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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

[스크랩] 비트겐슈타인과 노장사상 - 이호영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2. 1. 23. 15:24

 

 

 

비트겐슈타인과 노장사상 - 이호영

      "천지는 나와함께 生하고 萬物은 나와 더불어 하나가된다." -장자-

 


오늘날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의 비교연구가 비근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나 이 둘을 비교 연구하는 일 대부분은 안하느니만 못한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실 지금 쓰고 있는 이 Paper의 경우도 그러한 경우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것은 불을 본 듯이 환하지만 20세기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東과 西라는 벽에 갇혀 있다는 것도 우습고, 더 나아가서 동과 서라는 것도 우리는 그것을 실체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비트겐슈타인의 지적대로 언어의 용법일 뿐이라는 생각에 어리석게도 동서의 비교를 시도해 본다.

그러면 먼저 노장사상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나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과 비교를 하도록 하겠다.


노장사상은 동양에서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켄필드의 경우 선불교를 상당히 고유한 것으로 취급하였지만, 사실은 전혀 고유한 것이 아니며, 선불교의 거의 대부분의 사상이 노장사상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선불교는 승복을 입은 노장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또한 노장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문학, 미술, 병법, 처세술, 치세술등이 있고 동양의 형이상학적 전통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노자와 장자는 사실상 조금 다른 사상가이다. 물론 장자가 노자에게 강력한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그 드러나는 경향성은 상당히 다른 면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같이 다루어지기 쉽지 않은 사상가이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는 이 둘의 일부분이라도 같이 취급하고자 한다.


1. 노자


史記의 저자인 司馬遷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B. C. 604년 9월 14일 楚나라 苦縣의 礪鄕 曲仁里의 한 여인이 오얏나무에 기대어 한 아이를 낳았다. 이 아이의 어머니가 流星을 보고 찬미한 뒤에 임신이 되어 62년간 태내에 있다가 태어났다고 한다. 62년간 태내에 있었으므로 태어나자마자 말을 할 수 있어서 자기의 이름을 李耳라고 지었다 고하며, 머리카락조차 백설같이 희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老子라고 불렀다고 한다. 말년에는 주나라 왕실의 史官을 지냈다고 한다. 태사관을 지내다 권력에 염증을 느끼고 函谷關을 통해 중국을 떠나려던 老子는 그곳의 수문장인 尹喜의 부탁으로 道와 德에 관한 글 5000자를 지어 주었다고 한다. 전설이 보여주듯이 도덕경이라는 책은 노자라는 인물만큼이나 알 수 없는 것이다.


 ㄱ)길道


노자가 가장 역점을 두는 면은 道이다. 보통 道라고 하며 무척 이나 심원하고 신비적인 것이며 어렵고 뭔가 다른 것으로 보는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그냥 동네에 있는 골목길부터 시작해서 국도 고속도로 등의 찻길이나 인도 등산로 등을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노자가 말하는 길 역시 도로라는 의미에서 시작하여 형이상학적인 의미를 함축하는 것이다. 노자가 말하는 길이라는 것은 항상성을 지니고 운동하는 사건의 전체이며, 모든 변화의 핵심으로 끊임없이 生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길은 이름을 지닐 수 없다. 즉 개념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또한 이 길은 사물의 핵심이지만 비어虛있다고 설명된다. 옛날 사람인 노자에게는 사물을 인식하는데 있어서 그 사물이 있는가? 없는가? 또는 인식 가능한 것인가 혹은 이 물질이 절대정신을 지향하여 진화하는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었고 오직 이 사물의 기능功能의 가능성에만 관심이 있었다. 노자는 어떤 사물이 자신의 기능을 가능케 하려면 그 가능의 여지가 있어야 한다고 보았으며, 또한 사물의 기능은 그 핵심이 비어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계속해서 이 '빔'은 여성적인 상징을 지니고 있다. 노자 자신도 자연스럽게 암컷의 문 또는 계곡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노자는 여성의 다산성과 포용성을 길에 빗대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길은 계속해서 순환하며 움직인다. 이 움직임이 바로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제우스의 아버지로 자신의 자식들을 잡아먹는 티탄인 크로노스라고 말할 수 있다. 앞에서도 길은 끊임없는 생성이며 과정이라고 하였는데 맥락을 같이하여 길은 시간의 추이와 작용의 의미를 지닌다.


여기에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으로 노자의 세계관에는 천지를 창조한 하느님은 없다. 하느님天이 있는데 이 하느님은 공간 밖, 시간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시간 안, 공간 안에 있으며, 따님地과의 관계에서 볼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이것은 2원 대립(Binary opposition)이라는 ‘야생인들의 사고’ 틀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리고 이 하늘과 땅 모두는 하나의 氣가 나누어진 것이다. 이 두 기 天地가 혼합되어 있는 것이 길의 모습이다. 즉 길은 無極이면서 太極이고 道이면서 器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노자의 길이란 기의 움직임과 모습이고, 원초적인 기의 혼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길의 과정을 노자는 “스스로 그러한 것(自然)”이라고 하였다. 이 스스로 그러한 길을 지니고 있는 만물은 자기의 스스로 그러함에 따라 존재하는 것이지 누가 만든 것이 아니며 인간 역시 자신의 길에 따라 생성된 존재이지 누가 만든 것이 아니다.


 ㄴ)얻음德


그러면 얻음德이란 무엇인가. 얻음은 길의 실천적인 모습이다. 길이 천지의 움직임이면 얻음은 그 움직임으로 해서 되어지는 것을 말한다. 인간의 경우 길은 삶 바로 그것이고 얻음은 살아가는 동안 쌓여서 마치 천성처럼 되어버리는 것들을 지칭한다. 인간의 신체와 의식이 자신의 길에 따라 막힘없이 잘 흘러가고 그 흐름으로 새로운 모습을 지녀갈 때 그 모습을 얻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일견 버릇과도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버릇보다는 조금 더 심층적인 무의식적으로 사람들의 삶에 각인된 것 혹은 문화와 비슷하다고 보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길道을 얻어德서 인간들은 문명을 성립시켰다. 노자는 문명을 이름名이라고 부르는데, 개념화되지 않는 길이 개념화되면서 문명이 성립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언어가 생기고 사물에 이름이 부여되면서부터 사물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이 성립하고 존재의 확실성이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즉 문명은 정치권력에 의해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이름 붙이는 행위 안에 문명의 핵심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이 소박한 이름 붙이기의 특징은 거의 항상 이원론적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하면 비길 수 없이 지고한 한 이름을 절대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에 대비되는 또 다른 이름을 두고, 신성한 이름이 지니게 되는 권력을 분산시키고 상대화하고 상징화하여 이름과 이름의 내포를 이루는 권력을 유희로 만드는 창조적인 작업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소박한 이름 붙이기에서는 개념보다는 이미지로 이름이 붙여지고 보편이나 추상보다는 은유나 환유로 이름이 상징화될 뿐만 아니라 상호간에 내적으로 결합하고 분해되는 작용이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소박한 이름 붙이기는 자신의 삶과 인식의 틀에서 우러나오는 심상을 역동적으로 결합시켜 모든 것에서 질서와 문명을 만들어 내는 것이므로 길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서 의식적으로나 지식적으로 무리한 행위로 이름을 부여하는 행위는 자연적인 존재로서의 자신의 자연성을 상실하게하고 부드럽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상실하게하고 죽음으로 달려가는 무리라고 한다.


우리의 여기에서 老子를 결코 소위 말하는 신비주의자라고 하여서는 안 된다. 그는 극도의 유물론자였다. 개념을 거부한 극도의 구체, 너무 구체적이어서 신비적이라고 느껴지는 사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老子는 우리에게 사상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老子가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사상과 개념이 아니라 삶의 구체적인 모습과 과정이라는 것이다. 즉 삶의 느낌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보아야겠다.


2. 장자


장자의 경우는 중국의 전국시기에 어지러운 세상을 살면서 자신이 놓여 있는 문화와 환경을 상대적으로 바라보고 그 상대적인 가치를 지닌 문화를 뛰어 넘어 자연의 스스로 그러함(自然)과 일치하여 노니는(逍遙)경지의 신비적인 사상을 제시하였다.

대체로 장자는 노자와 비슷한데 여러 가지 전형적인 인간상을 제시하였는데 이들이 至人, 天人, 神人, 그리고 眞人이다.

이 개념들은 衆人과 구분되는 개념으로 자연으로부터 소외되어 미미한 존재가 아니라 천지와 함께 하고 지극한 경지에서 노니는 사람을 말한다. 그리고 인간을 스스로 그러한 우주의 운행으로부터 소외시키는 것을 莊子는 仁義禮樂과 마음이 제멋대로 달리는 것坐馳으로 보고 이것은 인간의 본성을 어그러트린다고 비판한다.

장자에게 있어서 이 어그러진 본성을 회복하는 일이 우주와 합일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몇 가지 방법론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그 방법론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心齋와 坐忘 그리고 縣解라고 하겠다.

 ㄱ) 心齋와 坐忘


 장자가 말하는 심재란 제사지낼 때 몸만 깨끗이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깨끗이 해서 외물이나 사욕, 또는 잘못된 감각이나 分別知에 의하여 흐려진 상태인 成心이나 機心, 또는 賊心같은 것을 실천적인 수양에 의하여 본래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심재를 장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顔回가 말하기를 ‘저는 더 이상 정진할 수 없습니다. 감히 좋은 방법을 묻습니다.’ 仲尼가 대답하여, ‘齊戒하라, 내가 너에게 말하는 것은 마음이 있어서 하는 것이 쉽겠는가? 쉬우면 스스로 그러한 경지에 맞지 않는다.’ 안회가 말하기를 ‘저희 집은 가난해서 술을 마시지도 않고 매운 채소를 먹지 않은 지도 오래 되었습니다. 이만하면 재계가 되었다고 하겠습니까?’ 중니가 말하기를 ‘그것은 祭祀할 때의 재계이지 마음의 재계는 아니다.’ 안회가 묻기를 ‘감히 심재를 묻습니다.’ 중니가 말하기를 ‘마음을 하나로 하고 섞지 마라.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을 것이며 마음으로 듣지 말고 氣로 들어라. 듣는 것은 귀에 머물 뿐이고 마음은 현상에 부합할 뿐이다. 기라는 것은 虛하여 일체의 만물을 받아들인다. 오직 道는 깨끗한 곳에만 모인다. 이 虛한 것이 심재이다.’”


여기에서 보이듯 심재란 우리가 사물을 접촉할 때 발생하는 感覺知나 사고 작용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버리고 그러한 知로 인하여 사물을 판단하는 주체로서의 마음을 깨끗이 비움으로써 만물을 하나로 볼 수 있는 비어있는 상태로서의 마음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또한 심재에는 사물과 나의 대립, 또는 사물과 내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하는 것을 해소하려고 하는데, 이를 위하여 장자는 ‘氣’라는 개념을 들여오고 있다. 장자에 의하면 氣는 만물의 생성소멸을 주재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해보면, “심재란 비어있는 것”이고 이 “비어있음은 또 氣와 상통하는 것”이므로 심재라는 것은 마음의 본래 상태인 虛靜을 회복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氣의 본질 역시 비어있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이 氣로 환원되면서 장자는 만물을 다 하나로 인식하는 단계를 설정하는데 이것이 곳 심재인 것이다.


다음으로는 더 적극적인 측면으로 볼 수 있는 것은 坐忘이라고 하겠다.

안회와 중니의 대화로 진행되는 문장에서 안회는 먼저 자신은 仁義와 禮樂을 잊어버렸다고 말한다. 그러나 중니는 아직 부족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안회는 더 나아가서 “‘저는 坐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중니가 놀라서 물었다. ‘무엇을 좌망이라고 하느냐?’ 안회가 말했다. ‘四肢와 몸을 잊어버리고, 귀와 눈의 작용을 없애고, 형체를 떠나고 지식을 버려서 크게 통하는 道와 하나 되는 것을 일러 좌망이라고 합니다.’ 중니가 말했다. ‘큰 길大道과 한 가지가 되면 좋아하고 미워하는 차별심이 없어지게 되고 변화에 순응하면 하나에 집착하는 마음이 없어진다. 너는 과연 賢人이다. 나 너의 뒤를 쫓으리라.’”

여기에서 보이듯 합리적인 문화의 작용인 仁義禮樂을 잊는 것으로는 인간의 본성을 회복할 수 없고 오직 '物我兩忘'의 좌망을 통해서만 인간이 자기의 性을 회복하여 一氣로 통합될 수 있다. 그 일기로의 통합이 바로 ‘物化’라는 개념과 상통하게 되는 것이다. 이 ‘物化’의 인식경계에는 만물사이의 優劣이나 美醜또는 善惡과 같은 가치판단이 들어설 수 없다는 것이 바로 ‘萬物齊同’이고 ‘齊物’인 것이다.

 ㄴ) 縣解

縣解란 거꾸로 매달린 상태에서 풀려나는 것으로서 속박으로부터 해방을 의미한다. 현해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본문을 살펴보면. “대저 얻는 것은 때時이고, 잃는 것은 순서順이다. 때에 편안하고 운명에 따라 처하면 슬픔과 기쁨이 들어오지 못한다. 이를 옛날에 일러 縣解라고 하였다.”


즉 縣解란 인간이 자신의 본성과 운명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仁義禮樂이나 마음의 坐馳 또는 感覺的 欲求로써 집착에 대한 解放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집착에서 해방된 사람은 모든 만물의 절대적인 자유를 인식할 수 있고, 이 “만물이 그 자체로서 절대 평등하다”는 '萬物齊同'을 알 수 있다고 하며 장자는 이러한 인식을 갖는 해방된 사람을 ‘明’이라고 부른다.


지금까지 고찰한 바에 의하면 심재 좌망은 신비체험을 위한 수련의 단계를 말하는 것이고 현해라는 개념은 이러한 수련을 통해서 인간에 대한 선입견이나 생의 애착을 버리고 해방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장자가 주장하려는 것은 만물은 하나의 氣이고 萬物齊同이라는 것이며, 인간들이 이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그 본성이 어긋나있기 때문이므로 이것을 아는 眞人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우며, 해방되어 우주와 함께 스스로 그렇게自然 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ㄷ) 眞人

그러면 眞人은 어떤 상태의 경지에 이른 사람인가?

먼저 그 마음 상태를 보면 무엇보다도 비어있다 虛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하나로 합하고 모든 곳이 생하는 곳이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도를 함축하여 도와 함께 하나라는 것이다. 그 다음은 고요하다는靜 것으로서 곧 그 마음이 천지의 거울이며, 만물의 거울이 되는 것이다. 즉 진인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비워 道와 함께 함으로써 천치를 비추는 거울이 되는 상태에 이른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지적할 수 있는 진인의 모습은 우주와 합일되어있다는 면이다. 모든 사물의 상대성을 극복하고 좌망을 통해 一氣에 함께 된 진인은 인간과 자연이 간격 없이 만나는 ‘以天合天’으로 세계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明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明은 곧 [齊物論]에서 말하는 道樞와 같은 것으로 도추는 일체사물들의 중추이며 중심관계에서 사물을 인식한다는 것으로 이러한 인식이 배경이 되면 모든 사물에 관한 거대한 긍정大是이 있게 된다.


이러한 긍정의 세계에서는 모든 物에 대한 논의는 다 상대성 이상의 가치를 지니지 않게 되고 오직 끊임없이 생성 변화하는 우주와 하나가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하면 결국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게 되고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장자의 사상에서 무엇보다 신비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齊物論]가운데 유명한 [胡蝶之夢]일 것이다. 여기에서는 ‘物化’라는 개념이 제시되고 있는데, 이 ‘物化’는 사물들 사이의 차별이 없어지고 사물과 내가 동화하는 경지를 가리키는 말로서 사물의 구별을 넘어서 道안에서   氣로서 모든 것이 하나가 되는 절대자유의 신비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경지가 바로 진인의 경지인 것이다.


장자의 사상은 나와 사물의 구분이 소멸되고 모든 차별을 넘어서 천지만물과 하나 되는 신비적인 大我에 이르는 것이다. 이 대아를 실현한 사람이 바로 진인이다. 그래서 진인은 “천지는 나와함께 생하며, 만물은 나와 더불어 하나가 된다.”라고 말하며 “홀로 천지와 더불어 왕래하되 만물에 대하여 교만하게나 긍지를 느끼지 않는 사람인 것이다.” 

이만하면 노자와 장자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된 것으로 보고 논의를 진행하도록 하겠다.


3. 비트겐슈타인의 견해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철학의 목표는 철학적 문제의 해소에 있다. 철학은 과학의 일종이 아니기 때문에 철학은 과학과 구분되며, 과학적 방법은 철학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리하여 그는 철학적 문제의 특수성을 언어의 오해에서 찾는다.


초기에는 언어의 논리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통하여 가능하다고 생각하였고, 후기에 가서는 이러한 논리만이 유일한 기능이 아님을 깨닫고 좀 더 광범위한 철학적 탐구를 한다. 마침내 그는 철학자들이 언어의 오용에서 비롯된 일종의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 질병의 원인을 찾아 철학자들로 하여금 자기치유의 능력을 함양하는데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하겠다.


“철학은 어떠한 경우에도 언어의 실재적 사용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되는데, 그것은 결국 그 용법을 서술할 수 있을 뿐이다.” 또 변혁을 목표로 하는 과학과는 달리 철학은 “있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둔다.”라고 하여 과학과 분명히 구분하였다.


 ㄱ) '관행practice'


외형화 된 인상은 언어에 생명이나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없다. 인상이나 사유도 언어에 생명이나 의미를 제공해 줄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유는 이해의 필수조건이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하고 있듯이 우리가 인상을 외형화 시킬 가능성을 생각하는 즉시, 인상이 이해를 도와준다고 추정되었던 효과는 사라지고 만다. 인상은 이러한 효과를 그 위치상 마음속에 가지고 있다고 사유되었을 뿐이며, 마음이란 인상이 이해를 제공하는 마술적인 힘을 지니고 있기나 한 듯이 인상을 애매모호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그림이나 공간적인 다른 대상들로 번역될 경우, 인상은 그러한 마술적인 힘을 상실한다.


“붉은 조각을 상상하라.”는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관행을 언어의 기반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언어가 기능을 발휘하는 데 사유 형식은 아무런 필요가 없다는 견해를 가질 수 있게 된다.

“언어 속에서 인간은 서로 일치한다. 이것은 의견의 일치가 아니라, 생태 형식Lebens Form의 일치이다.”


 ㄴ) 그냥 하는 것just doing:


비트겐슈타인은 {탐구}에서는 이렇게 썼다. “내가 규칙에 복종할 때, 나는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규칙에 맹목적으로 따른다.” 여기에서 맹목적이란 정신적인 선택 작용이나 심적인 '해석'없이, 다시 말해서 ‘어떠한 사유도 없이’라는 뜻이다. 사유가 없이 이렇게 하는 행위가 관행이며, 관행이 곧 언어의 근저이다.

그러나 이런 논의에도 부정적인 시각이 가능한데 자동기계처럼 예견이나 목적 혹은 창조성이 결여된 행위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결코 옳을 수가 없다.


II. 언어 게임.


모든 기호는 그 자체로는 죽어 있는 것 같다. 거기에 생명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쓰임 속에 살아 있다. 그것은 저절로 생명을 얻는가? 아니면 쓰임이 곧 그것의 생명인가?


 ㄷ) 관습: 동일한 것


언어의 구성 요소인 ‘그냥 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유형화되며, 이것은 동일한 것을 행하는 각각의 사례로 되어 있다. 그냥 하는 것의 이러한 유형들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해 본다면, 그것은 인간학적인 의미에서 관습custom들이라고 할 수 있다. 언어 게임이란 일종의 사회적 관습으로서, 언어는 이러한 관습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언어 게임을 관습으로 보는 것은 언어 게임에 대한 시야를 넓혀 준다.


“삶을 일종의 베 짜기로 볼 경우, 이러한 유형에서는 완벽한 것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며, 항상 다양한 방식으로 변화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개념 세계 속에서 동일한 것을 계속 보면서, 변화들을 되풀이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개념이 동일한 것을 취하는 방식이다. 왜냐하면 개념이란 오직 하나의 경우에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용된 ‘동일한 것’의 분명한 의미는 수많은 사례들을 통해서 전달될 수 있다. 언어 게임과 동일한 것을 하는 유형들의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동일한 것'이라는 개념은 그와 같은 수많은 사례들을 열거함으로써만 소통될 수 있다. 따라서 '동일한 것'을 제대로 사용할 줄 안다는 것과 결코 다른 것이 아니며, 이러한 앎은 '그냥 한다는 것'을 배우는 것으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ㄹ)생태 형식(Lebens form)


언어 게임이 지니는 두 가지 중 첫 번째 특징:

1)하나의 작은 행동 유형은 더 큰 유형에 포섭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 간의 상호 작용의 유형을 바꿈으로써 의미를 바꾸고 있다. 이 때 상호작용의 유형이란 순전히 '얻음德'의 유형을 말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내적 유형과 그것의 배경을 이루는 더 큰 유형을 생태 형식이라고 부르자고 했다. 결국 어떤 개임의 의미나 의의는 언어 개임의 뿌리인 생태 형식이 지닌 기능의 일부이다.


 ㅁ) 언어란 언어 게임들의 모임이다:


언어 게임이 지니는 두 가지 중 두 번째 특징:

2)언어 게임이란 최소한 어느 정도 분리 가능하고 원자적인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즉 '경례'라는 게임을 해군에서 떼어낼 수 있으며, 그렇더라도 그 밖의 모든 것은 어느 정도 동일한 것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 언어 게임이란 한 민족이 지닌 관습들의 무대와도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언어란 동질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이질적이고 가변적이며 분리 가능한 언어 게임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다. 각각의 언어 게임은 단어에 역할을 부여하는 하나의 유형화된 행위이다. 언어 게임은 보다 광범위한 유형의 상호 작용에 놓임으로써 의미심장한 중요성을 얻게 된다. 이러한 상호작용 역시 '德'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가장 미세한 사유조차 철저하게 배제하고, 언어를 그 풍부한 활용 속에서 자신의 의미와 의의를 완벽하게 전달해 주는 것으로 바라볼 수 있다.


 ㅂ) 한 단어의 역할:


언어 게임 속에서 하나의 단어가 지니는 역할과 기능과 쓰임, 언어 게임의 두 가지 형태:

1)인위적으로 구성된 언어 게임 ― 자연적 언어 게임과 본질적인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분석이 용이하다.


2)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언어 게임으로서 자연언어의 일부를 이룬다 ― 더 복잡하고, 다른 수많은 언어 게임들에 의해 둘러 싸여 있다. 분석이 쉽지 않다. 이 둘의 비교를 통해서 언어의 다양한 적용 방식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한 단어의 의미는 그 단어와 관련된 사물이나 이 사물의 관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비트겐슈타인이나 선과는 상반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의미란 언어 게임 속에서 한 단어가 지니는 역할이다.


명시적 정의(ostensive definition)는 어떤 단어가 지시하는 대상을 직접 손으로 가리키면서 동시에 그 단어를 말로 함으로써 한 단어의 의미를 가리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명시적 정의가 단어와 사물 나아가 사물의 관념과 단어를 연결시키는 것을 배우게 되지만 일상 언어에 있어서 무척이나 공허한 생각이다. 언어 게임은 그 연관관계에서 파악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명시적 정의를 통해서 저 대상을 '지시refer'함으로써 그 단어의 의미를 가리킬 수는 없다. 단어의 의미는 언어 게임 상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ㅅ) 수많은 역할들


단어는 사물이나 관념을 가리키는 일만 하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 다양한 일을 수행한다. 하나의 단어는 체스용 말 사이에 비교가 가능하다. 말 혼자서는 단순한 나뭇조각이듯, 단어 역시 혼자서는 단순한 소음에 불과하다. 언어 게임이 단어를 단어이게 해준다.


즉 비트겐슈타인이 '다섯 개의 빨간 사과'에서 지적하듯이 단어의 지시론적 의미론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act와 언어의 사용use의 문제인 것이다. 또 인간의 관습은 수없이 많기 때문에 단어들은 그 관습과 언어 사용을 따라서 수 없이 많은 의미를 파생시킨다. 그래서 한 단어에 대해 어떤 하나의 관념을 대응시키는 것이 아니라 관습적으로 그냥 하는 것이다. 이 그냥 하는 것을 통해서 어떤 상호 작용의 유형 속에 참여할 수 있는 기술을 습득하는 데 있다. 이렇게 그냥 하는 것은 언어 게임 속에서 단어를 사용하는 중에 있게 된다. 이러한 의미의 '개념'에서는 어떠한 정신적인 속성들도 배제된다.


III. 도와 언어의 동일한 토대


중심점:


虛虛롭게 소요하는 자가 바로 도인이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비웠기 때문에 허허로이 소요하고 모든 좌망을 통해 모든 것과 일체가 되고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도인이 자기를 비웠다고 해서 일체의 언어를 발하지 말아야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고, 두 번째는 사유 없이 모든 것과 함께 되어서 말하는 것이 바로 도인이 추구하는 점이다. 노장에서는 사유 없는 행동을 이룬다德는 것은 무한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만약 종교의 추구 목표가 삶과 죽음이라는 신비에 대한 최종의 해결에 있다면 그것은 사유가 완전히 사라질 때에만 성취될 수 있다.


삶과 죽음에서의 해방은 모든 것과 함께 되어 사유로부터 자유로이 살아간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에 있어서 언어 교환을 가능케 하는 행동 역시 사유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은 사유에 관한 노장의 교리와 일맥상통하며 그 근거에 있어서도 노장에서 말하는 것과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해의 위협을 무릅쓰고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언어는 신비적인 토대를 가지고 있다고.


 ㅇ) 한 가지 오해


이 오해는 데카르트가 인간을 사유하는 정신과 연장으로 분리하였기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인간의 자아는 외계에서 고립된 사물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델에서 보자면 사유를 갖지 않는 인간이라는 개념은 일종의 말소과정을 통해 이해될 뿐이다. 즉 그들은 완전히 빈 공허한 마음, 내용 없는 내부의 것, 정신적인 진공상태 등을 상상한다. 바로 여기서부터 비트겐슈타인을 순전히 행동주의자로 보는 경향이나 道개념에 대하여 갖는 반감 등이 생겨나는 것 같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의 진정한 목적은 - 방법은 다르지만 道의 목적도 마찬가지다. -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라는 이러한 그림 전체를 타파하는 데 있다. 사적인 실체를 지시함으로써 의미를 얻으려는 ‘사적’ 언어가 무의미함을 비트겐슈타인은 여러 가지 입장에서 보여주려는 이유이다.


 ㅈ). 삶이 바로 길道이다.


언어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역설에 부닥치게 된다. 즉 언어로 보자면 우리는 모두 道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 몇 가지 지적할 점이 있다.

보통 길道라고 하면 인간이 모두 자연적인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문제는 모든 사람이 불성이 있다는 데 있다. 그렇게 때문에 모든 사람은 모두 깨달은 사람이 된다. 그래서 이 깨달음은 이중적인 면을 지닌다. 첫째는 불성 속에서 산다는 것은 사유 없이 산다는 것이고, 둘째, 사람들은 그들의 참다운 본성의 실현을 방해하는 사유들을 계속해서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본성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실현을 방해하는 것은 사유이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언어는 사유를 필요치 않으며, 이해도 사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언어를 이해하는데 있어 사유가 하는 일이란 하나도 없다. 사유를 모두 벗어버릴 때 남게 되는 것, 그리고 사유가 필요치 않을 때도 엄연히 존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의 흐름이고, 어떤 것을 그냥 하는 유형화된 양식들이며, 관행이고, 길道의 나타남이다.

 맺는 말


비트겐슈타인은 과연 이와 같은 해석을 의도했는가? 물론 비트겐슈타인은 신비체험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전 사상에 이러한 체험이 스며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같은 해석을 의도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탐구}의 입장에서 비추어 볼 때 언어라는 현상은 노장에 있어 도의 현현이라고 할 수 있는 사유 없는 행동에 똑같이 근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도는 인간의 삶의 본성이다. 이것은 언어와 같은 것이다. 이것이 의식됨 없이 드러나서 자신의 본성에 역행하지 않을 때, 인간은 문명은 자연과 간극을 메우게 되는 것이다.


“나는 아무런 교리가 없고 따라서 아무런 말도 필요 없는 종교를 상상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확실히 종교의 본질은 말할 수 있는 것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것이다. 오히려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 자체가 종교적 행위의 한 요소일 것이며, 결코 이론은 아닐 것이다.”


결국 비트겐슈타인과 노장 사상이 하려고 한 것은 무엇인가. 나는 이것을 치유로 본다. 노자나 장자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은 자신들의 작업이 이론의 정립이 아니라 활동이라는 보는 점, 다음은 그 작업이 대상은 서로 다르지만 치유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 등이다. 특히, 그의 철학에서 궁극적으로 의도하는 것은 “파리에게 파리통에서 빠져나가는 길을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했고 노장도 인간을 죽음의 무리로 향하는 삶에서 자신의 병인 문명의 파리통을 빠져나가는 길을 가리키려고 한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언어비판의 성과로서 나타난 비트겐슈타인 철학은 도가적 철학에 더욱 가깝다고 생각된다.


참고서적

老子, {道德經}.

莊子,{莊子}.

L.Wittgenstein,Philosophical Investigations, trans. G. E. M. Anscombe (Oxford : Basil Blackwell,1978).

L.Wittgenstein,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trans. D.F.Pears and  B.F.McGuiness(London:Routledge &Kegan Paul Ltd.,1961).

George Pitcher, Philosophy of Wittgenstein (N.J. :Prentice - Hall, Inc,1964),

"삶의 형식의 두 가지 국면", [비트겐슈타인의 이해], 분석철학 연구회편, 서울, 서광사, 1984.

이명현, "언어의 규칙과 섦의 형식", [비트겐슈타인과 분석철학의 전개], 한국분석 철학회편, 서울, 철학과 현실사,1991.

 

 

 

 

 

출처 : 윤경재
글쓴이 : 화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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