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문화평론

예술과 예술인의 사회적 기능과 역할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9. 7. 5. 00:37

 예술과 예술인의 사회적 기능과 역할


                                    나호열 (한국예총 정책연구위원장)


1. 들어가는 말


  전 세계적인 경제 불황은 삶의 모습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았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어느 누구를 가릴 것 없이 암울한 현실을 바라보는 형국에 놓여 있다. 이러한 때에, 각박한 현실에 희망을 불어 넣어주고 황폐해진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어야 한다는 예술인의 각성은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고귀한 가치를 지닌다. 이 언급 속에는 이미 예술의 사회적 기능과 역할이 응축되어 있지만 설정된 목표를 실현하고자 할 때에는 만만치 않은 난관에 부딪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은 먼저 예술과 예술인이 사회에 투영되기 전의 독립적인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한편, 그에 부과하여 사회적 기능과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며 그러한 목표는 달성될 수 있다는 전제를 승인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는 예술이 한 시대를 투사하고 반영할 수밖에 없으며 창작의 주체인 예술인 또한 사회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받아들임으로서 논의가 가능함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예술과 예술인의 위상은 사회의 흐름 속에서 주도적이고 독점적이지 못하다는 점을 시인하여야 하는 불편한 감정을 숨길 수 없다. ‘문화의 중심이 예술이다’ 라는 명제는 예전과 같은 설득력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다양한 문화 속에 부분으로 존재하는 예술’의 정의가 합당해 보이기까지 하다.

 본고는 오늘날 처해 있는 우리의 예술과 예술인의 현실을 점검하고 난 후에 사회 구성원 즉 대중들을 위무할 수 있는 여러 방안들을 모색해 보려는 시도를 가지고 있다. 만일 이 시도가 성공적이라면 우리는 다시 ‘예술이 문화의 중심이다’ 라는 명제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2. 예술의 역사와 정의의 문제


 우리가 예술과 예술인의 문제를 거론할 때 간과하고 넘어가는 것이 ‘근대사회의 형성’1)이라는 문제이다. 유, 무형의 수많은 문화유산이 예술의 품격을 지니고 있음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유, 무형의 문화유산이 예술의 범주 속으로 편입된 시기가 당대가 아닌 후대의 검증을 거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는 곧 오늘날 우리가 감지하고 있는 예술과 예술인의 정의와는 편차를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오늘날의 예술 행위는 주술적이고 종교적이며, 정치적인 영향력과 관련된 수단과 과정의 파장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독립적이고 평등한 사회적 지위를 확보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볼 때 예술과 예술인은 특정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과정이거나 수단에 불과했다. 다시 말하면 예술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예술 행위와 예술인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 전 인류적인 근대사회가 형성되고 활착됨으로서 비로소 인간의 독자적인 영역으로서의 예술과 예술인이라는 직업이 나타나게 되었고. 자신의 재능과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서 전개되는 예술 행위는 ‘근대성 modernity'2)이라는 모태를 필연적으로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 서구사회의 경제적 풍요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여러 능력 가운데서 ’미에 대한 탐구‘ 또는 미적인 욕구’ 를 촉발시켰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미적인 욕구 그 자체가 예술인 것이다. 자연으로부터의 위협과 신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는 이성의 발현은 미적인 욕구를 충족하는 예술 행위를 정당화할 뿐 아니라 종교, 과학과 나란히 인류가 성취해낸 위대한 성과로 자부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칸트는 그의 『판단력 비판』에서 미적인 영역은 도덕이나 학문을 떠나서 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보편성을 지닌다고 설파했고, 헤겔3)은 예술은 인간의 가장 우월한 정신이 감각을 통해 드러난 것이라고 정의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동의하고 있는 예술의 정의는 ‘근대사회의 형성’과 인간 개개인이 ‘근대성’에 대한 자각을 획득하게 됨으로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3. 우리나라에서의 예술 활동의 성과와 과제


 우리가 근대사회의 형성에 관심을 두는 것은 오늘의 우리 사회가 서구사회가 겪어 왔던 전철을 때로는 답습하면서, 때로는 그것을 뛰어넘고자 하는 의욕을 버리지 않음으로서 해방 이후 서구사회의 얼개를 갖추어가는 모습을 보여 왔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오늘의 예술 행위는 자본주의의 토대 하에서 형성된 민주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전통예술에 대한 교육과 지원이 미흡한 까닭도 있지만 이미 서구화된 삶의 현장에서 우리가 구현하고 있는 예술은 온전히 우리의 얼을 담고 있는 우리의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 말은 오늘날의 예술행위를 비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급속히 세계화되어가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하면 근대성의 틀 안에 우리의 정신을 아로새길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것을 찾겠다고 양복과 구두를 벗어던지고 짚신 신고 상투를 틀수는 없는 일이다. 형식의 보편성에 내용의 특수성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 땅의 예술인들이 한번쯤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해방 이후 반 세기가 지나는 동안 우리는 엄청난 경제적 풍요와 정치, 사회적 발전을 이루어 내었다. 세계적인 교육열은 경제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고, 총 인구 대비 예술인의 숫자 또한 대폭적인 증가를 이루었다. 이는 앞 서 언급한 ‘문화의 중심이 예술이다’라는 명제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이 명제에 대해서 불만을 갖는다. 예술의 역사를 살펴볼 때 경제적 풍요가 충족될수록 예술의 욕구가 늘어나는 것이 마땅한 일인데 어찌된 일인지 예술의 영역은 늘어나기는커녕 위축, 축소되는 현상과 마주치게 되기 때문이다.  “위대한 예술 작품은 일상적인 삶 속에 은폐되어 있는 근원적인 존재를 열어 보이는 데서 성립한다”4) 든가,  “위대한 예술의 미는 인간 역사를 꿰뚫고 흐르는 보편적 정신적 가치를 확실하게 구현할 때 성립된다” 든가 하는 예술의 위의를 부정할 사람은 없는데도 불구하고 오늘의 실정은 곤혹스럽다.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에 앞서 이 문제가 야기된 원인 遠因과 근인 近因을 따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원인은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으로서 흔히 ‘예술의 죽음’이라고 통칭되는 것이고, 근인은 우리에게 국한된 국지적인 현상이라고 구분지어 볼 수 있겠다. 먼저 근대사회가 형성되면서 예술의 독립적 위치는 공고해졌지만 그와 함께 자본주의의 속성은 예술의 상품화를 가속시켰다. 예술과 예술작품이 교환가치로 평가되면서 예술의 독립적 지위는 그만큼 손상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는 우리에게도 설득력 있게 와 닿는 현상이다. 극히 소수를 제외하고는 많은 예술인들이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으며, 예술 행위를 벗어난 직업을 통해서 생활을 영위하게 됨으로서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 사태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모든 예술 작품은 상품으로 시장에 출시된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은 “가장 상업적인 것은 가장 예술적이고 가장 예술적인 것은 가장 상업적이다”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르는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원인과 근인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것인데, 한 마디로 대중문화의 확산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높은 교육열은 현대인의 예술적 감수 능력을 확대시키는 한편, 스스로 창작할 수 있는 여건을 확보함으로서 아마츄어와 프로페셔널의 경계를 허물어뜨렸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대중매체의 출현은 기존의 예술 영역을 혼합하여 새로운 장르를 출현시키는가 하면 장기적이고 특수한 교육을 통하지 않고도 즉각적인 쾌락을 유발할 수 있는 매체에 환호하게 되었던 것이다.


 좀 더 범위를 좁혀서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을 살펴보면 상황은 더 비관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이제는 그 누구도 해결책을 내놓으려 하지 않는 우리의 입시교육은 교육 현장에서의 예술교육을 말살시켜 버렸다. 아동기와 청소년기에 형성되어야 할 예술적 감수성은 교육 현장에서 사라져 버리고 싸구려 대중문화에 몰두하게 만드는 악순환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다.

 

4. 기초예술의 출현


 이제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던 예술은 복합장르의 출현과 자본 논리에 의해 산업화된 영역을 구분하는데 까지 이르렀고 문학, 미술, 무용, 연극, 국악, 사진의 영역을 아우르는 기초예술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기초예술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1. 모든 문화예술활동의 기초이며 근간

2. 대중문화 및 실용예술의 원천

3. 문화산업 및 관광의 기초 재원

4. 시민사회 창조력의 뿌리이며 기초

5. 국가적 문화발전의 대전제 5)


이러한 이유에서 기초예술은 국민의 삶의 질을 고양시켜주는 공공적 가치문화와 사회적 형평성에 의거한 복지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문화산업의 원천으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국가적 차원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이며 기초예술은 시장 경제의 논리로 다룰 수 없는 영역이므로 마땅히 국가가 떠맡아야할 것으로 주장한다. 6)


 그러나 국가재정 운영상 대폭적인 지원을 기대하기 어렵고, 기부문화가 활성화되지 않은 형편을 고려해 볼 때 이와 같은 논의는 탁상공론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 〔문화예술진흥 정책 재정립 및 지원구조의 변화 방향〕7), 〔국가문화예술재정 운영실태 및 확충 방안〕8) 등 필자가 참석한 수많은 논의의 장에서 거론된 방안들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는 것은 예술에 대한 전 국민적 공감대 형성 및 현실화될 수 있는 대안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예술과 예술인들의 창작 기반을 공고히 해야 한다는 원론에는 이의가 없으면서도 정책적 대안과 실천 방안에 대해서는 백가쟁명의 혼돈이 계속되는 것은 어디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까?

 

민족예술의 창작과 교류를 외치는 단체는 민족 정체성과 관련된 예술 활동을, 문화 향수권의 주권을 외치는 단체는 국민 문화의 발전을 위한 시민 활동을, 전통 문화의 보존과 발전을 외치는 단체는 문화현상 발굴과 이의 보존을 위한 문화 활동을, 또한 창작을 통한 한국의 예술성 신장을 외치는 단체는 국민의 예술문화권 향수 기회를 주기 위한 예술 활동 등을 자신의 능력에 맞게 상호 보완적 관계를 유지하며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대다수 자신의 예술 행위에 대한 존중감이 환경 변화에 연연하지 않는 한, 당장 어떤 법이든 제도든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나, 누군가 사회 변화에 대한 흐름을 이야기 해야 하고, 또 일부 방향이 대다수 예술인이나 국민들에게 아픈 마음을 들게 하는 경우 그 흐름을 바꾸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이 노력의 중심에는 현재 문화예술단체를 이끌고 미는 지도자와 예술행정 전문가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념을 초월하여 문화예술진흥의 중심은 예술인이다. 9)


위의 글에서 이범헌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예술정책과 지원은 서구사회의 모델을 받아들이면서도 독특한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 남북 간의 이데올로기의 차이를 두고 진보와 보수, 순수와 계몽적 문예운동의 대립을 씨줄로 한다면 사회 민주화에 따른 정권의 이동을 날줄로 함으로서 차별화된 예술단체들이 제로섬 게임에 가까운 세 싸움에 몰두하여 문화예술 발전에 지체를 가져 왔다는 점이다. 성향의 차이를 우열의 싸움으로 변질시키므로서 예술활동의 다양성을 스스로 훼손시키는 우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동안 순수예술 계열의 예술인들이 개인적 표현과 창작의 자유를 수호하여 왔다고 해도 이른바 예술의 죽음을 뛰어 넘으려는 공공예술의 영역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성남시의 태평동 프로젝트10). 안양 석수동 스톤엔워터11), 전북 진안 백운면 원촌마을 Echo Museum 프로젝트12) 등은 예술 성향의 차이를 떠나서 일반 대중들과 함께 예술을 호흡하고 교감을 나누는 영역으로 음미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공예술 활동은 종종 예술의 수월성의 측면에서 공격을 받기도 한다. 자본주의적 논리이기는 하지만 사용 가치적 측면에서 바라볼 때 예술로서의 성취도가 빈약할 수 밖에 없다는 논리가 성립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난점은 소외된 지역과 소외된 주민들을 위무하는 예술 본연의 위의를 살리기 위해서 예술인의 시간적, 경제적 희생과 봉사가 뒤따라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또 다른 하나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태백시의 철암지역은 이미 쇠퇴한 석탄산업의 중심지였다. 지금도 80년대에 멈춰진 시간이 그대로남아 있는 지역이다. 떠날 사람은 떠나고 떠날 수도 없고, 떠날 곳도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 일군의 예술가들이 찾아 왔다. 13)


이 전시는 신화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꾸는 작은 꿈이다. 그것은 어떤 계산이나 대가를 바라지 않는 나직한 기원 같은 꿈이다. 그러나 이 기원의 밑바닥에는 탄생신화가 되고자 하는 단호한 의지가 있다. 그 신화의 여정을 따라가 보자. 2001년부터 폐광촌 철암에 예술가들이 모여들고 시작하였다. 어느 날 꽃씨로 낯선 곳에 날아들어 와 싹을 틔우고 해마다 더 많은 자손들을 번성시키는 들꽃처럼 이 작가들은 철암과 태백의 삶으로 날아들었다. 매주 세 번째 토요일에 1박2일의 여정 기간으로 그들은 이곳에 와서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렸다. 마을 주민들은 거리를 배회하며 작업을 하는 이 작가들에 익숙해졌고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21세기의 생활과 문화에서 잊혀진 이곳에서 크고 작은 전시회를 가졌다. 하여서 한때 번잡했으나 이제는 인적이 드문 역사가 예술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가 되기도 하였다.


이런 작가들의 태도는 낯선 곳의 이국적인 풍경에 열광하여 색다른 리포트를 하고 이내 떠나고 마는 관광주의자의 그것, 혹은 회고주의자들의 의미 없는 과거의 집착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자신들이 뿌린 작은 씨앗이 움터 이 지역에 새로운 삶의 모습이 다시 태어나길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사양길로 접어든 석탄산업시설은 아무 효용가치가 없는 쓰레기더미, 보존은커녕 폐기비용조차 지불하기 아까운 골칫덩어리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버려진 선탄장과 낡은 광산의 건물, 인적이 뜸해진 역사, 버려진 사택지들과 오래된 거리와 낡은 담벼락의 가치를 알아본 것은 바로 이 할아텍의 작가들이었다.


그들이 본 가치는 당장의 효용성만을 추구하는 근시안적이고 편협한 경제적 관점에서는 절대 포착되지 않는 미학적, 역사적 사회적 가치였다. 이런 가치들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일은 장기적으로는 결국 경제적인 효용가치를 생산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예를 독일의 옛 탄전 지역인 루르지방의 변모에서 이미 보아왔다. 폐광촌 철암-태백 지역은 우리 경제 발전의 동력이 되었던 석탄산업의 핵심지역이었고 시대의 변모에 따라 쇠락해 갔다. 그러나 이 지역 자체가 치열했던 한 시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거대한 박물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작가들은 예리한 감수성과 실천력으로 먼저 알아차린 것이다. 14)

그들은 철암에 거주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기적으로 그곳을 방문하여 지역주민과의 소통, 철암지역의 박물관화를 통한 새로운 작업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활동은 예술인들의 사회 참여에 있어 시간적, 경제적 희생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점을 이야기 하고 싶다.


5. 오늘의 예술인 무엇을 할 것인가


오늘날의 예술인들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환경에 직면해 있다. 문화와 예술의 영역이 다변화, 중첩 혼융되면서 장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는 것, 예술교육의 부실과 대중들의 무관심, 예술의 상업화로 경쟁력 상실 등의 난관이 도사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술인들에 대한 국가의 지원 부족으로 열악한 생활환경의 사슬에 갇히게 되었다는 애로가 개선되기에는 요원하다는 것이 그것이다. 일부의 예술인을 제외한 대다수의 예술인들은 창작의 고통과 생활난의 고통을 동시에 감수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신념은 생활에 고통 받고 좌절하는 사람들을 위해 삶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전달하고 함께 공유한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행위는 예술인으로서의 권위와 존엄을 보장받는다.


 더 이상 창작실에 스스로 갇혀 있기를 원하는 한 소통의 문을 열리지 않는다. 순수예술을 지향하는 예술인들이 공공예술의 활동성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일정 부분 대중, 즉 향수자들 과의 소통과 대화는 필요한 시대에 놓여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제 몇 가지의 대안을 제시하면서 글을 마칠 때가 된 것 같다. 이 대안은 예술인 개인에 적용되기 보다는 예총과 같이 순수예술을 지향하고 조직화되어 있으며 여러 장르를 구축하고 있는 요건을 갖추고 있을 때 실행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1. 지역과의 소통


   몇 가지 사례를 통해서 본 바와 같이 한 지역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특성을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도시, 농촌, 산간, 어촌 등 지역적 특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지역 주민들이 원하는 문화 방식을 바탕으로 예술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다양한 장르가 공동 작업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백화점 식으로 나열된 행사, 관례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사에 대중들은 식상하기 마련이다. 예전과 달리 지자체나 문화원, 백화점 등에서 주관하는 프로그램과 달리 무료 예술강좌를 개최한다든지, 음악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한다든지, 지역 내 교육기관과 협력하여 예술교육 현장에 참여하는 등 변별성을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단발적이고 단기적인 계획으로는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 또한 이는 예술인들에게 일정 부분 봉사와 희생을 요구하는 일이므로 철저한 사전 계획과 실천 의지가 필요하다.


2. 대표 및 신진 예술가 육성  


 예총과 같이 연륜이 깊은 단체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점차 구성원의 연령이 높아지고 신진 예술가의 참여가 드물어진다는 것이다. 젊은 예술인의 육성과 기존 회원들의 예술적 수월성을 높이려는 노력을 스스로 하지 않는다면 장차 단체의 존립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예술의 수월성을 성취한 대표 예술인과 촉망되는 신진 예슬인에게 충분한 발표와 공연 기회를 주므로서 단체의 위상을 높이고 예술인의 능력 배양과 사회 봉사의 일거양득의 효과를 노릴 수 있다


3. 정부의 지원 확대를 협력 체제 구축


 다소간의 변화는 있을지 몰라도 우리나라의 문화예술정책의 기조는 예술의 공공성 확대와 수월성의 제고에 역점을 두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예산지원에 있어서 사업 수행 후 평가 지원이라는 제도가 활성화 될 것이라는 점이다. 많은 비판을 받기는 했어도 정성 평가보다는 정량 평가 방식 또한 유효할 것이다.

 이와는 다른 측면에서 지방 정부의 지원 정책은 다소 전시적이고 대중들의 호응을 유발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선호할 가능성이 높다. 다양한 대중들의 문화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업적을 과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순수 예술을 지향하는 단체나 개인에게는 부적합 할지 모르나 언제까지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임상오 교수는 「예술과 예술가의 가치 」라는 논문에서 원주 지역에 거주했던 박경리 소설가의 경우 지역 주민 대다수가 유명 작가가 갖는 가치에 대해서 유익함을 인지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위해서 가구당 12.252원을 지불할 용의가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2005년도 말 기준으로 원주시 가구 수 104, 779 가구이므로 매년 13. 2억 원의 외부 편익을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문화경제학적 측면에서 한 지역에 유명 예술인이 거주하거나 활동한다고 할 때 지역이 추수할 수 있는 경제적 이득은 결코 작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지역을 대표하는 예술인을 배출한다는 것은 그가 소속된 단체뿐만 아니라 지역의 입장에서도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방 정부와 예술단체의 협력 관계는 win- win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글을 마치며


아무리 부인하려고 해도 시대는 변화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예술과 예술인의 역할과 정의도 변모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수많은 대학에서 문화와 예술에 관련된 학과가 개설되고 있고 전문적 소양과 교육을 받은 인재들이 배출되고 있다. 예술 기획과 경영은 더 이상 낯선 분야가 아니다. 참신한 기획력을 가진 전문가들에게 대중과의 소통과 상업적 가치를 매개해 주는 역할을 자리매김 할  때가 오기도 한 듯 하다.


위기가 기회라는 말이 지금은 유효하다. 대중들에게 예술의 아름다움을 전해주고 예술인들의 순수한 영혼을 보여주는 일은 삶의 진정성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주)

           

1) 인류 역사적으로 볼 때  근대사회는 인간이 종교의 영역을 벗어나 인간 이성의 능력을 확인하고 정치적으로는 시민사회를 형성하며,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의 태도아래서 사유재산을 확보하는 변동기를 말한다. 따라서 근대사회는 세습적 계급사회가 와해되고 민주사회로 이행되는 과정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에서 우리나라도 근대사회로 이행되어가는 과정에 있다고 볼 수 있다.


2) 근대성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를 확보하며, 사회적으로 평등하고 인간이 지닌 이성은 인류 전체가 박애의 공동 목표를 지향한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3) Hegel , 독일의 철학자, 『미학』에서 플라톤이 주장한 모방론을 비판하고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 아니라 예술미가 자연미보다 우월한 것임을 주장한다.

4) M. Heidegger, 『예술작품의 근원』

5) 왜 기초예술인가 - 기초 예술정책을 위한 제언, 한국예술위원회 참조

6) 상동 참조

7) 기초예술연대 주최, 한국문화예술진흥원 후원으로 2005년 4월 15일 마로니에 미술관 세미나실에서 역동성 있는 예술발전을 위한 정책의 원칙, 문예진흥원의 지원 구조, 어떻게 변할 것인가, 바람직한 문화예술위원회 지원구조 등에 관한 발제 및 토론이 있었다.

  

8) 2007년 3월 19일 기초예술연대 주최, 중앙대 예술경영학회 주관으로 문화예술재정 무엇이 문제인가?, 문화예술재정의 현황과 과제, 문화예술재정의 논리와 실리, 기초예술 현장, 중장기적 예술정책, 그리고 기초예술을 주제로 한 토론회

9) 이범헌, 「문화예술위원회와 문화예술단체 간 상호 협력 방안」 

10) 성남문화재단이 주축이 되어 성남시의 낙후지역인 태평동에 벽그림을 그림 

11) 안양시 재래시장 석수시장 내에 다양한 예술가들이 일정기간 거주하면서 예술활동을 펼침 

12) 원촌마을의 간판 개선 작업을 통하여 원주민의 의식을 바꾸어 나감 

13) 2005년 7월 26일부터 8월 15일까지 태백시 구와우 할아텍 전시관에서 「 만발하다- 태백. 생명」이라는 타이틀로 연 전시회


14) 이진숙 미술평론가,「만발하다- 태백. 생명」전시회 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