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안부 (2021.12) 69

토마스가 토마스에게 16

토마스가 토마스에게 16 외로워서 거꾸로 걸었다는 시인의 사막을 나는 한 걸음 내딛고 뒤돌아보고 또 한 걸음 태양을 향해 걸어가면 야윈 그림자가 뒤따라오고 그 모습이 가여워 한 그루 나무로 서 있기를 오래 기도한다 평발을 섬겼던 한 켤레의 신발이 구름이 되어 날아가는 꿈을 꾸고 있는 동안 신기루 너머로 인생은 저만큼 앞서서 가 있는 것을

안부 (2021.12) 2023.11.17

천국

천국 가보지는 못했지만 가 보았다 오르고 또 오르면 하늘에 닿을듯하여 자전거 페달을 밟듯 제 발등에 눈물만 던지고 있는 나무들처럼 벌 서고 기도하는 법만 배웠다 허공은 깊고 또 깊어서 승천의 기개만으로는 어림없겠지만 며칠을 굶어 마주한 한 그릇의 밥 노동의 야행에서 마주한 벽에 기대었던 쪽잠에서 절벽을 넘어서는 새들의 아득하고 아늑한 비행이 좌측에서 우측으로 설핏 빗겨 지나갈 때 소유를 배우지 못해 가난이라는 단어가 없는 섬을 기억했다

안부 (2021.12) 2023.11.13

허물

허물 옷의 역사를 생각해 본다 동물에서 사람이 되었던 날은 부끄러움을 알게 된 그 날 감추어야 할 곳을 알게 된 그 날 옷은 그로부터 넌지시 위계를 가리키는 헛된 위장의 무늬로 입고 벗는 털갈이의 또 다른 이름으로 진화하였다 우화羽化의 아픈 껍질을 깨고 비로소 하늘을 갖는 나비를 꿈꾸며 나는 마음속의 부끄러움을 가렸던 옷을 벗고 또 벗었으나 그 옷은 나를 지켜주고 보듬어주었던 그 누구의 눈물과 한숨일 뿐 내 마음이 허물인 것을 알지 못하였다 가만히 내리는 빗소리 나를 대신하여 허물을 벗는 이의 아픈 발자국 소리로 사무쳐 오는 밤 나는 벌거숭이가 되어 옷의 역사를 새롭게 쓰고 싶다 부끄러움을 감추지 않고 가장과 위선의 허물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지는 문신으로 나를 향해 먼 길을 오는 이의 기쁨으로 이름 짓고..

안부 (2021.12) 2023.11.07

탑이라는 사람-선림원지 3층 석탑

탑이라는 사람 -선림원지 3층 석탑 해서는 안 될 말들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한 말들을 강심을 알 수 없는 마음에 던져놓기 수 백 년 그 말들이 굳고 단단해져 허물 벗듯 육탈肉脫하기 또 수 백 년 바람이 마름질하고 달빛이 갈아낸 말들은 폐허의 정적에 우뚝 서 있다 이제는 무너질 일만 남은 고독한 사내 심장의 박동이 묵정밭에 푸르다

안부 (2021.12) 2023.10.30

반골 反骨

반골 反骨 뿔이 나야 할 머리에 잽싸게 먹이를 움켜쥐어야 할 손에 용수철이 돋아났다 연둣빛 봄바람을 닮은 손길도 나를 윽박지르는 힘으로 다가온다 싶으면 어김없이 튀어오르는 용수철 목을 치고 다리를 잘라내도 허투루 죽어도 천 년은 더 살겠다고 시시껄렁 살찐 바람쯤은 한 판에 눕혀버리겠다고 사진 속에 나는 보이지 않는다 그 빈 자리에 장터목을 지키는 고사목 휘청 반골이다

안부 (2021.12) 2023.10.26

고시원

고시원 개천의 지렁이가 용이 되려면 고시考試가 외길이었지 청춘을 불사르고 가는 벼랑길 십 년 전 쯤 우연히 만난 친구가 고시원에 있다 하기에 면박을 주었지 이제 용이 되기엔 너무 늦은 나이 허튼 꿈을 버리라고 했지 그믐달처럼 휘어진 그의 등이 마지막 모습 언젠가 고시원에 불이 나서 죽은 사람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람들 개천에서 태어나 하늘로 오르는 용이 되고 싶었던 사람들 한 두 평 숨 쉴 수만 있으면 꿈도 꿀 수 있다고 저마다의 고된 하루를 눕히던 고시원 맞다 맞아! 쪽방도 아니고 여인숙도 아니고 합숙소도 아니고 고시원이라니 어차피 인생이란 죽을 때까지 치뤄야 할 엄숙한 시험 꿈으로 불타오르는 용들의 작은 집 온 세상이 한 채의 거대한 고시원 맞다, 맞아!

안부 (2021.12) 2023.10.16

68쪽

68쪽 멀지도 않은 길을 오래 걸었다 그 일획은 깊게 파인 상처처럼 승천하지 못한 용의 꿈틀거림 완성되지 못한 수동태의 문장으로 펄럭인다 표지도 목차도 없는 편년체의 지루한 책의 저자는 이 세상에 초대받지 않은 손님으로 왔다가 꼬리가 길어도 도대체 잡히지 않는 이야기들은 어느 날엔가 멈추고 말 것이지만 여전히 궁금한 책의 이름은 바람이 어떨까 생각하고 있다고 어지러운 발자국과 야윈 그림자만 만장으로 아득한 꿈

안부 (2021.12) 2023.10.12

목주름이거나 목걸이거나

목주름이거나 목걸이거나 한 평생을 목줄에 묶여 이곳까지 왔다 굴복인지 서툰 깨달음인지 이리저리 끌려 다녔다는 슬픔과 아니, 한 평생을 질긴 목줄을 끊으려고 이가 닳고 몸이 이지러졌다는 노여움이 내게 목줄을 채운 그를 그립게 한다 끈질긴 추격자를 피해 몸을 부숴버린 바람이 당도한 망명지처럼 목주름은 세월이 내게 준 값나가는 목걸이 아무도 호명하지 않는 천일야화의 주인공이 되어 또 한 줄의 문신을 새기는 죽은 봄이다

안부 (2021.12) 2023.10.05

일용직 나 씨의 아침

일용직 나 씨의 아침 아무리 늦게 세시에 자도 네 시면 눈이 뜨인다 내 몸무게만큼의 어둠이 눈꺼풀을 눌러도 어김없는 계시로 번득인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비와 눈의 낭만은 잊은 지 오래 침묵이 가득한 아고라 인력시장을 향하여 순례를 떠난다 호명을 갈구하는 사람들에게 이름은 구호품 구호 받지 못하고 아침 해를 등지고 돌아올 때 나씨에게는 허기를 때울 잠이 필요할 뿐 다이어트를 위해 아침밥은 거르고 점심도 건너뛰고 저녁은 생략한다 보라 동해에서 떠오르는 태양은 오늘도 이글거리는데 나는 외친다 나는 일용직이 아니다 나는 프리랜서다

안부 (2021.12) 2023.10.01

일용직 나 씨의 저녁

일용직 나 씨의 저녁 곧바로 천국에 닿을 것만 같은 쭉 뻗은 대로의 의붓자식 같은 외로움을 한 번 꺾어들면 음지식물이 독버섯처럼 웅크린 뒷골목 해고가 없는 일용직에서 해고당한 나씨의 컵라면 앞에 말라비틀어진 김치쪼가리 마침 저녁이면 저 세상을 보여주는 맛집 기행 덕에 만찬은 풍요롭다 컵라면은 한 입에 사라지지만 잡을 수 없는 화면 속에 시선을 넣으면 온갖 산해진미가 내 것인 양 한 상 가득하다 나씨가 일 년 동안 먹어도 남을 허기에 대한 헛가락질이 인생을 지휘하는 마스터 같다 오늘 저녁은 또 뭘 먹을까 곰 사냥을 나갔다 곰에게 쫓겨 돌아온 배고픈 안도감으로 일용직 나씨의 밥상은 보이지 않는 풍요로 가득 찬다 몽유의 이 짜릿한 육즙이라니

안부 (2021.12) 2023.09.11

사랑의 온도

사랑의 온도 사랑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아무리 뜨거워도 물 한 그릇 데울 수 없는 저 노을 한 점 온 세상을 헤아리며 다가가도 아무도 붙잡지 않는 한 자락 바람 그러나 사랑은 겨울의 벌판 같은 세상을 온갖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는 화원으로 만들고 가난하고 남루한 모든 눈물을 쏘아 올려 밤하늘에 맑은 눈빛을 닮은 별들에게 혼자 부르는 이름표를 달아준다 사랑의 다른 이름은 신기루이지만 목마름의 사막을 건너가는 낙타를 태어나게 하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길을 두렵지 않게 떠나게 한다 다시 사랑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묻는 그대여 비록 사랑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을지라도 사랑이 사라진 세상을 꿈꾸는 사람은 없다 사랑은 매일 그대에게 달려오고 사랑은 매일 그대에게서 멀어지는 것 온혈동..

안부 (2021.12) 2023.08.28

비애에 대하여

비애에 대하여 늙은 베틀이 구석진 골방에 앉아 있다 앞뜰에는 봄꽃이 분분한데 뒤란엔 가을빛 그림자만 야위어간다 몸에 얹혀졌던 수많은 실들 뼈마디에 스며들던 한숨이 만들어내던 수만 필의 옷감은 어디로 갔을까 나는 수동태의 긴 문장이다 간이역에 서서 무심히 스쳐지나가는 급행열차의 꼬리를 뒤따라가던 눈빛이 마침표로 찍힌다 삐거덕거리며 삭제되는 문장의 어디쯤에서 황토길 읍내로 가던 검정고무신 끌리는 소리가 저무는 귀뚜라미 울음을 닮았다 살아온 날 만큼의 적막의 깊이를 날숨으로 뱉어낼 때마다 베틀은 자신이 섬겼던 주인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안부 (2021.12) 2023.08.21

이십 리 길

이십 리 길 이십 리 길을 갑니다 그 길은 어디에도 닿을 수 있으나 사방팔방 둘러보아도 어디에도 없습니다 고개를 넘다 스르르 사라지고 문득 강가에서 발길이 멈추기도 합니다 바람을 기다려 자식을 떠나보내는 풀꽃의 마음 슬하에 있어도 이십 리 멀리 떠나도 이십 리 이십 리 길은 내 그리움이 서러운 그 곳 까지 입니다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으면 하고요 어린아이용 키 작은 의자가 있었으면 하고요 저녁 어스름에 닿아 가여운 내 그림자가 잠시라도 앉아 있으면 그만 입니다 이십 리 길은 내 마음의 길 당신도 그 길로 사뿐히 오시기 바랍니다

안부 (2021.12) 2023.08.08

미안하다 애인아

미안하다 애인아 세월은 거짓말도 용서한다 모질게 도망치듯 너를 보냈는데 때는 눈보라치는 겨울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다리에서 내게 결별의 찬 손을 내민 것은 너였다고 말한다 다시 어디서든 너를 만날까 두려웠는데 내 눈 안에 너의 얼굴이 담겨 있어 눈물로 씻어내려 했다고 말한다 세월은 자꾸 흘러 거짓말은 거짓말의 진실이 되고 나는 견우 너는 직녀라고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있을 때 온몸을 웅크린 채 땅바닥에 내쳐진 돌멩이는 딱딱한 눈물 이었다 세월은 주어를 이렇게 바꿔주는 것이다

안부 (2021.12) 2023.0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