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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용 시집 『해지는 세상도 꽃이 핀다』:수처작주隨處作主의 상생相生을 묻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1. 8. 10. 14:28

跋文

 

수처작주隨處作主의 상생相生을 묻다

나호열∙시인, 문화평론가

 

시인이란 자신의 사상이나 감정을 보다 쉽게, 보다 힘 있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 워즈워스, 코울리지

 

 

1.

 

바야흐로 우리는 삶의 행로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을 맞이하고 있다.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고 믿었던 가치들, 비판 자체가 혐오의 대상이 되던 시절로부터 참 멀리 온 것이다. 한 두 가지 예를 들면 입 밖으로 발설하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웠던 동성애나 천륜을 어기는 것으로 비판받던 비혼非婚과 이혼의 증가는 불합리한 관습으로부터 벗어나 인간 본연의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다시 제기하게 만드는 것이다. 한 마디로 다양성의 시대, 가치의 혼융渾融과 통섭通涉의 사유를 지향하는 오늘의 삶은 복잡미묘한 가치의 충돌로 말미암은 난경難境으로 이끌어가는 기제가 되기도 한다.

 

잠시 우리의 현대사를 돌이켜 보자. 35년간의 식민지 지배와 타의에 의해 이루어진 해방, 곧이어 발발한 삼 년간의 동족상잔의 참혹한 전쟁, 독재와 경제적 부흥, 끊임없이 이어진 항쟁을 거쳐 이루어 낸 민주화와 같은 역경逆境들은 여전히 칸트 Kant의 정언명령定言命令을 곱씹게 만든다. 그가 굳건하게 믿었던 선의지善意志 Good Will 나, ‘모든 인간을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하라’는 명제는 항상 옳으면서도 항상 우리를 낭패감에 시달리게 만들지 않는가!

 

시집 『해지는 세상도 꽃이 핀다』는 이 ‘옳음’에 대한 화두를 가슴에 간직한 채 이순耳順을 맞이한 한 교육자의 독백이다. 저 민주화의 열망이 붉게 타올랐던 80년대, 약관의 젊음은 어느덧 인생의 후반기에 들어섰고, 교육의 현장에서 묵히고 아로새겼던 시인의 토로는 조용한 절규라 불러도 마땅하다. 생뚱맞게 절규라니 어불성설 같아도 『해지는 세상도 꽃이 핀다』 육 십 편의 시를 통독하게 되면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오래 전 신경림 시인은 ‘우리 시가 억지에 의해 부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말장난에 시종하고 사소한 것에 매달려 시 자체를 왜소하게 만들고 하는 것이 모두 절규성의 상실과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란 무엇인가」, 『내일을 여는 작가』. 2000년 여름호)라고 하였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의 우리 시에 대한 비판적 전망이었으므로 오늘날의 시단詩壇에 상응할 수 있는 주장이라고 볼 수는 없어도 표현表現이 의미하는 농축된 절실함으로부터 우러나온 절규가 시의 본질임을 천명하는데에는 부족함이 없다. 체험의 현실성이 수반되지 않는 상상력은 공허하고, 곡비 哭婢의 서늘한 아픔을 나눌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해지는 세상도 꽃이 핀다』은 검이불루儉而不陋의 필치로 오랜 세월 시의 요의要義를 매만져 오면서 굳이 함성이 아닌 독백으로도 너끈히 산 하나를 울릴 수 있는 공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2.

 

시집 『해지는 세상도 꽃이 핀다』에는 몇 개의 시적 자아가 드러나 있다. 그 하나는 김기용 시인이 술회한 바와 같이 자연과 더불어 성장했던 유년의 정서로 거자필반 去者必反, 또는 극즉반極卽反으로 통칭되는 생명의 순환을 터득함으로서 얻어진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며. 또 다른 하나는 36년에 이르는 교직생활을 통해 형성된 사회적 자아自我이다. 농촌생활에서 거두어진 서정적 자아와 훈육을 실천하는 자아 사이에는 생활인으로서의 자아라는 또 다른 층위의 의식이 자리 잡고 있기도 하다. 한 생애에 있어 이와 같이 길항拮抗 하는 자아가 서로 충돌하고 화해하며 성숙해 가는 그 사이에는 개인사를 넘어 시대를 관통하는 아픔을 관망하는 또 다른 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시집의 마지막에 놓인 시 두 편, 「낚시터 풍경화」와 「남한산성 아래」는 1997년 여름과 가을에 쓴 시들로 ‘여기저기 찌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이 / 조금씩 흐려진다. / 모든 것은 정지되어 있다./ 입질이 없는 낚시터에서.’( 「낚시터 풍경화」 마지막 부분)와 같은 불혹不惑을 향해 달려가는 개인의 무력감과 오버랩 되는, 풀처럼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는 서민의 애환을 남한산성의 치욕의 역사와 병치하면서 IMF의 환란을 속절없이 관망하는 아픔을 보여주고 있다.

 

무너진 성곽 초석 다시 놓고

나무뿌리로 얽혀서

고슴도치마냥 화살 꽂혀도 끄떡없는 작은 키의 사람들이

배고파도 몸 아파도 아무 말 없이 거기

그 산의 밑둥에서 핏자국 함께 닦아주며

서로를 위해 웃고 있다.

 

- 「남한산성 아래」 마지막 부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병자호란은 위정자들의 그릇된 판단으로 애꿎은 민중들의 고초를 감내하게 만든 치욕적 사건이다.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남한산성에서의 농성은 치욕으로 끝났다. 여전히 남한산성 아래에는 장場이 서고, 그 날의 치욕은 삼전도비를 남았다. 세월이 흘러도 입질이 없는 낚시터에서 소일하는 개인과 ‘복정동 사거리에 서서/ 노동을 파는 키 낮은 사람들 / 목숨처럼 성 지키는 사람들이 거기 모여 /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는 사람들은 의식의 내면에 웅크리고 결코 사라지지 않고 아프게 각인된 시인의 자화상이 아닐까? 1980년에 쓴 「눈의 노래」와 「저녁놀의 훈화訓話」는 ‘사랑은 말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 시간으로 전하는 것’(「사랑으로 남기고 싶다면」 부분)이라는 시인 자신에게 던진 약속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되새겨 보아야 할 시의 진정성인 것이다. ‘가슴 펴고 살아야 한다./ 마른 나무 잔가지 위로 / 눈 내려 쌓여도’ ( 「눈의 노래」 1연 )와 같은 젊음의 패기는 세월이 흘러도 더욱 강성해져서 ‘믿음이 부서져 / 모래성처럼 무너질 때 /분노하지 마라.’( 「저녁놀의 훈화訓話」)는 상생相生의 의지를 곧추세우는 경지로 나아가는 것이다.

 

3.

 

회사후소繪事後素나 교언영색巧言令色은 논어에 나오는 말로써 시의 활용에 빗대어 이야기하는 데에는 무리가 따를 수도 있다. ‘예필이충신위질 유회사필이분소위선禮必以忠信為質, 猶繪事必以粉素為先 : 예禮는 충忠과 신信으로 바탕을 이루는 것으로, 마치 그림 그리는 데에 흰 바탕을 먼저 칠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나 ‘자왈 교언영색 선의인 子曰 巧言令色 鮮矣仁: 말을 잘 꾸미고 얼굴빛을 좋게 하는 사람 가운데는 어진 이가 적다’는 뜻은 마땅히 예禮를 인간의 됨됨이의 기본으로 논한 것이다. 우리가 예술 행위(자)를 이야기할 때 우선시 되는 것은 작품의 수월성秀越性이다. 그러나 문학을 포함한 예술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행위라고 할지라도 체험의 진정성이 결여된 상상이나 난삽한 문장의 생경함은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와는 달리 예술의 기능 중의 하나인 배설의 욕구, 표현의 욕구를 수렴함으로써 감성의 정화를 꾀하고자 하는 것은 극기복례 克己復禮의 기쁨을 누리는 것과 일치한다. 이렇게 본다면 김기용 시인의 시집 『해지는 세상도 꽃이 핀다』는 시인의 생애를 요약하는 한편, 이순을 맞이하기까지의 수기修己의 기록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소 길기는 하지만 시 한 편을 읽어보기로 한다.

 

 

반복은 의미 강조에 지나지 않는다는

단순한 언어 방정식은 틀린 공식이다

반복은 새로움이다.

 

호수 한 바퀴 걸을 때도

처음 보는 호수의 풍경이 전부가 아니다

반복하여 걷다보면

감동과 떨림의 새 풍경화가 나타난다.

길옆 풀 섶에 고개 숙인 작은 꽃 보이고

물새들 서로 정들어 우는 소리 더 크게 들리고

산 그림자 더 짙게 내려온다.

 

일상은 늘 같은 모습으로 있지 않다.

그대의 생활은 영상 파일처럼 똑같이 재생되지 않는다.

하루 해 뜨고 지는 것도, 계절 바뀌는 것도

매 순간 기억의 층위에 가서는

다른 옷 갈아입고 나타난다.

 

매일 오가는 출근길에서, 매일 만나는 일터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들이

반갑지 않은 지루함을 안겨 준다면

그것은 일상의 틀을 붙들고 있는 그대가 만드는 것이다.

 

어제도 오늘도 마주치는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도

눈썹 위 머리카락 매일 새롭게 날리고

입가의 미소 매일 새롭게 번진다.

 

퇴근길 집 앞 돌아 와 누르는

초인종 멜로디 소리도

가족과 어젯밤 나눈 사랑의 크기만큼 다르다.

 

반복은 무의미한 재생이 아니다.

먹을 때마다 맛이 다른

장독에 오래 묵은 된장 같이

정겨움 하나 덤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 「반복한다는 것의 미학적 분석」 전문

 

오늘날의 자기치유는 ‘느림’과 ‘느림’으로부터 얻어지는 통찰에 있다. 「나의 창에 다가오는 것들」, 「고속도로 달리다 보면」 등 다수의 시들은 무심히 지나가는 일상과 사물의 관찰을 통해서 관조의 세계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의 내공은 수신修身의 빛나는 훈장이 아닐 수 없으며, 교언영색의 비유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시의 품격을 높일 수 있다는 증명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자기치유로서의 시 쓰기는 자아의 세계화라는 서정抒情으로부터 출발한다. ‘꽃’, ‘나무’. ‘하늘’, 등등의 소재는 상식적인 감정이입으로 감상 感想의 층위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김기용 시인에게 있어서 자연물과의 대화는 단순한 감상을 넘어 내성 內省의 경지까지 이끌고 간다.

 

아! 혼자가 아니구나.

바람에 출렁이듯 살 맞대고

한 세상 사는 일

혼자라도 혼자가 아니구나.

 

 

- 「꽃무릇 서식지」 마지막 연

 

꽃무릇은 상사화와 마찬가지로 잎이 돋아나는 시기와 꽃이 피어나는 시기가 달라 화엽불상견花葉不相見, 즉 이루지 못한 사랑의 표상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김기용 시인은 여타의 시인들이 다루지 않은 꽃무릇의 군집 속에서 아름다워지는 어울림의 세상을 발견하고 있다.

 

찢기고 피 묻은 옷자락 다 뜯어내어

바람에 훌훌 흩날려 보내고

거기 당당히 서 있는 이유

 

돌아볼수록 애틋한 눈망울 같은

차마 꺼내 놓지 못한 내밀한 이야기 같은

줄기마다 맺힌 진홍빛 사랑 지키려 함이었구나.

 

- 「 10월의 감나무」6연과 마지막 연

 

늦가을의 감나무는 홍시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우리는 감을 모두 거두어들이지 않고 날짐승들의 먹이로 까치밥을 남겨두는 넉넉한 마음을 미덕으로 알고 있다. 이는 인간의 관점에서 미물들과 나누는 호혜互惠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감나무가 주체적으로 자신들의 열매를 만들어냄에 있어서의 분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감나무를 동물적 이미지로 전화시킴으로서 보다 역동적인 생명의 에너지를 표출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독특한 서정을 보여주는 다수의 시들은 김기용 시인의 시안詩眼이 보다 폭넓은 우주적 관점으로 확장되는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꽃들의 생각」도 영산홍을 매개로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평등의 외연에 자리잡고 있는 다름의 포용 문제를 다루고 있다. 앞의 「꽃무릇 서식지」 에서는 여럿이면서 하나인 어울림의 세계를 그려내었다면 「꽃들의 생각」에서는 평등과 다름의 불편한 관계를 소환하고 있다. 이 글의 서두에서 다양성이 이 시대를 가늠하는 잣대라고 언급한 바 있는데, 다양한 가치를 포용하기 위해 얼만큼의 역지시지 易地思之가 필요한지에 대한 논의는 숙성되지 않은 상태이다. ‘주고 받기 Give & Take’? 상생 Win – Win’? 보다는 ‘나는 이기고 너는 져야하는 I Win – You Lose’ 승자 독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이 아닌가? 그래서 분홍색 영산홍들은 ‘세상은 한 가지 색으로 빛날 때 /가장 아름다운’ ( 「꽃들의 생각」 1의 마지막 부분)것이라고 단정한다. 그런데 분홍색 영산홍 사이에 홀로 핀 흰 색 영산홍에게 분홍색 영산홍들은 이렇게 말한다.

 

분홍 영산홍들이 말한다.

아니야, 넌 우리만큼 햇볕을 쬐지 않았어.

넌 뿌리가 달라서 우리가 될 수 없어.

 

분홍 영산홍들이 에워싸고 한 목소리로 말한다.

넌 세상을 물들일 만큼 예쁘지 않아.

넌 피지 말아야 했어.

 

- 「꽃들의 생각 2」의 마지막 2 연

 

우화 寓話로 표현된 이 시 또한 어느날 영산홍 꽃밭에 홀로 핀 흰 영산홍을 보면서 오늘날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갈등과 소외를 읽어내었다. 다민족사회로 이행되어가면서도 차별의 의식을 버리지 못하고 있거나, 학벌과 지연으로 얽힌 우리의 곱지 못한 초상을 그려낸 시인의 서정은 개인을 넘어 두레의 미덕이 사라진 공동사회의 아픔까지 손길이 닿아 있는 것이다.

 

4.

 

김기용 시인은 생애의 반이 넘는 시간을 학교에서 보냈다. 그가 봉직한 학원은 이상을 꿈꾸게 하고 자아실현의 도약대로서 사회로 나가기 전의 청소년기의 학생들과 함께 하는 공간이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놓여 있는 청소년기는 이른바 교육학에서 말하는 생애 주기 중에서 자아 정체성ego-identity을 확립해야 하는 과제, 즉 발달과업을 수행해야 한다. 자아정체성이 형성되지 못하고 방황하게 되면 역할 혼란role confusion 또는 자아 정체성 혼미identity diffusion가 온다. 이는 직업 선택이나 성 역할 등에 혼란을 가져오고 인생관과 가치관의 확립에 심한 갈등을 일으킨다. 그런데 우리의 교육현장은 성적지상주의에 매몰되어 개인의 창의성이나 자아계발에 취약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른바 MZ 세대의 자유분방함과 다양한 개성을 포용하는 교육과는 거리가 있음이 틀림이 없는 것이다. 과거의 청소년들과는 사유의 방식과 생활의 양태가 다른 신세대들에게 즉응력을 지닌 교사가 되기는 매우 힘들다.

시집 『해지는 세상도 꽃이 핀다』의 2부에 주로 수록된 많은 시들이 교실의 풍경 – 「수업시간 시작 전」, 「매미소리」 등- 과 교사로서의 애환 – 「경험해 보지 못한 원격수업 첫 학기」,「교직원 회의록」, 「꽃들이 아는지 몰라도」,- 그리고 삶의 길잡이로서 어린 학생들에게 들려주는 훈화訓話 - 「소금되지 마라」, 「어린 너희에게」, 「해지는 세상도 꽃밭이 된다」 등-으로 채워져 있는 것도 오늘날의 교육현장이 처해 있는 난관에 대한 반성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교직에 몸담았던 사람들은 학생들에게 귀감이 되어야 하는 언행일치의 압박감과 생활인으로서의 갖게 되는 갈등의 국면이 얼마나 힘든 여정인지를 잘 알고 있다. 교사로서의 항심恒心은 일상인의 생활 속에서도 굳건하게 지켜야하는 덕목이기에 인격의 도야는 지식의 전달자를 넘어서 멘토의 역할까지 수행해야하는 과제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시 「소금되지 마라」는 한 개인으로서의 김기용과 교육자로서의 김기용의 면모를 보여주는 시로 으뜸의 자리에 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출렁이는 바닷물 사각의 감옥에 가두고

햇볕 고문으로 마지막 물 한 모금까지 뺏어 만드는 것이라면

차라리 소금 되지 마라.

 

서해안 어느 섬마을, 지중해 외진 해변 어느 염전에서

증발지로 결정지로 강제 이송 당하며

푸른빛 빼앗아 창백한 결정체 만드는 것이라면

그 아픈 이름 천일염 되지 마라.

 

그 안에 무수한 생명 품은 바닷물로 있어라.

소금만이 세상을 지키는 것은 아니다.

과일이 각각의 맛으로 존재하듯

소금도 짠맛 하나로 존재할 뿐이다.

 

뜨거운 땡볕 아래 이리저리 짓밟히고

만드는 자의 고통까지 먹고 짠맛 얻는 것이라면

아예 그 짠 소금 되지 마라

 

신선한 해초의 맛으로

비릿한 물고기 맛으로

뭍을 향해 넘실대는 푸른 바닷물로 있어라.

 

- 「소금 되지 마라」 전문

 

이 시는 김기용 시인이 걸어온 인생관의 축약이면서 무엇이 되기 이전의 어린 학생들에게 자유와 순수를 버리지 말라는 값진 전언傳言으로 읽힌다. 모든 생명체는 소금 없이는 살 수가 없다. 그러나 소금은 우리 생명을 위협하는 독이 될 수도 있다. 독약毒藥의 양면성이 비단 소금에만 있으랴. 나의 호위호식이 다른 이의 가난을 유발하고, 나의 기쁨이 타인에게는 슬픔이 된다는 점에서 이 시는 상생의 의미가 자신의 진정한 자유와 정신의 순수를 지키는 것임을 증언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가두지 않고 있는 그대로 놓아두는 것, 생태生態의 불편함을 몸으로 체득하는 경지는 전 생애를 통해서 이루어내야 할 구도의 길과 맞닿아 있는 것이 아닐까.

 

5.

 

『해지는 세상도 꽃이 핀다』는 시인으로서 김기용의 첫 시집이다. 이 시집의 60편의 시는 약관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순에 이르기까지의 농축된 생활사이면서 동토를 뚫고 나오는 새 싹의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 맨틀에서 솟구쳐 나온 용암처럼 누르고 익힌 그의 시는 붉고 뜨겁다. 허장성세의 기교가 아닌 묵언의 절규는 이제 또 다른 세상에 꽃으로 피어날 준비를 하고 있다. 이 글에서 미처 언급하지 못한 가편들은-「성음법 적용하기」와 같은 시들- 한결 같이 어울려 사는, 서로 기대고 사는 두레의 꿈을 보여주고 있다. 그 중에서 시 「등받이」는 머리의 사유가 아닌 가슴의 사유로 읊어낸 시로 진실한 관조의 평화를 보여주고 있다.

 

서로 돌아앉아 등을 기대어 보라.

지인(知人)의 등에 기대어 잠시 쉬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살다 보면

거친 바위 언덕이라도

기대고 싶은 때가 있다.

 

삶의 매듭이 연줄처럼 얽히고

절망의 파편들이 방향 없이 날아들 때

기우는 몸 실을 벽 하나 찾는다.

 

서로 돌아앉아 등받이가 되어 보라.

누군가의 등받이가 되어준다는 것이

얼마나 따뜻한 일인가?

 

살다보면

부서지는 모래 언덕이라도

기대고 싶은 때가 있다.

 

폭풍우 몰아치는 밤길 같은 세상

언덕배기 중턱에 눕고 싶은 이들을 위해

큰 나무의 편안한 밑둥치가 되어 보라.

 

누군가의 등받이가 되어 체온 섞고

숨 쉬는 느낌까지 나눈다는 것이

얼마나 따뜻하고 편안한 일인가?

 

- 「등받이」 전문

 

수처작주隨處作主 는 입처개진立處皆眞과 짝을 이루는 말로서 임제록 臨濟錄 에 수록되어 있다. 불도를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서 어느 곳에서나 환경에 구애됨이 없이 능동적으로 행동하라는 뜻이며, 그리하면 바로 그 자리가 참됨이 실현되는 장소가 된다는 것이다. 시 「등받이」는 이미 김기용 시인이 체득하고 있을 지도 모를 수처작주의 기미를 보여주는 시로서 골든 에이지로 향하는 입처개진의 시세계를 여는 단초로 기대를 걸어보고 싶다.

 

 

 

김기용

 

건국대 국어국문학 석사

낙생고, 대원여고 국어 교사

대원외고 교무입학관리부장

대원국제중학교 교육기획부장

대원고 교감,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