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안부 (2021.12) 69

Ab

Ab 한 걸음쯤 뒤에, 한 뼘쯤 아래에, 한 호흡 멈추고 조금 느리게 , 동그랗게 뜬 눈을 반쯤 내린, 나뭇가지에서 뛰어내린 낙엽이 땅 밑 어느 생명의 숨을 밟지 않으려고 조심스레 내려딛는 발자국 소리로 너를 명명한다 내 거친 들숨과 날숨을 연역하는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싹의 여림과 어디에 내려놓아도 낙하하는 폭포의 음계를 가지런하게 한 자리에 두손 모으는 가을빛 소리 너는 하늘을 푸르고 깊게 만드는 온음의 새 * Ab 에이 플랫, 내림 A 장조

안부 (2021.12) 2023.04.17

玉 다방

玉 다방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나를 사모하는 언니가 있었지 계란반숙을 몰래 주기도 하고 가끔은 거추장스럽다고 치마를 슬쩍 무릎위로 올리기도 했지 이제는 천국으로 떠났을 주인 이모는 장부에 적지도 않고 커피를 외상으로 주었지 강의실 대신 이 빠진 엘피판 저 푸른 초원 위에 뮤직박스에 앉아 시름 많은 청춘을 시라고 쓸 때 외상값은 발자국을 찍은 판넬로 받는다고 했지 학교는 학교 밖의 인생이라고 세상 밖 군대로 떠나는 나를 똥똥한 웃음으로 배웅해 주었지 그 언덕 너머 그 다방은 이제는 없네 레지라 불리던 언니는 어디서 나와 늙어가고 있는지 아직도 오십 잔 커피 외상값은 그대로 남아 있는데 그 이모는 어딜 갔는지 온데 간데 없는 세상 밖에서 나는 오늘도 서성거리네

안부 (2021.12) 2023.04.11

동네 친구

동네 친구 동네 친구는 삼십년이 넘었어도 아는 게 없다 고향도 나이도 물어본 적이 없다 어디서 뭘 하다 왔는지 알 필요도 없이 만나도 눈빛만 교환할 뿐이다 먼저 3동 친구는 그냥 산수유라고 부른다 부지런하게 봄이 오면 맨 먼저 노란 손수건을 흔들고 긴 겨울에도 붉은 열매를 내려놓지 못하는 욕심꾼이다 6동 친구는 앵두나무라고 하자 키도 작고 담장 너머를 기웃거리는 폼이 의심스러운데 동그랗고 붉은 눈망울을 탐내는 새도 없다 경로당으로 가면 몇 년째 오지 않는 친구는 까치이다 반가운 손님은 보이지 않고 빈 목소리만 가득하다 하루 종일 고개 숙였지만 늦은 밤 당당히 하늘을 보면 개밥바라기별이라는 친구가 나를 대신해서 눈물 한 방울을 발밑에 떨구어준다 집에서 청승떨지 말라고 동네를 한 바퀴 돌며 만나는 친구들의 ..

안부 (2021.12) 2023.04.04

풍경과 배경

풍경과 배경 누군가의 뒤에 서서 배경이 되는 그런 날이 있다 배롱나무는 풍경을 거느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배경이 될 때 아름답다 강릉의 육백년 배롱나무는 오죽헌과 함께, 서천 문헌서원의 배롱나무는 영정각 뒤에서 여름을 꽃 피운다 어느덧 오죽헌이 되고 영정각이 되는 찰라 구례 화엄 산문의 배롱나무는 일주문과 어울리고 개심사 배롱나무는 연지에 붉은 꽃잎으로 물들일 때 아름답다 피아골 연곡사 배롱나무는 가파르지 않은 돌계단과 단짝이고 담양의 배롱나무는 명옥헌을 가슴으로 숨길 듯 감싸 안아 푸근하다 여름 한철 뙤약볕 백일을 피면 지고 지면 또 피는 배롱나무 한 그루면 온 세상이 족하여 그렇게 슬그머니 누군가의 뒤에 서는 일은 은은하게 기쁘다

안부 (2021.12) 2023.03.24

자서

자서 울타리가 없는 집이라고 오랜 친구가 나를 일러 그리 불렀다. 무리(無籬)라 읽어야 마땅한데 그는 나를 늘 무이라 불렀다. 그 때마다 나는 무리(無理)와 무이(無二) 사이에서 할 말을 잃었다. 그저 하루하루를 감사한 마음으로 살면서 어느덧 고희가 되어 가는데 마땅히 이룬 것도 없고, 아쉬운 것도 없지만 친구의 말 대로 울타리가 없는 자유를 잊은 적은 없다. 내게 시는 내면에서 솟구쳐 오르는 안타까움의 고백이었을 뿐이지만, 이 말은 나름대로 생(生)을 통찰하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였다. 닿을 듯 닿지 않는 저 너머가 늘 궁금한 것이다.

안부 (2021.12) 2023.03.20

나의 안부를 묻다

나의 안부를 묻다 나호열 지난 삼 년은 길고 길었다. 불쑥 우리 앞에 괴물로 튀어나온 역병이 공포와 불안의 막다른 골목으로 우리를 내몰았다. 세상은 단절되고 복면의 시간이 서로를 외면하게 하는 시절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데 어느덧 황혼이 저만큼 고개를 내밀고 그리움과 외로움마저 잊어버린 채로 꽃이 피었다. 고희라 하니 안타깝고 종심이라 하니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나이에 시집『안부』는 지난 사십 년의 시업을 축약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언어를 부리는 사람이 아니라 언어를 섬기는 사람으로 살고자 애써왔는데, “말에 말을 덧붙이는 중층의 언어의 두께도, 심오한 의미의 무게도 담지 않으려고 한다. 아니 가볍다는 말은 어폐가 있다. 그의 시들은 가벼워져 가는 언어의 무게를 느끼게 하는 아이러니한 힘을 가지고 있다...

안부 (2021.12) 2023.02.14

가벼워지기 위한 두 가지 방법

가벼워지기 위한 두 가지 방법 황정산(시인, 문학평론가) 1.들어가며 우리는 모두 무게에 짓눌리며 살고 있다. 고통도 슬픔도 해야 할 일도 모두 무거운 중량으로 우리를 압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두 이 무거움을 늘리며 살고 있다. 더 많은 재산을 쌓으며 더 무거운 차를 구입하고 더 많은 관계를 만들어 관계 속의 고통을 가중 시킨다.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쌓아두고 더 높은 지위의 무게를 가져야 더 큰 행복과 그 행복을 위한 능력을 얻게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불행은 이 무게로부터 온다. 이 무게를 얻기 위한 인간의 욕망이 세상을 무겁게 만들고 우리를 분노와 고통의 무게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만든다. 나호열의 시는 가볍다. 말에 말을 덧붙이는 중층의 언어의 두께도, 심오한 의미의 ..

안부 (2021.12) 2023.01.28

시집 안부 (밥북 기획시선 30)

책소개 삶의 무게가 힘겨운 우리 모두의 안부를 묻는 나호열 시집 꾸준한 작품활동으로 자신만의 시 세계를 단단히 구축하여 나아가고 있는 나호열 시인의 시집으로 밥북 기획시선 제30권이다. 시집은 총 4부로 나누어 약 70편의 시를 차곡차곡 싣고, 문학평론가인 황정산 시인의 해설을 덧붙였다. 시편들은 시인의 독백을 넘어서 세상과 삶을 응시하고 관조하는 시인의 예리한 감각과 사유가 향연처럼 펼쳐진다. 사막 같은 현실의 삶에서 나지막한 희망의 노래를 속삭이고, 그 희망을 따라 이어지는 길이 시편들 속에 강렬하게 때론 애틋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독자들은 비상의 의지를 품은 시인의 관점과 세계를 들여다보며 삶과 세상을 더욱 풍성하게 가꾸는 희망의 감성을 키우게 된다. 황정산 시인은 “우리는 인간에게 가..

안부 (2021.12) 2021.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