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과 석탑 / 나호열
1.
아침 출근길의 둑방에는 말없는 긴 행렬이 검은 그림자처럼 펄럭거리고 있었다. 우리가 꿈꾸던 풍요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아이엠에프의 한파가 닥친 그 해 겨울 둑방 길에서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중랑천 제방 취로공사장으로 가는 그 행렬은 젊은이들, 노인들, 그리고 아낙네들로 뒤섞여 있었다. 그 행렬의 옆으로 죄지은 사람처럼 차를 몰아 빠져나갈 때마다 어리석은 이 땅의 지도자와 부패한 관리들과 졸부들과 지식인의 가면을 쓴 나에 대해서 구역질을 참을 수 없었다.
그해, 실업자 구휼대책이 마련되고, 재취업을 위한 국고금 보조 교육이 대학에도 권장되었다. 나는 당시 내가 속해 있던 조직의 책임자로서 몇 개의 교육사업을 구상할 수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고학력 실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문 관광 가이드 양성과정에 온 힘을 기울였다. 우리나라에 산재한 문화재나 유물, 유적지에 대해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내,외국인들에게 우리나라의 문화와 역사를 제대로 알리는 일이 시급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80년대 초반에 유럽 여행을 할 때 내가 만나게 된 가이드들은 판에 박힌 우리나라의 관광 안내원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갔을 때 가이드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다른 것은 모릅니다. 그렇지만 16,7세기 회화에 대해서는 여러분께 상세히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하루 종일 나는 그의 해박한 회화에 대한 설명을 보고 들으며 무척이나 행복했었다. 로마에 갔을 때 만난 가이드도 마찬가지였다. 그 가이드는 건축학도로서 로마 시내에 산재한 건축물의 양식들에 대해서만 침을 튀기며 안내를 해주었다. 저건 로코코, 저건 고딕...
관광가이드 과정은 영어반과 일어반으로 각각 40명씩 편성되었고, 그들은 이미 상당한 수준의 어학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1 년 가까운 시간을 공휴일을 빼고 매일 학교에서 한국의 역사와 박물관학, 유물관리 등등의 전문 지식을 강도 높게 교육받았다. 교육이 종반으로 접어들고 마지막 코스로 현장답사 훈련이 남았는데, 아무래도 실습을 위해서는 경주 일원이 교육효과가 높을 것이라는 판단이 서서 학교 박물관의 학예원과 함께 사전 현지답사를 떠나게 되었다.
신라시대의 서라벌은 국제도시로서 지금의 경주보다 인구수나 면적 면에서 훨씬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경주 남산과, 토함산 구역, 추령너머 감은사, 대왕암 구역...등등을 둘러보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후배인 학예원은 경북 내지를 관통하는 31번 국도를 이용하자는 안을 내놓았다. 경주를 출발하여 안강, 기계, 청송, 영양을 지나 일월산을 넘어 봉화, 영주로 빠져 나오는 코스였다. 그렇게 해서 우리 둘은 김밥 네 줄로 점심대용을 하고, 평생 잊지 못할 풍경을 찾아 출발했던 것이다. 그 때의 강열하고 아름다운 기억들은 몇 편의 시와 짧은 글로 남게 되었다.
봉감마을의 모전 석탑은 나와 같이 역사에 문외한이 사람이 쉽게 찾아가서 만날 수 있는 유적이 아니었다. 우리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점심 무렵, 우리는 밭 가운데 우람하게 서 있는 모전탑을 바라보고 모래가 아름답게 깔린 강변에 앉아 김밥을 먹었다. 안동호로 흘러 들어가는 푸르고 맑은 강물과 그 강 너머의 울울한 숲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먹던 김밥이 목에 매였다. 탑을 세운 사람들과 그 탑을 경배하던 사람들. 세움과 허물어짐, 소멸....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오는 것을 어찌하랴...
나는 찰라로 받아들인 이미지를 그대로 시로 형상화하기보다는 이미지의 육탈을 기다려 시를 쓰는 편이다. 나는 오랫동안 봉감마을의 모전탑을 형상화하는데 실패했던 것 같다. 지난 해 가을. 마침내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한 사람에게 나지막한 인사를 건넬 수 있었다. 삶의 허무와 절망, 그러나 그것들을 비집고 떠오르는 한 사람의 영상을 그리며 쓴 시가 「얼굴」이다.
얼굴
-*봉감 모전 오층 석탑
아무도 호명하지 않았다. 까마득하게 오래 전부터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를 맑은 물가에 나아가 홀로 얼굴을 비춰보거나, 발목을 담궈 보다가 그 길마저 부끄러워 얼른 바람에 지워버리는 나는 기댈 곳이 없다. 그림자를 길게 뻗어 강 건너 숲의 가슴에 닿아보아도 나무들의 노래를 배울 수가 없다
나에게로 가는 길이 점점 멀어진다. 떨어질 낙엽 대신 굳은 마음의 균열이 노을을 받아들인다. 늘 그대 곁에 서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깨에 기댄 그대 때문에 잠깐 현기증이 일고 시간의 열매인 얼굴은 나그네만이 알아본다. 흙바람을 맞으며 길을 버린 그대가 하염없이 작다.
*봉감 모전 오층 석탑:
경북 영양군 입압면 산해리 봉감마을 밭 가운데 서 있는 模塼 탑이다. 모전 탑이란 벽돌처럼 돌을 쌓아올린 탑으로 목조탑의 형식에서 석탑으로 이행되어가는 중간 과정으로, 신라 말이나 고려 초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밭으로 둘러싸여 있는 이곳은 다른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높이 약 11미터, 산해리로 가는 2번 군도에서 약 1킬로미터를 승용차나 도보로 걸어가야 한다.
2.
나호열 시인의 시 「얼굴」을 읽으면서 나는 빼어난 시 한 편을 읽는 즐거움을 가졌다
그리고 나호열 시인이 즐겨 다루는 < 길 > 시리즈 중의 한 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나는 도구(돌도끼)의 제작과 정신의 출현을 생각하였다.
한 편 문즐의 소란도 생각하면서 감상글을 쓰고 있었다. 그 감상글은 금새 화답시가 되고 있었다. 그러나 두 시는 주제가 전혀 다르다. 나호열의 시는 구도자의 길를 읊었다면 나는 의식, 관계, 정신, 사상의 시원(始原)을 생각했다. 그리고 사유와 서정의 만남의 길에서 떨고 있는 허망을 읊었다. 하나의 탑은 어느 시대의 정신, 사상, 미래 예측의 그 무엇 등과 관련이 있는 거대한 관념의 조형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감이 절망의 몸짓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시는 생각이 아니라 느낌의 세계 그 중에서도 나는 내 가슴 속에 부는 허망의 바람 소리를 시로 쓰고 싶었다.
그래서 나호열 시인의 <얼굴>에 쓰여 있는 시어들을 지우고 나만의 표현으로 쓰려다가 남겨 두기로 하였다.
시인에 대한 예의가 될 것 같았다. 덧붙여 밝히자면 지난해 내가 쓴 연가풍의 시들 속에 나호열 시인의 표현들과 같은 표현을 이미 사용하여 나는 시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어는 비슷비슷한 거 아닌가. 마치 같은 나무와 시멘트를 사용하였으나 다른 집을 짓듯이......지난 한 해 나는 많은 시인의 시에 화답시를 썼다. 내 시는 원래 수준이랄 것도 없는 거 아닌가. 그러나 그 시편들은 내 시의 수준에 비하면 빼어난 편이었다.
나호열 시인을 만나면 무언가 빚지고 있는 듯하던 묘한 감정을 느끼곤 하였다.
물론 나 혼자 생각한 빚이었다. 이제 조금 갚은 느낌이 든다.
석탑/ 송명호(解雨鱗)
맨 처음 누가
저 강변의 돌 하나를 주워 돌도끼를 만들었을까
맨 처음 누가 무형의 돌에
나를 새기고 있었을까
아 맨 처음 누가 숲의 숨결을 더 많이 듣기 위해
제 몸보다 긴 그림자를 숲 속에 드리웠을까
서러운 가슴의 그림자까지 숲 속에 묻어 두고 싶어서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서 있었을까
나무야 나무들아
겨울 강변에 서서 해빙의 노래를 들으면
그대들이 이 강변을 바라보는 까닭을 알 것 같다
얼음이 녹는 날
모래알보다 더 덧없는 자신의 잎새가
햇살에 팔랑거리며 부르던 지난 여름의 노래가
저 차디찬 강물에 가라앉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기 위함이 아니든가
아니면
저 바다까지 이른다는 허망에 속아
저녁노을 바라보며 먼바다의 꿈에 잠겨 바람의 노래를 불렀단 말인가
그러나 깃털보다 가벼우리라던 비상은 쉴 곳을 찾아 물 속에서 썩어갈 뿐이다
내 여기 이름없는 오층 석탑이 되어 서 있는 까닭은
아무도 호명하지 않는 세월이 좋았음이니
내 탑신의 그림자가 머문 발치
떨어져 누운 낙엽 밑에서 놀다 간 다슬기 두어 낱을 기다리고 있음이니
저무는 노을이 머물다 가면서 일러주는 시간이 몇 시인지 내 어찌 알겠는가
강 건너 숲 속에 얼굴을 묻고 나무들의 노래를 배우는 이여
아아 돌이 되어서도
돌로 새긴 그대의 얼굴을 지우지 못하는 절망으로 서 있는 이여
맨 처음 누가
얼굴 없는 돌에
나의 허망을 새기고 있었을까
3.
송명호 시인은 나의 시에 유장한 화답을 보내왔다. 그의 시 「석탑」은 내가 애서 감추려 하거나 체득하지 못한 영혼의 오지를 샅샅이 탐색하고, 길 잃어 헤매는 자에게 친절하게 길을 일러주는 듯 거침이 없었다. 시가 지나치게 길면 긴장이 떨어지고, 시를 씹는 맛이 덜어지기 마련인데 그런 위험을 벗어나면서도 우람한 시의 골격과 리듬을 탁월하게 살려내는 것 같았다. 나는 「석탑」이 지나치게 응축된 나의 시를 보완해주고 부드럽게 풀어내 주는 정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쓴 시보다 오히려 송명호 시인의 「석탑」을 당연히 윗질로 친다. 나의 시가 부분이라면 그의 시는 전체를 읊고 있고, 그 전체를 아우르는 본질을 포용하고 있음이다. 나는 기꺼이 「석탑」을 좋은 시의 반열에 올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감상을 권유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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