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안부 (2021.12) 69

이름을 부르다

이름을 부르다 떠나간 사람을 붙잡을 수는 없어도 마음 밖으로 어찌 보낼 수 있으랴 아무도 나를 불러주지 않을 때 나를 호명하면 장항선이 달려오고 바다에 가닿는 언덕 등 뒤로 엄동의 동백 몇 잎 붉게 피어난다 이제는 옛집으로 남은 사람아 끝내 종착역은 더 멀리 떠나 내 몸을 내리지 못할지라도 나는 어둠을 걸어 닿으리라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끝끝내 피어있는 동백아 가여운 내 몸을 버리지 못하는 까닭은 내 몸에 깃든 장항선 철길을 지우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안부 (2021.12) 2023.07.18

걷는 사람들- 기벌포에서

걷는 사람들 - 기벌포에서 사라지기 위하여 걷는 사람이 있다 두루미의 다리로 휘청거리며 절대로 뒤돌아보는 일 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온 몸으로 받는 자세로 하염없이 걸어간다 그러나 그는 저 강이 시작된 눈물에 닿기 전에 길이 끊겨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고요에 닿기 전에 발걸음을 되돌린다 그리움이라는 집은 이미 불타고 없는데 탕진한 생生의 목마름으로 이미 껍데기만 남은 알 속으로 몸을 버린다 오늘도 그는 사라지기 위하여 걷는다 * 기벌포: 충남 장항의 옛 이름

안부 (2021.12) 2023.07.13

화병

화병 내 몸엔 개화의 순간이 새겨진 꽃 문양 문신이 있다 깨지거나 버려질까 울컥거리는 두려움과 불안의 소멸은 몸과 함께 순장될 것이기에 그저 얌전히 당신의 손길을 바루는 일 뿐이다 뿌리가 잘린 채 가슴에 꽂히는 꽃 그림자가 출렁거리고 나는 그저 어딘가에 서 있을테지 의식 없이 내뿜는 향기와 흐트러진 자태를 즐기는 당신의 눈길이 사선으로 빗겨가고 있을 때에도 오직 흙과 불의 혼으로 기억하는 나만의 오르가즘이 피어나고 있음을

안부 (2021.12) 2023.07.10

말표 고무신 260

말표 고무신 260 일주일에 한 번 산길 거슬러 오는 만물트럭 아저씨가 너를 데려다주었어 말표 흰 고무신 260 산 첩첩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는 이곳에서 몇날며칠을 달려도 닿지 못하는 지평선을 향해 내 꿈은 말이 되어보는 것 이었어 나도 말이 없지만 너도 말이 없지 거추장스러운 장식도 없이 그저 흙에 머리를 조아릴 때 내 못난 발을 감싸주는 물컹하게 질긴 너는 나의 신이야

안부 (2021.12) 2023.06.30

손금

손금 길 없음의 표지판을 믿지 않고 끝까지 걸어가야 비로소 태어나는 말이 있다 눈 먼 더듬이가 짚어내는 모르는 단어는 가슴 어딘가에서 피어나는 꽃의 눈빛을 닮았으나 그저 입 안에서 맴도는 길들여지지 않은 바람의 영혼이다 길의 끝에서 우리는 강을 만나고 절벽을 만나고 사막을 만나기도 하지만 오늘 밤 태어나는 단어는 무엇이 될지 모르는 한 톨의 씨앗 하늘에 던지면 샛별이 되고 강에 던지면 먼 바다를 돌아 회귀하는 물고기가 되고 사막에 감추면 슬픈 낙타가 될지도 몰라 아직 여백이 남은 가슴의 편지지에 서툴게 감춰두고 마는 길 없음의 끝

안부 (2021.12) 2023.06.22

새우잠

새우잠 잠 자리는 반듯이 하늘을 바라보고 누워 팔다리를 가지런히 해야 하는데 온몸을 둥글게 말아야 잠드는 습관이 오래 되었다 바람이 들어 한기가 가득한 방에서 추위가 뭔지 잊어버리고 추워라는 말도 잊어버린 어머니는 몇 해 겨울을 그리 보내시었다 그 방 그 얇은 이불을 버리지 못하고 어머니 뱃속에서 그리하였듯 다리에 얼굴을 묻고 물속을 유영하는 새우잠이 이 세상의 모든 그리움의 상형象形임을 위안 삼는 밤 멀리 있는 그 누군가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할 듯하여 이 밤 나는 달팽이의 집 속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안부 (2021.12) 2023.06.09

바람이 되어

바람이 되어 하루에 두 번 어딘지 모르지만 올라가고 내려가는 기차가 서는 간이역에 서 있었던 듯 합니다 기다리는 사람도 없이 저 멀리서 밀물이 되어 다가와서는 순식간에 긴 꼬리를 남기며 사라지는 개펄위로 펼쳐지는 장엄한 용오름 같은 것 허물을 벗고 또 벗을 때마다 길어지는 탐욕의 손과 신기루를 바라보는 눈이 지워지고 맹목의 시간에 몸을 부딪칠 때마다 포말이 되어 가벼워지는 내가 바람임을 알았습니다 다시는 태어난 곳으로 돌아갈 수 없는 바람은 거듭 허물을 벗어야 하는 속죄와 환생을 꿈꾼 벌의 자화상 끝내 홀로 남을 수밖에 없는 기차처럼 무작정 당신이라는 종착역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안부 (2021.12) 2023.06.02

당신이라는 말

당신이라는 말 양산 천성산 노전암 능인스님은 개에게도 말을 놓지 않는다 스무 첩 밥상을 아낌없이 산객에게 내놓듯이 잡수세요 개에게 공손히 말씀하신다 선방에 앉아 개에게도 불성이 있느냐고 싸우든 말든 쌍욕 앞에 들어붙은 개에게 어서 잡수세요 강진 주작산 마루턱 칠십 톤이 넘는 흔들바위는 눈꼽 만한 받침돌 하나 때문에 흔들릴지언정 구르지 않는다 개에게 공손히 공양을 바치는 마음과 무거운 업보를 홀로 견디고 있는 작은 돌멩이의 마음이 무엇이 다른가 그저 말없이 이름 하나를 심장에서 꺼내어 놓는 밤이다 당신 천성산 노전암 능인스님 원적 김원행 기자 승인 2023.01.28 11:22 열반 일주 전부터 스스로 곡기 마다...수행 음식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제공 "천성산 노전암 능인스님은 개에게도 말을 놓지 않..

안부 (2021.12) 2023.05.16

구걸求乞의 풍경

구걸求乞의 풍경 거지라고 다 같지는 않다 어느 놈은 사기치고 도둑질을 하지만 그래도 양심 있는 거지는 동냥을 한다 양심 있는 거지라도 낯이 두껍지 못하면 지하철 계단에 무릎에 얼굴을 묻고 바쁜 발자국 소리를 하염없이 염불 소리로 듣는다 같은 지하철 계단이라도 조금 낯이 두꺼워지면 깡통을 놓고 거미가 먹이를 기다리듯 자세를 잡는다 돈이 쌓이면 사람들은 배부른 거지라 지레짐작하고 지나치기에 동전은 놔두고 지폐는 재빨리 거두어야 한다 이제 공력이 쌓이면 직립하여 서울역 같은 유동인구가 많은 곳으로 진출한다 어느 거지는 오백 원만 달라고 한다 줄 마음이 있으면 애써 오백원 동전을 찾기 보다는 천원 지폐를 꺼낼 것이라 예상하는 것이다 그런 잔 머리보다 아예 천원만 달라고 손 내미는 정직한 거지도 있다 구걸하는 거..

안부 (2021.12) 2023.05.09

후생 後生

후생 後生 저렇게 살아서는 안된다고 다짐했다 얼굴도 없이 뼈도 없이 맹물에도 풀리면서 더러운 것이나 훔치는 생을 살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다 하늘만 바라보면서 고고했던 의지를 꺾은 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무엇이든 맞서 싸우되 한 뼘 땅에 만족했던 우직함이 나를 쓰러뜨렸다 나무는 벌거벗어도 실체가 없음의 다른 말이다 벌거벗어도 보일 것이 없으니 부끄럽지 않다 당신이 나를 가슴에 품지 않고 쓰레기통에 넣는다 해도 잠시라도 나를 필요로 할 때 기꺼이 나는 휴지가 되기로 한다 나는 당당한 나무의 후생이다

안부 (2021.12) 2023.04.28

북의 행방

북의 행방 어느 산마루턱 암자에 만월로 뜨거나 잘못도 없이 공손히 무릎 꿇은 채 매를 기다리는 북은 전생의 속울음을 보인 적이 없다 가득 차 있으나 보이지 않는 공 속에 초식의 되새김질과 그렁한 눈망울로 그 누구도 해치지 않은 죄의 무두질 끝에 남은 가죽으로 무엇을 말할 것인가 나날이 낡아가는 암자의 노승은 열반의 염원으로 만월을 향해 북채를 잡고 고수 鼓手는 소리꾼의 발자국을 짚기 위하여 아우른다 그 때 북은 미리내의 수많은 별빛으로 반짝이고 미련 없이 떨어지는 붉은 동백꽃으로 홀연히 사라진다 그렇게 우리는 북이 되기 위하여 한 평생을 건너가고 있을 뿐이다

안부 (2021.12) 2023.0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