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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따라바람따라(여행기)

서천 가는 길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1. 1. 18. 00:12

 

 

서천 가는 길 / 나호열

 

  한달 전 고향 서천에 다녀왔다. 큰 어머니께서 90년 세월을 접고 세상을 뜨셨기 때문이었다. 그럭저럭 15년이 흘러간 다음 찾아간 고향은 여전히 낯설었다. 사람들도,비포장 황토길이 아스팔트로 번쩍거려도 내고향은 그냥 눈물나는 곳이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묻혀계신 뒷산에 오르면 뿌연 서해바다가 가물거리고 장항제련소 굴뚝이 허무의 상징처럼 우뚝한 곳. 그곳에 가면 내가 얼마나 정처없는 존재인가를 깨닫는다. 40년도 넘은, 다섯 살 땐가 가족 단체사진의 배경이 되었던 양철지붕 그 집 그대로이다. 나에게 정처없는 인생을 가르쳐 주신 아버지가 그 집에서 태어나셨다는 사실 하나로도 나는 충분히 슬프다.그래서 그 집은 구름 같다.

구름으로 떠돌다 구름으로 가버린 아버지……

 

 

구름의 집

 

 

떠도는 생각들이 구름을 만든다

몸부림의 흔적들이 구름을 만든다

참았던 눈물들이 구름을 만든다

천사가 되지 못한 사람들이 구름을 만든다

구름은 무심하게 우리의 머리 위를 지나간다

신경통이 심한 다리를 끌며

제도의 길과 벽과

강을 넘어서

해탈하는 육신의 허물어지는

독무를 춘다

사랑을 지우는 구름

고통을 지우는 구름

그리하여 망각을 지우는 구름

구름을 지우는 구름

그리하여 새파란 하늘을 보여주는 구름

깨끗한 아픔의 빈 울림통

마음의 무게를 지우면

길도 지워지고

소멸을 향하여 끊임없이

다시 끊임없이

 

 한달 전 고향 서천에 다녀왔다. 부천에서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아산방조제를 건너 밤길을 달렸다. 충청하고도 남도는 높은 산이 없다. 계룡산, 성주산이 그 중 우뚝할 뿐 밍숭밍숭한 사백, 오백미터 산들이 키재기를 하는 곳이다. 대천쯤 가서야 바다냄새가 난다. 결혼하기 전 아내는 대천바다라는 시를 썼다. 나하고는 한 번도 대천 바다에 간 적이 없다. 나는 그 시를 읽고 감명을 몰래 받았다. 다른 시 귀절은 기억에 남아 있지 않지만 ㅡ 보폭이 넓은 바다 ㅡ그 귀절만은 잊지않고 있다. 서해는 흙탕물이다. 동해나 남해가 자랑하는 옥빛 살결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렇지만 넓은 백사장을 하릴없이 거닐어 보는 것, 그것도 겨울에 바다와 면벽하다 보면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바다를 모티브로 시를 써 본적이 없다. 바다는 나보다 넓은 가슴을 가졌고, 나보다 크기 때문이다. 대천의 북적거림이 싫으면 더 남쪽으로 무창포로 가면 된다. 훨씬 규모도 작지만 고요함과 깨끗함은 비할 바가 아니다.

 

 나는 충청도 기질이 희박한 사람 중에 하나다. 서울에서 살았으므로, 충청도 사투리도 거의 구사할 줄 모른다. 충청도는 느려터졌다는데, 정말 그런지 나는 모른다. 음식도 다른 지방에 비해 썩 뛰어나지 못하다는 좁은 소견에 이의를 달 생각은 없다.

 

 한달 전 고향 서천에 다녀왔다. 오후 3시에 출발하였으므로 세상은 밝았다. 사투리는 구수하다. 전라도, 경상도 가릴 것 없이 사투리에는 천 년 이 천 년 우리보다 앞 선 사람들의 때가 끼어 있어서 좋다. 빠알리- 가-아

 

 무의식 속에 둥근 심상은 우리를 평화롭게 해준다. 충청도는 둥글다. 여인네들의 젖가슴도, 죽어서 잠드는 무덤도, 충청도 산들도 둥글다. 눈 앞에 가득한 둥글거림. 한껏 팽팽해진 시위를 푼 화살같은, 한참 멱살잡고 싸우다 눈길 주고 받으며 피식 웃어제끼는 싸움판의 장정같은, 저 곡선의 여유로움.

 

 한달 전 고향 서천에 다녀왔다. 덕산을 지나 합덕쯤 오자 갑자기 시야가 트인다. 들판 저 너머로 노을이 무너지고 있다. 누가 저렇게 눈 부시게 분신하고 있나! 문득 그가 그립다. 그가 누구인지 모르면서 문득 그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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