똑같은 논리적 형식을 가져야 한다. 이 논리적 형식은 '표상의 형식'인 동시에 '실재의 형식'이다. 그러나 언어와 실재에 공통적인 이 형식 자체는 표상될 수 없다. "명제는 실재 전체를 표상할 수는 있지만 실재를 표상할 수 있기 위해 실재와 공유해야만 하는 것, 즉 논리적 형식을 표상하지는 못한다." "말해질 수 있는 것은 오직 명제를 통해서만 말해질 수 있으며, 따라서 '모든' 명제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어떤 것도 말해질 수 없다."

 

그밖에도 표상될 수('말해질 수') 없는 것으로 실재의 단순 요소들의 필연적 존재, 사고하고 의지하는 자아의 존재, 절대적 가치의 존재 등이 있다. 이러한 것들은 사고될 수도 없는데, 그 이유는 언어의 한계가 사고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이 실로 존재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장 자체는 말해질 수도 사고될 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통찰을 줄 수는 있지만 실제로는 무의미하며 결국 '버려야' 할 것이다. 〈논리철학 논고〉의 마지막 문장,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결코 진부한 말이 아니다. 이 문장은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어떤 영역이 '존재한다'는, 말할 수도 사고할 수도 없는 학설을 담은 매우 형이상학적인 주장이다(→ 색인 : 형이상학).

 

1919년 일상인으로 돌아온 비트겐슈타인은 아버지가 물려준 막대한 유산을 포기해버렸다. 그는 자신이 유산을 포기한 이유에 대해 돈 때문에 접근하는 친구들이 생길까 염려해서라고 말한 적이 있으나 그가 편안과 사치를 싫어한 것도 사실이다. 그의 생활양식은 극단적으로 단순하고 검소했다.

〈논리철학 논고〉가 자신이 철학에 기여할 수 있는 전부라고 생각한 비트겐슈타인은 다른 직업을 구했다. 그는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1920년부터 오스트리아의 여러 작은 도시에서 근무했다. 이 기간 동안 비트겐슈타인은 극도로 불행했으며, 자주 자살을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어린 학생들과의 관계를 생각하며 어려움을 견딜 수 있었다. 마침내 몇몇 다른 교사와 마을 사람들 사이에 심각한 알력이 생겨서 1925년 비트겐슈타인은 교사생활을 그만두었다. 몇 달 동안 그는 빈 근처 수도원에서 정원사 보조원으로 일했다. 그뒤 누이로부터 빈에 저택을 건축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를 받아들였다. 2년에 걸친 이 사업에서 그는 특유의 집중력과 독창성을 발휘했다.

 

비트겐슈타인의 음악적 재능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청년시절 클라리넷을 연주했으며, 어려운 고전음악을 휘파람으로 불 줄 아는 드문 재능을 지녔고 때때로 긴 악절을 휘파람으로 암송하기도 했다. 비트겐슈타인의 독특한 지성과 인격, 음악의 세련됨이 한꺼번에 드러난 사건이 있었다. 유명한 현악4중주단이 어떤 집에서 리허설을 하고 있었는데, 비트겐슈타인은 그때 소수의 청중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애써 참으면서 음악의 해석에 관해 몇 가지 겸손한 평을 했다. 당시의 목격자에 따르면 그는 결국 열정에 휘말려서 리허설에 끼어들었으며 연주자들은 처음에는 정중하게 무시했으나 나중의 리허설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의 지적을 완전히 받아들여 주로 그가 이끌었고 그의 반론과 충고도 마치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 자신이 이들의 리허설을 간섭하고 있는 것처럼 공손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제1차 세계대전 뒤 10년 동안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을 연구하지 않았지만 뛰어난 젊은 철학자 프랭크 램지와 논리실증주의를 창안한 이른바 빈 학파의 몇몇 성원 등 다른 철학자들과 가끔 만났다.

 

'철학적 탐구'의 시기

 

비트겐슈타인은 갑자기 철학 분야에서 다시 한번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1929년초 다시 케임브리지로 돌아와 트리니티 칼리지의 펠로로 임명되었다. 강의와 학생들이 받아 적은 강의 노트를 통해 그는 영어 사용권의 철학사상에 점차 강력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의 토론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의 지성의 힘, 열정적 진지함, 그의 생각과 방법의 신선함 등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비트겐슈타인의 강의는 흔히 스스로 질문하고 대답하는 형식을 취하는 즉흥적인 것이었는데, 그는 이러한 강의를 통해 새로운 철학적 관점을 창출하고 있었다.

1929년 케임브리지로 돌아온 때부터 23년 뒤 죽을 때까지 비트겐슈타인은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수많은 노트, 논고, 타이프 친 원고 등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다. 이러한 저술작업은 〈철학적 탐구 Philosophische Untersuchungen〉(1953)에서 절정에 이르렀는데, 이 저작은 그가 바란 대로 사후에야 발간되었다. 그뒤 계속해서 관련된 많은 저술들이 편집·발표되었다. 1929년에 새로 시작된 그의 사고는 점차 〈논리철학 논고〉와는 전혀 다른 관점에 이르렀다.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은 이전의 견해들을 거부하게 되었다. 한 명제는 하나의 그리고 단 하나의(one and only one) 완전한 분석을 갖는다. 그래서 모든 명제는 하나의 확정적 의미를 갖는다. 언어와 실재는 각각 단순한 요소들로 이루어진다. 언어·명제·사고 등의 본질이 존재한다. 세계의 선험적(a priori) 질서가 있다(→ 색인 : 분석철학, 선험적 지식).

 

한편 비트겐슈타인은 모든 표상이 공통의 논리적 형식을 공유해야 한다는 가정을 거부함으로써 '말해질 수 없는 것'에 관한 견해도 버렸다. 〈논리철학 논고〉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 사용에 무한히 다양한 종류가 있다는 생각은 잘못이며 이 다양성 밑에는 통일적 본질이 있을 수밖에 없고 철학자는 이것을 꿰뚫어보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철학적 탐구〉에서는 이러한 믿음이 환상에 불과하며, 다양성 속에 숨어 있는 통일성이란 없다고 주장했다. 철학자는 기억, 사유, 낱말이해, 규칙준수 등의 성질에 관해 이야기할 때 당혹감을 느끼고, '지식이란 무엇인가?', '의도란 무엇인가?', '주장이란 무엇인가?' 등을 고집스럽게 계속 질문한다. 철학자의 이런 당혹감과 고집을 덜어주거나 없애주는 것은 눈앞에 활짝 열려 있는 것, 즉 일상적인 담화나 의사소통에서 사람들이 언어를 사용하거나 언어를 가지고 작업할 때 그러한 말을 적용하는 다양한 사례들을 기술하고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기술이 철학적 사고를 그릇되게 만드는 편견의 힘을 깨뜨리며, 인식·의도·주장 등의 본질이 존재해야만 한다는 헛된 믿음을 파괴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놀이를 예로 들어 독자들이 그런 놀이들에 공통성이 있다는 가정을 버리게 하려고 애썼다. 즉 어떤 놀이는 재미있지만 모든 놀이가 그런 것은 아니다, 또 어떤 놀이는 경쟁하거나 이기고 지는 것이지만 모든 놀이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모든 놀이에 특징이란 없다, 놀이들 사이에는 '겹치고 엇갈리는' 유사성의 그물만이 있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가족유사성'(family resemblance)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그에 따르면 '놀이'라는 단어가 가족유사성만을 갖는 여러 경우에 적용되는 것처럼 철학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는 단어들, 즉 '인식'·'명제'·'기억'·'의도'·'사고'·'규칙'·'믿음' 등도 가족유사성만을 갖는 여러 경우에 적용된다. 예를 들어 어떤 것이 믿음이라고 불리는 까닭은 그것이 과거에 믿음이라고 불린 것들 중 어떤 것과 유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 용어의 적용이 과거의 경우로부터 새로운 경우로 확장된다는 것은 마치 물레에서 실을 뽑을 때 가닥과 가닥을 서로 꼬는 것과 같다. 그 실의 힘은 어떤 하나의 실가닥이 이 실 전체 길이만큼 길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많은 실 가닥들이 서로 겹쳐 있기 때문에 유지된다(→ 색인 : 보편자, 언어놀이).

 

비트겐슈타인의 2번째 철학적 관점이 지닌 뚜렷한 특징 중의 하나는 개념이 어떻게 행위와 그에 대한 반응과 연결되는가, 즉 인간의 삶에서 개념이 어떻게 표현되는가에 관심을 두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제공하고 있는 것은 사실상 인간의 자연사에 관한 소견들이다"라고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다. 낱말들의 형식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당혹감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우리 자신에게 물을 경우 줄일 수 있다. '어떤 경우에, 어떤 목적으로 우리는 이것을 말하는가? 어떤 종류의 행위가 이 낱말에 수반되는가?(인사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 어떤 장면에서 그리고 무엇 때문에 그런 낱말들이 사용되는가?' 비트겐슈타인의 목표는 개념들의 기능과 유의미성이 만져볼 수 없는 정신영역에서가 아니라 그 개념들이 끼어들어 있는 인간 삶의 형식(forms of life)에서 생겨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논리철학 논고〉가 일반적으로 절찬을 받았던 데 비해서 〈철학적 탐구〉에 대한 반응은 찬사와 비난이 엇갈렸다. 어떤 철학도는 그 책의 수수께끼 같은 문체와 비체계성에 당황했다. 어떤 사람은 정밀성과 진지함에서 그 책이 〈논리철학 논고〉만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 책이 철학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고 풍부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1939년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분석의 대가 G. E. 무어가 맡고 있던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철학교수직을 승계했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 비트겐슈타인은 다시 케임브리지를 떠나 런던에 있는 가이스 병원에서 직원으로 일했으며, 나중에는 로열 빅토리아 병원에서 실험실 보조원으로 근무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그는 철학문제들에 대한 사고와 저술을 계속했다. 1944년 가을 그는 다시 케임브리지로 돌아와 강의와 토론을 했다. 그러나 그는 철학교수로서 점점 더 완고해졌고, 1947년말 마침내 교수직을 그만두었다. 그는 〈철학적 탐구〉를 완성하는 데 자신의 모든 시간과 정력을 바치고 싶어했다. 또 '누구와도 얘기하지 않고 혼자서 생각할' 필요를 느꼈다. 그는 건강이 더이상 허락하지 않을 때까지 아일랜드 서부 해안가의 한 오두막에서 머물렀다. 그뒤 대부분의 시간을 미국과 영국의 여러 친구들과 함께 보냈다. 1949년 가을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그 사실 때문에 괴로워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때 그는 더 살려는 소망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년 뒤 죽을 때까지 비트겐슈타인은 정열적으로 작업을 계속했다.

 

평가

 

자신이 창안한 철학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규정하기 힘들다. 그는 〈철학적 탐구〉를 불완전한 것으로 여겼으며, 이를 완성하는 데 엄청난 정력과 집중력을 쏟았으나 결국 단념하고 말았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시대의 빈곤과 어둠 속에서 이 책이 적어도 한두 사람에게는 빛을 비춰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물론 그렇게 될 것 같지는 않다"며 자기 저작의 운명에 대해 비관하는 편이었다. 그는 자신의 사고가 당시의 과학적·수학적 시대정신에 낯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마치 다른 문화에 속하는 사람들을 위해 글을 쓰고 있는 듯이 느꼈다. 의심할 나위 없이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을 좀더 자각적인 것으로 만들었으며, 철학의 성질에 관한 새로운 이해방식을 도입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철학문제는 해결책을 찾아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정리(定理)도 증명할 수 없으며 어떤 가설도 시험될 수 없다. 대신 철학문제는 우리 자신의 사고의 혼돈이요 뒤얽힘이다. "철학은 왜 그렇게 복잡한가?", "철학은 '전적으로' 단순해야만 한다. 즉 철학은 우리가 어리석게 얽어놓은 우리 사고의 매듭들을 풀어준다. 이 일을 하기 위해 철학은 이런 매듭들이 복잡한 만큼이나 복잡하게 움직여야 한다. 비록 철학의 결과는 단순하지만 철학이 성공하려면 철학의 방법은 단순할 수 없다. 철학의 복잡성은 주제의 복잡성이 아니라 우리가 매듭지어놓은 앎의 복잡성이다"라고 말하며 그는 올바른 종류의 철학적 사고가 낳는 결과는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혼돈을 해체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모든 개념적 연구에서 인간의 매듭지어진 앎을 '풀어내는 말'(das erlösende Wort)을 찾으려 했다.

N. A. Malcolm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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