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애에 대하여
늙은 베틀이 구석진 골방에 앉아 있다
앞뜰에는 봄꽃이 분분한데
뒤란엔 가을빛 그림자만 야위어간다
몸에 얹혀졌던 수많은 실들
뼈마디에 스며들던 한숨이 만들어내던
수만 필의 옷감은 어디로 갔을까
나는 수동태의 긴 문장이다
간이역에 서서 무심히 스쳐지나가는
급행열차의 꼬리를 뒤따라가던 눈빛이 마침표로 찍힌다
삐거덕거리며 삭제되는 문장의 어디쯤에서
황토길 읍내로 가던 검정고무신 끌리는 소리가
저무는 귀뚜라미 울음을 닮았다
살아온 날 만큼의 적막의 깊이를
날숨으로 뱉어낼 때마다
베틀은 자신이 섬겼던 주인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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