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효된 시간의 프롤로그
나호열 · 문화평론가
망각의 힘
망각忘却은 삶의 슬픈 에너지다. 변화무쌍한 날씨처럼 우리의 일상도 맑았다 흐려지는 법인데 잊고 싶은 것은 잊혀지지 않고, 잊지 않으려 해도 잊혀지고마는 사람이나 사건은 시간이라는 강물에 쓸려나간 듯, 오롯이 마음 한 켠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건강한 사람에게 완벽한 망각은 있을 수 없다. 느닷없이 어느 순간,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일들이나 사라졌던 사람들이 기억의 문을 두드려 슬픔을 다시 들어올리고, 정처없는 기쁨으로 춤추게 하지 않는가. 그렇지만 망각의 틈새를 뚫고 솟아오른 기억들은 최초에 마주했던 기쁨이나 슬픔과는 그 결이 다르다. 올해 피어나는 꽃들이 지난 해의 그 꽃이 아닌 것처럼 시간의 풍화風化로 사실과 왜곡되거나 아니면 한결 승화昇華된 감성으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범박하게 말해서 시詩는 망각의 지층을 뚫고 솟아오는 기억의 편린을 호명하는 것이다. 호명된 기억들은 흘러간 시간의 더께를 벗고 오늘의 일상과 부딪치면서 시인詩人을 이끌고 간다. 그 때 시인은 감성의 농도에 따라 서정抒情의 노래가 되거나 서사敍事로 풀어지는 이야기의 진술을 택할 것인지의 갈림길에 놓여진다.
서혜경 시인의 첫 시집 『야생의 강』은 등단 10년 만에 내놓는 시집으로서 그동안 삶의 여로에서 마주쳤던 풍경들과 그 풍경 속에 명멸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서정의 길을 보여준다. 물론 서정시抒情詩의 본령이 그러하듯『야생의 강』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도, 이야기를 듣는 청자聽者도 시인 자신이다.
일반적으로 서정시는 시인의 독백이며 이때의 독백은 충돌하는 자아, 즉 과거 / 현재, 잠재되어 있는 내면 / 드러난 현상과 같이 서로 길항, 대립하는 과정의 발화發話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발화가 특수하면서 동시에 보편성을 확보한 서정이 되기 위해서는 시인이 걸어온 이력履歷을 간과할 수 없다. 어떠한 경우에도 시인이 견지하고 있는 세계관이 투명한 이성을 함유하지 않는다면 – 이 말은 시인의 도덕적, 윤리적 선善함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 제어하지 못하는 감정의 폭로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투명한 이성은 사유의 논리적 근거를 지닌 세계관을 투사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시집『야생의 강』은 한 생애를 걸어 “잘 견뎌온 오후 세시”(「오후 세시」) 에 다다른 시인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인생을 24시간으로 나누어 본다면 오후 세 시는 어디쯤에 와 있는 연대를 말하는 것일까? 아마도 번잡한 사회활동을 마치고 임서기林捿期에 들어서는 그 나이쯤이 아닐까?. 아무튼 시인은 자신의 반생을 돌아보면서 “잘 견뎌"왔다고 말한다. ‘견딤’이란 무엇인가? 그저 평탄하지만은 않은 신고辛苦가 시인 자신의 삶에도 역경逆境으로 찾아왔었음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시집의 첫 머리 시인 「오후 세시」는 삶의 ‘견딤’에 대한 위로이면서 위로를 넘어서는 안식을 찾아가는 새로운 출발을 예감하는 종착지이기도 하다. 어째든 오후 세시는 인생의 반을 넘어서는 심리적 공간을 제시하고 있음이 틀림 없다.
이런 장년기를 건너가는 심리적 공간을 사회심리학자 레이쳐Reicher는 5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성숙형은 자신의 현재 상황에 만족하고 일상적인 활동을 지속하면서 대인관계 또한 원활한 사람들이다. 은둔형은 번잡한 사회활동, 대인관계에서 벗어나 조용히 여생을 즐기는 자족감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무장형은 늙음을 거부하면서 신체활동의 노화를 막으려 하고 대외적인 활동을 펼치기를 원한다. 이에 반해 분노형과 자학형은 자신의 늙음에 대해 능동적 사고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국면에 처한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분노형은 삶의 목표를 이루지 못한 것이 시대적 상황, 경제적 여건, 기족의 문제 등에 기인하는 것으로 여기고 타인과의 원만한 사교나 타협을 이루지 못하는 유형이다. 자학형은 분노형과 달리 자신의 삶을 실패로 받아들이고 그 실패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단정함으로써 우울증과 자실의 유혹에 취약한 경향을 보이게 된다.
위와 같은 주장은 다소 도식적이고 기계적인 분류인 까닭에 모든 사람을 이런 심리적 구분으로 확연히 확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시집『야생의 강』의 전편은 시인이 가 닿으려 하는 성숙한 자족의 삶을 향한 여로인 동시에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연대적年代的 심리 상태를 가늠하게 하고 더 나아가서 이러저러한 삶의 굴곡을 가지런히 펼 수 있는 안식의 길로 스며들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음은 분명하다.
시간의 재현 再現
흘러가버리는 시간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다. 그러하기에 예술은 소멸의 운명을 지닌 시간의 항구恒久를 지향한다. 달리 말하면 망각을 극복하려하는 의지는 영생 永生의 욕구와도 그 결을 같이 한다는 말과도 통한다. 시인은 “저기 푸른 신호등 아래 / 한걸음씩 나에게 오는”(「미지의 사람」)시간을 마주하면서 “어떤 인생이 마지막 순간 / 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끝」)라는 번민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지난 올림픽 때 어린 양궁 선수가 마지막 시위를 당기고서 던진 ‘끝!이라는
외침을 기억한다. 아마도 그 어린 선수는 자신의 화살이 과녁에 적중해야 한다는 중압감을 이기고 마지막 시위를 당겼을 때, 그 심장을 조여오는 긴장과 압박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말하자면 자유를 느꼈을 것이다.
시인은 이 광경을 목격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삶은 끝을 향해 달려가는 것임을 알면서도 스스로 자신의 생生 앞에 과연 ‘끝’이라고 당당하게 단언할 수 있을” 지를 물어보게 되는 것이다.
숲에 들어가
노란 양지 꽃 반가워
언덕에 엎드렸네
흙은 따뜻하고
나비들 날아다니고
가슴을 대고 양지꽃과 눈 맞춘 곳
누군가의 무덤이었네
이름 모를 사람의 생生이
가슴으로 스며들었네
어느 사랑하는 사람 남겨두고
떠난 이의 이별이
가슴으로 스며들었네
얼굴 모르지만 그 사람
한 사람이 스며들었네
바람 불고 햇살 부드러운 날
흙은 한 사람의 생을 덮고
숲은 알맞게 빛나고
양지 꽃 한 송이
그 사람의 일생을 다 안다는 듯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네
- 「한 사람이 스며드네」
양지꽃은 새 봄 양지바른 들녘에 피는 야생화이다. 소담한 노란 색의 양지꽃이 무덤가에 피어 있는 정경을 바라보면서 그 꽃이 “그 사람의 일생을 다 알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시인에게 생사 生死는 삶의 끝남이 죽음이 아니라 연속되면서 서로 스며들어 있는 한 몸임을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인생은 안개를 헤치며 가는 길이고 그 어디쯤에서 “안개 흐르는 호수에서 / 먹이 찾던 새가 비상”(「사랑의 길」)하는 비감하면서도 아름다운 생의 끝 – 새의 비상 –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야생의 강』의 많은 시편은 ‘시간’이라는 삶의 족쇄를 풀어보려는 탐색과 간구의 여정을 보여주고 있다.「늙은꽃」,「그럼에도 불구하고」,「 누름화」같은 시편들은 오늘에 당도한 시인의 자화상을 여실히 드러내 보이고 있는 시편들이다. “청계천 / 빛의 축제에 / 늙은 꽃들이 / 잔치에 초대받아 / 추억을 되새김질하고 있다”(「늙은 꽃」)거나 “침묵하지 못한 시간 / 유리벽에 갇힌 것은 / 어쩌면 메마른 나”(「누름화」)라고 자조하거나, “내 나이 즈음의 이 시간을 껴안으니 / 들쑥날쑥 나이테들이 불규칙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고 토로하는 것에서 누구나 체험하는 삶의 쓸쓸함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회한은 한갓 감상感傷에 머무르는 것이 아님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늙어감에 대한 분노도 아니고 자학도 아닌, 오히려 부드러운 슬픔이라 명명해도 좋을 통찰에 의해 희석되고 있음을 눈여겨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조그만 물웅덩이에
우주가 들어 있다
-「반영」끝 연
이 묵직한 언명을 아포리즘으로 이해해도 될까? 이는 관찰과 상상력을 넘어서서 망각으로부터 호명해 온 과거의 시간을 반추하면서 오직 시인의 내성에 의해 응축된 용서와 화해, 그리고 반성을 포용하는 빛나는 예지가 아니겠는가!
시는 감정의 표현이기는 하지만 그 감정의 표현도구인 언어의 애매모호성으로 말미암아 표현의 굴절과 왜곡을 피할 수 없다. 언어가 지닌 양면성(기표와 기의)으로 인하여 창작자의 의도를 완벽하게 충족시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의도의 오류로 파생되는 불가피한 오독誤讀도 피할 수 없는 난제로 남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 덧붙여 지나간 시간을 재생한다는 것은 어제와 오늘 사이에 가로놓인 경험의 축적 방식에 따라 있는 그대로의 재생再生이 아닌 재현再現의 형국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요약해서 말하면 표현은 어느 사태에 대한 오늘의 언명이지만, 흘러간 과거를 표현한다고 할 때에는 이미 재현(재구성)의 영역에 머무르게 됨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시 한편을 읽어보자.
액자에 풍경을 집어넣으려 했던
젊은 날엔
연잎들이 푸르게만 보였다
액자에 드나드는
새들의 눈물을 볼 수 있는 나이가 되어
다시 찾아온 자리
액자 안에서 서성이던
강물은 하나가 되고
이내 이별을 한다
액자를 넘나드는
붉은 석양은
강물에 뜨거운 사연을 드리운다
액자의 배경이었던
연꽃들이 풍장(風葬) 되었을 때에
슬픔의 바깥은 그리움이라는 것을 알았다.
- 「슬픔의 바깥」전문
두물머리 라는 부제가 달린 이 시는 발원지가 다른 두 강물이 멀리서 다가와서 이윽고 한 몸을 이루어 바다를 향해 달려가는 장소(양수리)의 풍경을 담은 시이다.
누구나 그러하지 않은가. 세월이 흘러야 지난날이 젊음이었음을 깨닫게 되고, 그 때가 화양연화이었음을 애달파 한다. 정해진 규격을 가진 액자에 풍경을 담으려는 것이 젊은 시절의 꿈이다. 그러나 “새들의 눈물을 볼 수 있는 나이가 되”는 세월이 흘러가게 되면 공고했던 삶의 규범, 즉 액자의 무용함을 체득하게 된다. 이 시에서 시인은 어떤 슬픔도 시간이 흐르면 경계가 사라지고 그 슬픔조차 그리움이 된다는 사실을 두물머리라는 장소에서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정조는 누구에게나 얼마든지 찾아오고 느끼게 되는 공감의 영역이다.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하나의 현상에 대해서 사람마다 인식의 편차가 일어나며 그로 말미암아 소외와 격절의 슬픔이 일어나는 것임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
여인이 꽃잎을 말할 때
그는 촛불을 말한다
여인이 봄비에 눈물 흘릴 때
그는 찬란한 봄에 미소 짓는다
여인이 섬이 그립다고 말하면
그는 침묵하는 등대에 가고 싶어 한다
여인이 하얀 목련이 탐스럽다고 하면
그는 진달래 사랑이 좋다고 한다
여인이 달무리를 볼 때
그의 가슴엔 달 같은 여인이 떠오른다
우리는 모두 가슴 벅찬 봄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의 봄」전문
냉철하게 말해서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은 불통을 야기한다.「하나의 봄」은 공유할 수도, 공유되지도 않는 ‘관계’의 허구성을 이야기한다. 단독자인 실존은 언제나 슬픔을 잉태하고 그 슬픔은 망각 속에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삶에 새로운 의미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이 지나쳐 온 풍경들, 북촌, 혜화동, 순천만 갈대밭, 수타사 가는 길, 해바라기 밭, 신두리 사구 등의 풍경은 이제 발효된 시간 속에서 그 기억의 액자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늘 의식의 내면에 출렁거리는 야생의 강이 되어 자유의 영역으로 걸어 들어가게 된 것이다.
발효된 시간의 풍경들
야생의 고요
야생의 시간
야생의 노래에
길들여지지 않은 강은
사막에 도달했고
깃털을 달고 날고 싶었다
내가 꿈꾸는 야생의 강이
하늘로 흘러갔다.
- 「야생의 강」 4연, 마지막 연
야생野生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지만, 야생은 물(강)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시인에게 있어서 강은 약육강식의 아수라에서 벗어나 있는 존재, 오히려 무심함, 즉 자유의 상징이다. 우리가 일고 있는 강은 아무 것도 가지려 하지 않으며, 이것과 저것을 가리지 않고 한 몸을 이루며, 이윽고 정화淨化의 힘을 가진 것인데 시인은 그저 흘러감을 꿈꾸는 강, 마지막 도착지는 불모의 땅, 무無로 치환되는 사막으로 가닿아 그 무엇의 인과因果에도 얽매이지 않는 상태가 야생의 강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 까닭에 서혜경 시인이 궁구하는 자유는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으면서 그 어떤 소유所有의 욕구조차 갖지 않는 강이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 강은 시인에게 “안개로 다가오는 고요를 / 깊게 누르면 / 강물에 묻어나는 젖은 악보”(「메트로놈은 위대하다」)를 보여주고 “나의 비망록엔 푸른 행성이 / 또렷한 기억으로 일어나게”(「야생을 꿈꾸다」)만드는 에너지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과의 연대에 묶여지지 않은 자유를 시인은 야생이라고 달리 부르고 있으며 그 야생의 몸을 강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이 꿈꾸는 자유는 사회구성원으로서 – 시민, 집단, 가족 등-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하는 제도나 관습으로부터의 해방나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반기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물론 인륜을 저버린 한 가족의 비극을 그린 「슬픔의 목록」이나 수년간 계속되고 있는 역병疫病 으로 붕괴되고 있는 스산한 풍경을 그린 「산책」, 자본주의에서의 노동의 의미를 묻는 「살아가기」와 같은 현실을 비판하는 작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서혜경 시인은 일관되게 시간을 반추하고 소환된 시간의 풍경을 되새김하면서, 앞으로 다가오는 시간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을 초대하는 주체로서 자리매김하기를 염원하고 있는 듯하다.
여름 꽃 겨울 꽃 피고 지고
헐거워진 옛 노트를 넘기는데
나의 스무 살 꽃밭의 향기가
밀려오고 있어
- 「옛 노트」 마지막 연
한 쪽 눈에는
아직은 마르지 않는 눈물과
또 다른 눈은
호기심이 남아 있는
젊은 내 낯선 모습에
굴절 거울 앞에서 서성인다
- 「굴절 거울 하나 갖고 싶다」 1연
과거의 자신을 돌이켜 보며 시인은 꽃밭의 향기를, 세상을 두리번거리는 호기심 가득한 눈을 기억한다. 앞에서 언급했던「슬픔의 바깥」에서 그리움이 태어나는 곳이 슬픔이라고 하였듯이 서혜경 시인에게 있어서의 과거는 퇴행적 감상이 아닌 시간을 끌고 가는 평화로운 양치기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애이불상哀而不傷 이라 했던가. 부드러운 슬픔이라 지칭했듯이『야생의 강』편편에 보이는 슬픔에는 따뜻한 온기가 가득 스며 있다. 그 이유가 타고난 성품 탓인지, 신앙의 힘인지 알 수는 없지만 시인이 바라보는 세상은 충분히 살아야 할 이유가 내재한 낭만적 공간임은 틀림이 없다. 「꽃으로 핀 신발들」은 시집『야생의 강』에서 이와 같은 낭만적 정조를 보여주는 시로 특히 눈여겨 볼만한 시이다.
모양이 다른 신발을 모아
활짝 핀 꽃으로 만든 작품을 보았다
누가 걸어온 길인지
그 길 위에서
혹 주저앉은 적은 없었는지
신발들의 사연들이
꽃으로 피었다
어느 무도회에서
춤을 추던 신발일까
어떤 섬에서
조약돌을 밟다 벗어 놓았던 신발일까
단풍 잎 떨어지면 붉게 물들던 신발
꿈길을 걷던 신발
개미를 밟았던 신발일지도 몰라
얼룩진 신발들은 나비를 모으고
주소가 달랐던 신발들이
코를 마주하고
둥근 꽃으로 피어났다
신발은 길과 함께 태어나고 길에 의해 소멸하지만 시간이라는 길을 걸으며 남겨지는 추억의 발자국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소멸은, 추억이라는 꽃으로 다시 피어나서 영원으로 향하여 가는 나그네인 우리들에게 화관으로 얹혀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프롤로그의 시
시집『야생의 강』은 이미 말했듯이 서혜경 시인이 등단 이후 10년이 넘은 후에 상재하는 첫 시집이다. 추측하건대, 등단 이전에도 시작詩作이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야생의 강』은 시인의 전 생애를 횡단하는 여로의 일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유를 꿈꾸며, 시간에 속박되지 않기 위하여 그 시간을 사유하고, “백 년도 못사는 사람들이 와서/ 몇 억년 동안의 이야기를 / 한나절에 알려고 ”( 「풀등에서」)하는 어리석음을 깨우치고, 그럼에도 “풀등에서는 / 지금 이 순간의 춤을 추리라” (「풀등에서」)고 지금 이 순간을 고마운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공력은 오랫동안 시를 매만져온 소중한 선물이라고 믿고 싶다. 그런 까닭에 시집『야생의 강』은 서혜경 시인이 걸어가야 할 새로운 시간을 위한 프롤로그, 서시 序詩라 불러 마땅하다. 앞으로 서혜경 시인이 바라보는 세상과 걸어가야 할 길을 시인 스스로 이미 예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계는 그어 놓은 자의 몫
더 이상의 경계는 없다.
- 「경계는 없다」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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