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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관과 은유의 문제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2. 1. 23. 15:21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관과 은유의 문제

 

일반적이면서 초월적이어야 하는 은유의 딜레마

 

이호준

 

 

 

현대 분석 철학은 플라톤에서 근대 인식론에까지 이어지는 인식의 이원론적 모델들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이를 위해 분석 철학은 탐구의 논리(방법론)에 관한 문제와 지식과 믿음에 관해 이야기할 때의 언어를 명료하게 만드는 문제에 천착한다.

 

이는 기존의 철학적 혼란들이 불충분한 논증이나 증거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언어의 다양한 사용에 있어서 필요한 구별점을 이끌어내지 못한 데서 야기된다는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 따라서 언어적 분석을 통하여 언어의 복잡한 사용을 명료하게 하고, 그럼으로써 철학적 난제들 중 상당수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분석 철학의 기본적인 방향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언어를 명료하게 하려는 시도는 비단 현대에만 국한되는 일이 아니다. 개개의 목적과 방향은 다르지만,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철학의 도구인 언어를 연구하는 분야는 배제된 적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언어 연구에 있어서 가장 복잡하고도 근본적인 문제 중의 하나가 은유이다.

 

언어의 명료성 문제와 은유

 

은유에 대한 철학자들의 태도는 매우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은유가 모든 언어 현상의 기저에 있으며 초월적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와 반대로 은유 또한 언어 현상에 포함되는 것으로서 일반적인 언어 규칙 내에 포섭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대립적인 입장의 갈등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부터 이미 내포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은유가 유추에 의하여 어떤 사물에다 다른 사물에 속하는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일견하기에 전통적인 언어관, 즉 언어가 대상을 지시한다는 관점에 정면으로 대치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은유가 일반적인 언어 규칙 내에 포섭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왜냐하면 은유는 관계에 기초하는 것이며, 그 관계가 규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은유에 능한 것은 남에게서 배울 수 없으며, 그것이 천재의 징표라고 말한다.

 

이는 은유가 초월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은유를 가능하게 하는 유추능력은 천재가 아니라면 갖기 힘들어야 한다. 결국 은유는 일반적이면서 초월적이어야만 한다. 이 기묘한 딜레마는 이후에도 끊임없이 이어지는데, 어떤 측면에서는 마치 시소처럼 한 쪽이 다른 쪽을 들어올리는 양상을 띤다.

 

 

은유를 둘러싼 끝없는 대립

 

중세의 신 존재에 관한 논의에서 보나벤투라와 안셀무스는 논증적으로 신 존재의 증명이 가능하다고 보았으나, 이에 반해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유비(analogy)를 통해서 어느 정도까지만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스코투스는 안셀무스의 증명을 보조적인 것으로서 수용하면서 아퀴나스의 입장을 따른다. 은유의 문제와 연관시켜보면, 보나벤투라와 안셀무스 등은 - 비록 은유의 문제를 다루지는 않았지만 - 은유가 초월적이고 근본적인 언어 현상이라는 점은 배제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스코투스와 아퀴나스는 초월적인 신을 이해하는 도구로서의 은유(유비) 역시 초월적이라는 것에 간접적으로 동의한다고 할 수 있다.

 

보다 극단적으로 루소는 은유가 언어의 원초적 쓰임이라고 주장하며 니체 또한 모든 철학적 담론이 은유적 요소를 갖는다고 한다. 니체는 진리가 낡은 은유에 불과하고, 이에 따라 철학자의 작업은 표현을 늘리는 것이라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펼친다. 반면 이러한 니체의 생각을 수용한 하이데거는 자신의 언어만큼은 은유적이지 않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러한 하이데거를 비판하면서 데리다는 다시 루소의 주장에 동조한다. 이 끝없는 대립은 최신의 논의에도 이어진다. 데이비슨은 대부분의 은유가 명백한 거짓이며 비언어적, 혹은 비문자적 의미는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데, 이에 반대하여 블랙은 은유를 합리적 담론으로부터 배제시켜야 한다고 한다. 철학사에서 은유에 관한 직·간접적인 담론들을 일별할 때, 이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 무의미한 탁상공론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은유의 문제가 언제나 다른 철학적인 문제들과 연관되어 다루어졌다는 것이다. 즉, 언어 일반에 관한 논의들과 연계하여보면 이 줄다리기가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논의될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은 은유의 문제와 얽혀있는 언어 일반에 대한 이해가 제자리걸음만 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언어게임과 그 규칙의 강조: 사적 언어의 불가능성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의 눈에 띄는 차이는, 데리다가 니체적 의미에서 언어가 지니는 은유적 성격을 극단적으로 주장하는데 반해 비트겐슈타인은 사회적으로 실행 가능한 형식으로서의 자연 언어를 주장한다는 것이다. 이 점만 본다면 비트겐슈타인 또한 은유의 줄다리기의 한 편에 서있는 것처럼 보인다. 분명히 비트겐슈타인이 언어-게임(language-game)과 그 규칙을 강조한다는 것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또한 언어-게임은 언어와 언어에 연관된 행위로 구성된 전체를 지시하는 바, 은유와 은유의 사용 모두 언어-게임에 포함된다. 특히 사적 언어의 불가능성에 관한 논증을 통해 비트겐슈타인은 공적인 규칙을 전제하지 않는 언어는 결코 언어가 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사적 언어의 주요한 대표적인 특성은 ①사적 언어의 개별 낱말들은 그 언어를 말하고 있는 사람에게만 인식될 수 있는 것을 지시할 수 있으며, ②그 개별 낱말들은 “그의 즉각적인 사밀한 감각들”을 지시할 수 있고, ③“다른 사람들은 이 언어를 이해할 수 없다”는 점 등이며,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이 그 공격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그러한 종류의 ‘사적 언어’는 결코 순수한 언어가 될 수 없으며 원리적으로 공개적인 것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사적 언어는 이 언어를 구사하고 있는 사람에게조차도 언어로서 기여하지 않는다. 이는 언어가 언어 공동체의 활동들과 실천들 속에 구체화되어야 한다는 조건과 언어의 공개적인 채택과 사용에 관한 문법적 규칙을 이용하여, 언어를 주관해야만 한다는 조건을 전제한다. 따라서 은유가 천재의 징표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성립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소수의 천재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은유는 언어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공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은유를 다른 언어현상과 구분되는 특정한 언어의 사용이라고 할 만한 근거는 찾을 수 없게 된다.

 

“철학은 시(詩)로 지어져야 한다”

 

그런데 가장 적극적으로 은유를 사용하는 시(詩)분야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언명은 이색적이다. 그는 철학은 본래 오직 시(詩)로 지어져야 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생각이 그로부터 현재, 미래 또는 과거에 얼마나 묶여 있는가 하는 점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다고 고백한다. 이는 시를 구성하는 은유가 새로운 생각과 낡은 생각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시인은 전승되어진 세계-그림으로부터 새로운 구조물을 만든다. 그리고 그 구조물은 그 자체로 새로운 ‘파악’이며 독자들이 새롭게 이해하도록 이끈다. 이 점은 과학자들뿐만 아니라 시인과 음악가들도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려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뭔가 가르칠 것을 지니고 있다는 그의 말에서 확인된다. 문제는 비트겐슈타인의 시에 대한 태도가 마치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 즉 은유가 천재의 징표라는 주장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한계로 인하여 시문을 쓸 수 없다고 고백하며, 이는 은유의 사용에 특별한 재능이 요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어규칙들의 유연성

 

그러나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비일관적인 언명들이 문제를 원점으로 돌리는 것은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사적 언어 논의를 통해 강력하게 언어의 공적인 성격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언어사용의 특별한 재능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말하는 규칙 혹은 문법의 유연성에 기인한다. 비트겐슈타인은 게임의 범주에는 명확하고 고정된 경계가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비트겐슈타인이 언어-게임에 있는 다양한 표현들의 의미에 관한 설명은 그 표현들의 사용을 지배하는 문법적 규칙들을 명시적으로 드러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할 때, 이 주장에 의해 그는 모든 규칙들이 용의주도하게 형성되어진 엄밀한 계산 속에서 우리들이 발견하게 되는 그러한 종류의 것이라고 의도하지 않는다. 언어의 규칙들은 어떠한 종류이든지 간에 의미 즉 표현의 올바른 사용을 결정하지만, 어떤 규칙들은 거칠고 어떤 규칙들은 엄밀할 수 있고, 어떤 규칙들은 묵시적이지만 다른 규칙들은 명시적일 수 있다. 규칙의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시인이 새로 창조해내는 은유는 새로운 규칙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시는 여전히 독특한 규칙(은유)을 지니는 언어-게임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을 향유하기 위해서 우리는 시인이 속하는 문화도 역시 좋아해야 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언명은 이러한 맥락에서 의미를 갖는다.

 

철학의 난제들을 해소하기 위해서 선결되어야 할 문제는 그 도구인 언어의 문제를 풀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언어의 문제 중 가장 복잡하고 뿌리 깊은 쟁점은 은유의 문제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앞서 언급된 대립의 해소로 환원된다. 비트겐슈타인의 저작에서 은유에 대한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작업이 나타나지 않는 만큼 그가 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언어-게임, 낱말의 의미와 사용, 인간의 자연사 등에 관한 그의 언명들은 실제로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는 양태를 가장 겸허하게 드러내는 것이며, 이러한 태도가 은유를 가운데에 두는 이분적인 대립을 해소할 수 있는 지평을 제공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출발점을 보여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