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를 향해 걸어가는 여정旅程의 시
- 사랑은 인생의 괴로움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다
-김동길
나호열 시인∙문화평론가
1.
박남주 시인의 시집 『존재의 이유』는 크게 보아 두 가지의 얼개를 가지고 있다. 인생의 후반기를 맞이한 노년老年에 대한 탐구가 그 하나이며, 또 하나는 그 노년의 삶에 근저에 자리 잡고 있는 존재의 항구성恒久性에 대한 질문이다. 시詩가 감정의 표현을 넘어 예지叡智 혹은 통찰의 높은 단계로 올라서기 위해서는 바로 지금. 이 자리에 스스로 살아있는 자신을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할 것인데 『존재의 이유』의 100여 편에 이르는 시편은 삶의 예지를 찾아가는 여정의 기록으로 읽을 때 그 면모를 기쁘게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해방 이후의 혼란과 625전쟁의 전후로 태어난 세대는 참으로 파란만장하고 극적인 생활사를 일구어온 끝에 노년에 이르게 되었다. 그들의 삶은 동전의 양면처럼 빈곤과 풍요, 아날로그와 디지털과 같은 극단의 이중성이 중첩된 내면을 지니고 있으며, 그 복잡한 내면이 함유하고 있는 ‘삶의 본질에 대한 회의懷疑와 소외疎外를 어떻게 극복해야할 것인가?’하는 또 다른 숙제를 걸머져야 하는 난관에 봉착해 있다고 볼 수 있다.
독일의 사회학자 짐멜Simmel은 인간을 ‘본능을 넘어 (~ )가치를 추구하는 존재’로 정의하였다. 이는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고자 하는 동물적 삶이 아닌 고양高揚된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 가치’는 사람마다 다르다. 어느 사람은 명예에, 어느 사람은 부의 축적에,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을 초개로 여기고 나라의 운명에 자신을 던진다.
그런데 이른바 골든에지지 Golden Age 라고 불리는 박남주 시인이 포함된 세대에게서의 ‘~ 가치’는 가족에 그 중심 축軸이 놓여져 있다. 전통적 유교문화儒敎文化에서 보여지는 남성에게 주어진 가족을 부양해야하는 가장家長의 책무, 여성에게는 삼종지도 三從之道의 굴레가 하나의 미덕으로 천착되어 쉽게 떨쳐버릴 수 없는 관념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년을 ‘늙어가는 것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라고 하거나, 미국 시카고 대학이나 미국 심리학회에서 연구의 결과로 내 놓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연령대가 7, 80대라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의 상황과는 거리가 있다고 보여진다.
그들의 연구 결과는 공부의 중압감이나 취업, 결혼, 승진 등에 더 이상 시달리지 않고 시간적으로 자유로워지는 때가 7, 80대라고 하는 것인데, 이는 스콧 니어링이 백세를 살면서 터득한 바, 인생의 계획표를 설정하고, 이에 따라 일관성을 지닌 생활태도를 견지하면서 검소를 실천함에 따라 찾아오는 골든에이지의 요건을 충족할 때만이 가능할 것이며, 이를 충족하지 못한 대다수의 노년은 삶의 본질에 대한 회의懷疑와 소외疎外를 극복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놓여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과 삼종지도의 책무에서 벗어나 온전한 삶의 자유를 누리며 존재의 참된 의미를 궁구窮究하는 기쁨을 맞이하는 일은 아무에게나 찾아오는 행운은 아닐 것이다.
2.
‘시 쓰기는 순수해지기 위함이며, 시는 사랑이 피어나는 장소’라고 터득한 박남주 시인의 말은 그 수많은 시의 정의를 단박에 넘어서서 삶의 본질을 꿰뚫는 명언名言이 아닐 수 없다. 한 마디로 박남주는 우리 현대사의 질곡桎梏을 뚫고 골든에이지에 이른 시인이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 40주년 아침에’ 라는 부제가 붙은 시 「도청으로 모이자」에서 ‘나는 그 때 도청에 가지 못했다’고 고백하면서 그 이유를 ‘도청 옥상에서 공수부대가 쏘아대는 기관총탄이/ 금남로 아스팔트 위로 쏟아지던 날 / 공포로 오금이 저렸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추자도 아낙들은 바다로 떠나는 남정네들에게 말없이 손을 흔들 뿐이라고 시 「묵언 배웅」에서 ‘만선이 안 돼도 좋으니/ 부디 무탈하게만 돌아오라고 / 눈빛에 염원을 담아 / 파도에 목소리를 담아 / 손을 흔든다’고 하는데 이 간절한 묵언黙言이, ‘사십 년이 지나고 / 다시 오월이 왔지만 나는 아직/ 그곳에 가지 못하고 있다’( 「도청으로 모이자」마지막 연)는 토로와 동일선상에서 읽어내야 할 시인의 염결廉潔이라고 주장하고 싶어지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간절한 염원이 이루어지기 바라면서 ‘다시 보름달이 뜨는 아침이 올 때까지/ 절대로 눈을 감지 않는’( 「묵언배웅」마지막 부분)묵언과 죽음을 두려워한 까닭에 역사의 현장에 가지 못했으며, 40년에 지나고 나서도 그 자리에 가지 못한다는 고백은 다 같이 시인이 구유하고 있는 심성과 숨결이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염결, 그 이상의 단어를 찾기는 힘들지 않겠는가. 부끄러움과 간절한 묵언을 염결에 담아 살아 온 시인이 살아온 이력을 세세히 알 수는 없지만 그는 그 부끄러움과 목숨에의 간절함으로 골든에이지의 기쁨과 슬픈을 함께 누리고 있음은 틀림이 없다.
30년 넘게 다닌 회사를 퇴직하고
자유롭게 살아볼까 했는데
일 년을 놀며 지내보니 좀이 쑤셔서
재취업을 했다
- 「루틴routine 벗어나기」 1연
위 시의 전문을 읽어보면 시인은 건축이나 토목에 관련된 전문직종에서 종사한 것으로 보인다. 어째든, 고희古稀가 될 때까지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 시쳇말로 낙하산이 아니라 당당히 자신이 가진 내공으로 그는 또 하나의 일상을 꾸려나가는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65세 이상의 노년 인구 중 반 이상이 구직을 희망하거나 생계를 위해 일터로 나가고 있는 형편이라고 한다.
그들은 앞서 말했듯이 자신의 일생을 가장家長의 헌신으로 인식했던 탓에 노후에 대한 경제적 여유를 축적하지 못했던 탓이다. 충효忠孝는 결코 버려서는 안되는 덕목이지만 세상은 달라졌다. 부모에 대한 효도 절대적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 호혜互惠의 개념으로 바뀐 것이다. 시인이 어느 만큼 부유한지는 모르겠으나 경제적으로 곤란한 지경에 처해 있지 않음은 분명한 사실이고, 그럼에도 넌지시 비치는 그의 여유가 밉지 않은 것은 시인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던 자신을 낮출 줄 알고 겸양을 실천하려는 의지가 시의 몸에 배어있기 때문이다.
자식과 골프는 내 마음대로 안 된다
권력과 골프는 고개를 들면 안 된다
누누이 들어서 다 알고 있지만
안 되는 이유는 욕심 때문이라
- 「도사의 경지」 1연
머리는 거짓말을 하지만 가슴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 「아픔의 차이」 마지막 연
박남주 시인의 시는 흔히 말하는 비유의 깊은 맛 보다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자신의 염결성을 경쾌하게 직설적으로 드러내는데 묘미를 지니고 있다. 주어진 언어를 유희遊戱로 바꾸지 않고 어설픈 통찰보다는 그 통찰에 이르려고 하는 어리석음을 생생하게 드러냄으로써 독자들에게 동감을 자극하는 것이다.
위에서 일부 언급한 「루틴routine 벗어나기」는 많은 노년들에게 자랑으로 들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시의 본의本意는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루틴이 의미하는 바의 안락한 습관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각성에 있다. 새로운 시간에 대한 도전, 즉 ‘평생의 루틴을 깨야겠다’( 「루틴routine 벗어나기」 마지막 행)는 안락으로부터의 탈피를 선언했다는 데에 방점이 있는 것이다. 「도사의 경지」 또한 우리가 이미 상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방하착放下着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반추한다. ‘우리나라 최고 부자인 대기업 회장이 골프를 치다가 / 필드에서 티Tee 하나를 주우면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 가난한 나도 무척 좋아한다’( 「도사의 경지」 2연 부분)는 반어反語에 가깝다. 「아픔의 차이」에서는 시어머니의 마음과 친정어머니의 마음을 빗대면서 ‘며느리를 딸처럼 생각한다는 / 시어머니의 새빨간 거짓말도 진실이 될 것’( 「아픔의 차이」 2연 부분)이라고 하면서 곧이어 며느리를 딸처럼 생각하는 유효기간이 아쉽다고 하는 직언을 던지므로써 겉치레 체면과 허위의 식언에 길들여진 우리네 속마음을 아프게 건드린다.
이와 같이 우리의 이율배반에 길들여진 생활의식의 뒷면을 통렬하게 꾸짖는 시법詩法은 자연스럽게 세태에 때 묻지 않은 순수純粹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박남주 시인이 추구하는 시의 길은 순수한 마음을 되찾는 길이며 자신의 살아 있음의 에너지가 자신을 끊임없이 역동적인 도전으로 향하는 길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인다.
3.
그렇다면 시인이 언명한 바의 순수의 실체는 무엇일까?
시 쓸 생각으로 그동안 허투루 보았던 걸 자세히 보게 되고
가볍게 넘기지 않게 되고
사유思惟하게 되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되니
남은 생애를 위한 선택을 잘한 것
같기는 하다
시를 쓴다는 자체만으로
내가 새로운 세계로 가고 있으니까
- 「시 공부를 하면서」 10연, 마지막 연
장장 11연 58행의 「시 공부를 하면서」를 잘 짜여진 시로 보여지지 않음에도 이 글에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박남주 시인의 가식을 허용하지 않는 인생관이 가감 없이 드러날 뿐만 아니라 오늘날 허명虛名의 시인들이 난무하고 시의 위의威儀가 훼손되어가는 마당에서도 시를 통하여 자신이 추구하는 새로운 세계로 나아고자 하는 열망이 적확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미당 서정주 선생은 시를 삼 단계로 나누면서 감정의 표현에서 출발하여 예지의 경지에 오르는 것을 시인의 과제로 삼았다. 앞에서 이야기한 예지와 통찰을 통하여 전인미답의 길을 만들어가는 것이 최상의 시인이라 이른 것이다. 박남주 시인은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은 세계를 순수의 세계로 받아들이면서 그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작고 보잘 것 없는 생명을 향한 해찰과 긍정, 그로 말미암은 사랑의 크낙함을 그의 순정한 가슴에 아로새겨지는 먹과 붓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 전개될 시인 박남주의 시세계를 기대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시는 독자라 일컬어지는 타자他者를 향해가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메아리와도 같은 것이다. 아니, 시인에게 가해지는 따뜻한 위로의 채찍질이라 말하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시가 언어를 도구로 삼는 이상, 언어의 사회적 약속을 무작정 도외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오늘날 들불처럼 번지는 현학衒學과 탈이성脫理性으로 무장한 유희의 즐거움을 마냥 모른 채 할 수도 없다. 그러나 현학이든, 탈이성이든 시인은 언어를 부리는 사람이 아니라 언어를 섬기는 존재임을 결코 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박남주 시인은 ‘10년이 더 지나고 나면 / 아직도 컵에 남은 물이 반이나 있다고,/ 생과 사의 경계를 서성이고 있을까?’(「간극」 마지막 연) 반문하면서 ‘스! 스쳐도 웃고 / 마! 마주쳐도 웃고 /일! 일부러라도 웃자!라고/ 한바탕 웃으면 부드러워진다’(「허풍」 2연) 는 긍정의 마음을 잊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어김없이 다가올 죽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음을 난사(?)하는 낙관은 순수 세계에 대한 열망을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가 꿈꾸는 순수세계는 가물거리는 먼 신기루도 아니고 순식간에 사라지는 무지개도 아니고 사멸로 상징되는 겨울의 한가운데 있다. 시 「눈 사진을 찍었다」를 읽어보자.
눈이 펑펑 쏟아지더니
온 세상을 덮었다
새 이불 넓게 펼쳐 놓은 겨울 밤
그 위를 뒹굴었던 나른함이 그리워
눈 위에 누워본다
어린 시절처럼 손에 손잡고
새하얀 인화지에
새하얗게 박힌 포즈가 붕어빵 같다
나이도 없고
주름도 없고
신분도 없는
평등한 입체사진 한 장 출력되었다
- 「눈 사진을 찍었다」 전문
눈은 비와 달리 쉽게 사라지지 않고 세상의 높낮이를 평등으로 채워 놓는다. 그 흰 빛은 순결하며 덧없는 경계를 허물어뜨린다. 이 세상에 변화하지 않는 생물은 없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주름이 늘어나도 모든 생물, 특히 사람의 마음속에는 샘물처럼 솟아오르는 에너지,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 불러도 좋을 사랑이 무궁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 우리가 의義라고 지칭하는, 보상을 바라지 않고 거리낌 없이 행하는 마음이 사랑이다. 우리가 어머니를 끝내 잊지 못하는 것은 오직 그녀들의 무한한 헌신이 나이가 들어갈수록 뼈에 사무치기 때문이다. 그러한 내리사랑이야말로 순수한 동심 童心을 평생동안 잊지 않게 하는 동력이 된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자식은 애다!
애야!
내가 너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네가 나를 살리는 것이다
애야! 미안하구나
애야! 고맙구나
피 한 방울 땅에 흘리지 않고
고통을 주지 않게 양을 죽이는
고비사막의 유목민은
게르를 옮기거나 양을 이동시키거나
아이를 키우거나
반복에서 얻은 숙달된 삶에서 사랑을 얹는다
어머니가 평생 사랑을 얹어 불러준
가슴 찡했던 말
아리도록 그리운 말
애야!
- 「애야」 전문
보는 각도에 따라 시를 평가하는 기준은 다르겠지만 시집 『존재의 이유』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을 고르라면 주저하지 않고 시 「애야」를 꼽겠다.
유목민들에게 양은 고기와 젖을 주는 양식이고, 옷인 생계의 수단이다. 그러나 유목민들은 그런 양들을 가족으로 여기고 어쩔 수 없이 죽임을 행할 때에는 품에 양을 안고 단 한 번 급소에 칼을 꽂아 고통 받지 않게 한다. 유목민들에게 양은 언제나 보살펴야 하는 어린 아이이며 고마움을 느끼게 하는 존재이다. 시인은 어머니가 불러주었던 ’애야‘를 유목민의 마음에 빗대면서 냉정과 평정심으로 자신을 키웠던 숨결로 잊지 않고 있다. 이 시는 시인이 추구하는 순수 세계의 덕목에 감사하는 마음, 고마움을 얹는 풍요로움을 줄 뿐만 아니라 『존재의 이유』의 근간이 되는 가족애家族愛 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4.
시집 『존재의 이유』은 「n 번방의 충격」, 「종각역 4번 출구 노숙자」. 「봄은 찾아 왔건마는」 등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 인터넷 성범죄, 가족의 해체와 같은 미중유 未曾有의 사태를 그린 몇 편의 시를 제외하고는 아내, 딸과 아들, 특히 예은이라는 예쁜 이름를 가진 손녀를 언급한 시들이 대부분이다. 이는 가족이 급격히 해체되는 우리사회의 음영 陰影을 생각할 때 매우 특이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시인이 그리고 있는 가족의 관계는 사랑이 넘치며 삶의 기쁨을 만끽하는 즐거움을 우리에게 건네주기도 한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손녀의 일상을 그린 시편들에 있다. 손녀 예은이는 초등학교 4학년 학생으로 맞벌이 부모 슬하에서 방과 후 많은 시간을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지낸다. 좌충우돌, 깜찍, 재치로 똘똘 뭉친 손녀의 에피소드를 엮어낸 할아버지 시인은 단순히 손녀를 사랑하는 마음을 과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보상을 바라지 않는 마음, 자신의 속내를 감추지 않는 순진무구를 내성 內省의 힘으로 온전히 구현해 낼 수 없다.
때 묻지 않은 순수는 동심에 있다고 본다면 시인에게 있어서 손녀는 자신을 투영하는 거울이다. 다시 말해서 손녀라는 거울을 통해서 켜켜이 쌓인 추억 속에 어쩔 수 없이 묻어나는 때를 지워내고 무의식에 오염된 사회적 관계의 허상을 무너뜨리므로써 새로운 원기를 북돋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무작위로 한 편의 시를 읽는다
썰매장에 가자고 방한복으로 완전무장한 채 부츠를 신던 손녀가
전신갑주를 입었다고 말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손녀는 언제나 배운 걸 바로 적용하는 걸 좋아하는데
신앙생활 수십 년 해온 내가 목사님 말씀을 그대로 적용하지 못한 부끄러움에
2020년 특별 새벽기도 5일 동안 들은 설교를 상기해 보았다
진리의 허리 띠, 의(義)의 호심경, 평안의 신발,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이란 비유가 실감되는 에베소서 6장을 다시 읽었다
썰매자 가려고 준비한 손녀의 모슴을 통해
전신갑주를 입은 로마 병사 보았다
- 「전신갑주」 전문
전신갑주는 말 그대로 온몸을 철판으로 감싼 방호복이다. 시인은 방한복 防寒服을 입은 손녀의 모습에서 신앙의 경건함을 상기한다. 이와 같이 손녀는 혈육의 정을 나누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상식에 길들여진 자신을 타파하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반면교사이기도 하다.
오늘은 손녀가 연필도 세일을 하느냐고 물어서
무슨 연필을 세일하겠니? 했다
풀어놓은 문제지를 보니
’연필 한 자루 정가가 800원,
할인가격은 570원이다
32자루 샀는데 얼마나 싸게 샀는가?‘였다
’적당히 싸게 샀다‘로 답이 쓰여 있었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손녀는 정답을 썼다고 태연하다
- 「국어로 풀다」 2,3,4 연
워즈워드 Wordsworth의 「무지개」라는 시에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란 구절이 있다. 엉뚱하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 마음, 일그러진 편견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은 마음을, 시인은 손녀라는 거울을 통해서 오래 잊고 있었던 순수 세계로 초대하는 것이다. 어디 손녀뿐이랴! 박남주 시인을 포근히 감싸고 있는 가족이라는 거울은 시인의 삶에 감사하는 마음을 꽃 피우게 하는 낙원이 아니던가!
박남주 시인은 존재의 이유를 핏줄에 대한 사랑으로 받아들인다. 그 생각은 옳다. 자신의 가족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인류애를 이야기할 수 없다. 오래 전 맹자는 가족으로부터 시작되는 사랑을 추은 推恩으로 확대되어야함을 역설했다. 맹목적이고 타인의 삶에 위해 危害를 끼치지 않는다면 박남주 시인이 펼쳐 놓은 『존재의 이유』는 아무리 읽어도 낡지 않는 경전이 될 것이다.
외손녀 시집 갈 때까지
남은 세월은 아날로그로 흐르게 놔두고
붙잡고 싶은 시간은 디지털로 쪼개어 살아야겠다.
- 「손녀가 시집갈 때까지」 끝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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