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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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도 2015

지렁이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0. 10. 3. 11:47

지렁이

 

천형은 아니었다
머리 함부로 내밀지 마라
지조 없이 꼬리 흔들지 마라
내가 내게 내린 약속을 지키려 했을 뿐이다

 

뿔 달린 머리도
쏜살같이 달려가는 시간의 채찍 같은 꼬리도
바늘구멍 같은 몸속으로 아프게 밀어 넣었을 뿐
지상을 오가는 더러운 발자국에
밟혀도 꿈틀거리지 않으려고 지하생활자가 된 것은 아니다
주변인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외톨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햇볕을 좇아 하늘을 향해 뻗어 가는 향일성의 빈손
보다
악착같이 흙을 물고 늘어지는 뿌리의 사유 옆에서
거추장스러운 몇 겹의 옷을 부끄러워했을 뿐

제자리를 맴도는 세상에서
빠르거나 느리거나 오십 보 백 보
허물을 벗을 일도
탈을 뒤집어쓰다 황급히 벗다 얼굴을 잃어버리는 일도 내게는 없으나
온몸을 밀어 내며 나는 달려가고 있다
이 밝은 세상에서 어두운 세상으로
온몸을 꿈틀거리며 긴 일획을 남기며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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