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읽는 생, 다시 시 쓰기
- 『눈물이 시킨 일』(시와 시학 2011)
아쉽게도 우리 인간이 그토록 믿고 싶어 했던 필연(必然)은 우리 인식의 범위 내에서는 찾을 수 없다고 주장한 사람은 영국의 근대철학자 흄 D.H Hume이다. 사실의 세계에서는 필연은 존재할 수 없으며, 오직 개연(성) (蓋然)(性)만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그의 회의 (懷疑)는 사실의 법칙으로부터 당위 (當爲) 의 법칙을 이끌어낼 수 없다는 결론에 닿게 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불이 붙으면 연기가 난다’는 사실도 엄밀히 말해서 진리가 아니다. 불이 붙으면 연기가 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경우도 허다하다. 어디 그 뿐인가? 엄밀히 따져볼 때 ‘불이 붙는다’라는 사실과 ‘연기가 난다’는 사실에는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문득, 이런 딱딱하고 불필요해 보이는 언술을 던지는 이유가 뭘까? 이 생각을 다시 생각해 보니 내가 나의 시집을 해명하는 글을 쓰기 위해서 컴퓨터를 켜고 무엇을 쓸까? 궁리를 시작하는 순간에 떠오른 단상일 뿐이다. 흄은 40년 전 철학 강의 시간에 처음 마주한 철학자이고 요약된 그의 철학은 음습한 기억의 어느 구석에 처박혀 있다가 문득 이 시간에 찾아온 것이다. 미안하게도 우리의 사유는 필연적으로 얽혀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우연으로 문장을 이루고 이야기를 이끌어낸다. 그렇다면 이 기억은 도대체 어디 숨어 있다가 지금 유령처럼 내 머리 속에서 걸어 나와 문자화되고 있는 것인가?
분명한 사실은 오늘의 나의 삶이 우연의 연속이 아니라 필연적 결속이라는 신념으로 공고해질 때 좀 더 안온하고 행복한 느낌을 받을 수 있으며 일회성이고 일방향인 인생이 보람 있게 보인다는 것이다. 필연이라고 믿고 싶은 오늘의 사회적 성취, 사랑의 결실로 맺어졌다고 믿고 싶은 아내와의 만남이 그저 우연의 마주침일 뿐이라고 빈정댄다면 얼마나 경박한 일인가?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우연의 사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내가 시인이 되어 시를 쓰게 될 줄은 20살이 되기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더욱이 40년 넘게 시를 쓰게 될 줄은 예상조차 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문재(文才)가 있던 것도 아니고 그저 궁핍한 생활의 돈 안 드는 놀이로 치부했던 시 쓰기가 여전히 내 삶의 무기요, 종교가 될 줄은 아무리 생각해도 우연일 뿐이다.
『눈물이 시킨 일』은 개인 시집으로 열 번째 시집이다. 시력( 詩歷)에 비추어 신중하지 못한 다작( 多作), 치열한 자기숙고의 결여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내가 당면한 문제, 내가 받아들인 희노애락에 반응하고 증거하는 방편으로서 시로서 육화했다는 사실에는 자긍심을 느낀다. 현실에 대한 반발과 순응, 그 지루한 순환과정 속에서 여과되는 정서는 아직 나의 육신과 정신을 힘차게 일깨우는 기둥이 되지는 못했지만, 우연성의 허무에 그저 무릎 꿇은 것은 아니다. 부정 없는 긍정은 있을 수 없으며, 슬픔을 알지 못하면서 기쁨을 느길 수 있는 방편은 없다. 아무리 영감(靈感)이 우세한 장르가 시라고 하더라도, 작품과 시인은 별개라는 신비평의 함의를 받아들인다 해도 여전히 시와 그 시를 생산한 시인의 혈육관계는 뼈와 살, 몸과 정신의 관계를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고 하였다/ 생각해 보니 길 아닌 길을 너무 오래 걸었다/ 타인에게는 샛길이며 뒷길에 불과하지만/ 나는, 훤하다
『눈물이 시킨 일』의 말머리로 쓴 위의 구절은 시인으로서 살아온 삼십 년 세월동안 체득한 소중한 신념이자 고집이다. “인생의 정답은 없다.”는 것이 정답이고, 득도의 내용은 불립문자인 까닭에 그저 느끼고 그 느낌을 온 마음과 몸으로 스며들게 하는 것이 필업(畢業)이지만 궁극적으로 내가 소망하는 것은 시로서 필연을 이룩하는 일이다.
한 구절씩 읽어가는 경전은 어디에서 끝날까
경전이 끝날 때쯤이면 무엇을 얻을까
하루가 지나면 하루가 지워지고
꿈을 세우면 또 하루를 못 견디게
허물어 버리는,
그러나
저 산을 억 만 년 끄떡없이 세우는 힘
바다를 하염없이 살아 요동치게 하는 힘
경전은 완성이 아니라
생의 시작을 알리는 새벽의 푸르름처럼
언제나 내 머리맡에 놓여져 있다
나는 다시 경전을 거꾸로 읽기 시작한다
사랑이 내게 시킨 일이다
- 「 눈물이 시킨 일」 전문
그래서 「눈물이 시킨 일」은 이런저런 나의 시 쓰기를 집약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나에게 있어 시 쓰기는 현실 앞에 무력한 나약한 정신을 단련시키는 도구일 뿐이지 어설픈 주장을 설파하겠다는 무모한 욕망을 드러낸 결과물은 아니다. 마치 서예(書藝)의 경지에서 서도(書道)의 경지로 올라서기 위해서 섣불리 붓을 잡기 전에 팔이 떨어지도록 먹을 갈아야하듯이, 완전무결한 이데아와의 일치를 위하여 수없이 많은 도자기를 깨부수는 도공(陶工)의 마음을 익히기에 부족함을 느끼는 것이다. 아직도 우연의 마법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필연의 법칙으로 시를 받아 적을 날을 기다리는 것이다. 어느 지인이 「 눈물이 시킨 일」을 거꾸로 읽는 것을 보면서 어느 사람들은 박수를 치고, 어느 사람들은 환호하였을 때 나는 내가 걸어가야 할 시의 먼 길을 얼굴 붉히며 바라보았다.
도대체 왜 나는 눈물을 흘리고 무엇이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인가!
사랑이 내게 시킨 일이다
나는 다시 경전을 거꾸로 읽기 시작한다
언제나 내 머리맡에 놓여져 있다
생의 시작을 알리는 새벽의 푸르름처럼
경전은 완성이 아니라
바다를 하염없이 살아 요동치게 하는 힘
저 산을 억 만 년 끄떡없이 세우는 힘
그러나
허물어 버리는,
꿈을 세우면 또 하루를 못 견디게
하루가 지나면 하루가 지워지고
경전이 끝날 때쯤이면 무엇을 얻을까
한 구절씩 읽어가는 경전은 어디에서 끝날까
- 거꾸로 읽는 「 눈물이 시킨 일」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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