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자적 존재 對者的存在의 자아 찾기
나호열(시인· 문화평론가)
1.
우리가 ‘존재’를 이야기 할 때 ‘ ~이다’와 ‘~ 있다’라는 두 개의 상황을 떠올리게 된다. 물론 여기서의 우리는 사유하는 기능을 가진 인간 일반이기 때문에 ‘존재’를 묻는 행위는 일종의 표현 욕구에 다름 아니다. ‘어디에 있다’는 장소성과 그 장소에 위치하는 ‘무엇이다’라는 발화發話는 그 존재를 드러내는 의식이면서, 무비판적인 본능에 충실한 것일 수도 있다. 어째든 이렇게 존재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은 인간에게만 주어진 능력은 아니다. 수컷 사슴의 뿔이나 공작의 화려한 날개, 암컷에 잘 보이기 위한 바우어 새의 집짓기 등도 자신의 존재를 보다 강열하게 알리기 위한 표현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 일반이 지닌 사유의 능력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을 자신 앞에 놓여진 사물을 통해, 다시 말하면 자신을 둘러 싼 인간을 포함한 자연에 대한 관심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고 스스로 확인한다는데 의미가 있다. 하이데거가 ‘세계 –내 – 존재’로 인간을 규정했을 때, 표현의 의미는 타자他者와의 관계맺음이며, 시간의 족쇄 속에 생명의 유한성을 인식하고 있음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지금 여기에 있는 ‘나’는 언제인가는 죽음을 맞이할 것을 아는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일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오갈 수 있는 상상의 힘을 가진 존재이기도 하다. 의식의 여행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런 능력은 단독자로 존재할 수 없는 ‘나’와 ‘너’가 서로를 향해 가는 지향성指向性을 통해 삶의 의미를 반추하게 만드는 원인으로 작동하고 있다. 김수영은 ‘죽음이 없으면 사랑이 없다’라고 하였다. 이 이율배반적인 선언의 진의는 무엇일까? 첫 번째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타자의 죽음은 ‘나’를 배제한 죽음일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서로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나’와 ‘너’는 ‘세계 –내 – 존재’로 분리할 수 없는 까닭에 타자의 죽음은 곧 ‘나’의 죽음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은 결여(부재)로부터 시작되는 갈구이며, 소멸로 종식되는 관념이기 때문에 ‘죽음이 없으면 사랑이 없다’는 언명은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사랑이 있다’ 라는 판단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요악해 본다면 이 세계는 불교에서 말하는 인다라망因陀羅網 과 같이 생명의 단절이 없는 곳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자신이 ‘세계-내- 존재’ 이거나 인다라망의 연쇄성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짐멜은 인간은 본능적 생명의 연장을 무의식적으로 욕구하는 존재가 아니라 보다 생명 존속의 욕구를 넘어선 가치를 추구하는 존재라고 하였다. 즉, ‘세계-내- 존재’ 의 의미와는 다른 방향에서 도덕과 윤리와 같은 사회화의 관습이, 자동화된 삶이 아닌 고양高揚된 가치를 향해 가는 삶의 의미를 추구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국가에 대한 애국심, 가족에 대한 희생과 봉사, 부의 축적과 명예의 획득과 같은 일련의 과정들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럼으로써 유한한 자신의 삶의 가치를 신념화하는 행동인 것이다.
2.
장갑생 시인의 시집『이슬은 영원하다』의 62편의 시는 위에서 약술한 바와 같이 대자적 존재에 대한 탐문으로 일관되어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대자적 존재란 무엇인가? 간단히 사전적 용어를 빌어본다면 “주관적인 자기 자신에게까지 거리를 두어 객관화하고 반성적인 관찰과 사유를 할 수 있는 높은 수준의 존재”로 정의 된다. 헤겔은 대자적 존재의 모순개념으로 즉자적 존재卽自的 存在,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매몰되어 주관적이고 고립적인 상태에 있는 존재”를 제시했다. 우리가 흔히 대자적 존재를 인간일반의 특성으로, 즉자적 존재를 이성을 구유하지 않는 사물 일반으로 개념화하지만, 엄밀히 따져본다면 모든 인간일반이 대자적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아님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 관습을 따라, 앞 서 말한 부의 축적과 명예의 획득 등등과 같은 매몰된 이기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마땅히 대자적 존재로서, 바로 그 대자적 존재에 대한 탐구를 부여받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장갑생 시인에게 시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시인의 할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한 마디로 장갑생 시인에게 시詩는 ‘어둠이 타고 있는 / 별을 뜨거운 손으로 부여잡고 / 번개가 만들어 놓은 길 따라 / 내게 데불고 오는’ (「시와 나」 부분)것으로서의 직관 그 자체이며 , 그 시를 받아 적는 시인은 ‘몸부림, 끝에 매달린 가시 하나 / 하나의 가시는 까마득한 미래로 태어난 / 별을 간직하려던 나의 상처’(「가시연」 부분)로 받아들이는 아픔을 기꺼이 수행하는 존재이다. 대자적 존재는 허튼 감상感傷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을 객관화 하는 존재라면 장갑생 시인이 취하고 있는 시와 시인의 대한 언명은 적확하게 대자적 존재의 위의 威儀와 일치한다.
따라서 이와 같은 시법詩法은『이슬은 영원하다』의 전편의 기조를 건조하고, 냉정하며, 암울한 사유의 파장으로 이끌고 간다. 장갑생 시인에게 서정抒情은 ‘A는 B이다’의 정언판단을 통한 부조리한 삶의 전복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이 선택한 오브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낭만적 감상感賞이나 섣부른 관조와는 거리가 있다. 시인의 여러 시에서 드러나는 시적 대상인 꽃이나 계절과 같이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사물이나 현상은 무정하고 시간의 연쇄성에 묶인 피조물로 자주 피력되고 있는 것이그러하다. 한 예를 들어보자.
봄은 내발에 채이는 돌자갈 태우고
친구처럼 어깨동무한다
우리는 길섶 벤치 위에 앉아 철쭉 꽃잎 따다
날 수 있는 법을 가르치지만
피 묻은 이파리 땅으로 떨어진다
- 「달과 월요일」 1 연
봄 나들이 나온 우리는 철쭉꽃을 따서 꽃잎에게 날 수 있는 법을 가르친다. 어불성설이다. 혼자가 아닌 우리라고 한 까닭에 철쭉꽃잎을 따는 행위는 다수에 의한 폭력을 상징한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허망한 이데올로기 – 나치즘이나 파시즘같은-에 함몰되어 광포하게 저질러진 만행을 기억하고 있다. 꽃잎에게 나는 법을 가르친다는 일의 무모함이 결국 이파리들을 피 묻게 만든다. 봄은 솟아남, 희망, 소생 등과 같이 상승의 이미지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에 반하여 이 시는 하강(죽음)의 이미지로 봄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시, 평화로운 강가의 풍경을 담은 시 「밤섬은 날마다 다르다」에서도 시인은 평화로운 풍경의 이면에 자리잡은 자아의 매몰 또는 군중의 고독을 ‘아무도 내게 다른 섬이라 말하지 않는다’는 진술로 무겁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3.
시집『이슬은 영원하다』의 얼개는 크게 나누어 ‘시간’, ‘관계맺음’, 그리고 ‘죽음’에 대한 사유로 나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이 세 개의 사유는 서로 길항하면서 또 한 편으로는 서로에게 삼투되어 있는 까닭에 시집『이슬은 영원하다』전체를 이 세 개의 관념이 서로 엉키고 뒤섞인 풍경 속으로 몰고 간다. 다시 말하면 『이슬은 영원하다』는 시간과 함께 변화하여 가는 단독자(시인)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는 세계의 심층을 파헤치는 인식의 탐문인 것이다.
살아갈 날보다
살았던 날들이 눈앞에 몇 안되는
잎덩굴손 붙들고 곁가지에서 떨어질 듯
바람에 부대낀다
...
시퍼런 칼바람 불어
등 뒤로 덤벼오는 불청객의 지척에서
낡아가는 옷깃 여미며
꽃등 빈 가지에 매달아 따사한 날 품고
무덤처럼 깊은 동짓달 건너리라
- 「11월의 애가哀歌」1연과 미지막 연
이 시는 어떤(사랑하는) 이에 대한 연가戀歌이며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그에게 바치는 만가挽歌이기도 하다. 화자는 소멸을 향하여 가는 인생의 11월을 빗대면서 시간의 무상함에 맞서고자 하는 자아를 잎덩굴손에 의탁하면서 무덤처럼 깊은 동짓달을 건너가겠다는 소멸을 동반하여 오는 시간에 맞서는 결기를 보여주고 있다. 시「달뿌리풀」에서도 먼저 떠난 ‘님’을 향한 애모를 노래하면서도 ‘물음에 답하지 못하는 남은 경계’, 즉 시간을 어떻게 지워야 할지를 탐문하는 의식을 토로하고 있다. 이러한 점이 시간에 대한 수동적이고 체념적인 정조를 배제하는 장갑생 시의 한 특질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인 장갑생에게 시간은 그저 소모되는 것도 아니며, 체념의 극한으로 몰고 가는 난관도 아니다. ‘세계 –내 –존재’ 로서의 ‘나’는 ‘너’의 부재함으로 인하여 오히려 강한 자아의 발현을 체험하게 된다. ‘그대 떠나보냄은 / 진정 그대를 만나려 함이다’(「그대 떠나보냄은」1,2 행)라고 하는 반어적 진술은 ‘우리 안에는 두 사람이 숨어 있고 / 그 한쪽은 언제나 위험하다’(「가인의 벌」마지막 부분)는 진술과 짝을 이룬다. 왜 그러한가? 우리가 자주 저지르게 되는 오류 중의 하나는 ‘나는 착하고 합리적이며 타자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과연 그 언명은 타당한 합리성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짧게 말한다
―좋은 사람이었어
―아니, 나쁜 사람이었어
- 「나에게 주어진 몸」부분
「그대 떠나보냄은」의 그와「가인의 벌」의 우리와「나에게 주어진 몸」에서의 그는 각기 다른 존재이면서 서로를 구유하고 있는 하나의 존재일 수도 있다는 의문을 갖게 한다. 떠남 –부재-으로서, 나와의 정情을 배제함으로서 선명해지는 ‘그’와 우리 안에는 두 사람이 숨어 있고 그 한쪽이 언제나 위험한 ‘나’일수도 있다는 사유로이끌려 갈 때, 좋고 나쁨- 호불호 好不好- 의 판단은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시인은 이미 사라져 버린 많은 ‘그’를 다시 호명한다. 시집『이슬은 영원하다』5부에 주로 배치되어 있는 시들, 「길섶 풀들에게 물장구치며」.「산마루 거느리고 그대는」,「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아무에게도 알리지 마라」,「시간의 이빨 사이에서」, 「가계家系의 손아귀에서」에는 부제로 각각의 이름이 붙어 있다. 지레 짐작일 뿐이지만 그들은 화자(시인)의 어머니, 남편, 친구일 수도 있고, 생전에 관계를 맺은 사람들일 수도 있다. 이 시편들은 한결같이 삶의 신고辛苦를 겪으면서도 무의미한 삶을 영위했던 사람들이 아니라 나름의 신념으로 삶의 가치를 드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화자(시인)는 이들을 호명하고 회고와 추모함으로써 어떤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 시편들은 표면적으로는 시인의 삶에 교훈을 주거나 돈독한 정을 나누었던 이들에 대한 찬사로 보인다. 그러나 시인이 이들을 자신의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는 이유는 그들의 개별적 삶이 화자(시인)과 단절된 것이 아니라 문화적 유전이라 일컬어도 무리가 되지 않는 존재의 영속성을 찾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편들에서 추출해 낼 수 있는 죽음은 단순한 소멸이 아니라 슬픔의 깊이로 침잠해서 누군가의 책상머리에 앉아 있는 생생한 실물로 탄생한다는 점이다.
걸림돌인지 디딤돌인지 자기가
모르는 눈먼 돌
우리가 따라갔던 물 속의 돌
물에게 어깨 빌려주고 함께 흘러가며
시린 뼛속에 쟁여있던
눈짓 하나 몸짓 하나 말 한 마디 남기지 않고
먼지 같은 가루되어 슬픔의 깊이로 침잠한다
표정 많은 물 모두 퍼내고 찾았다
고생대의 먼 끝자락에서
서걱서걱 갈대숲 헤치며 다가오는 뼈의 꿈
이파리 같은 환상으로 어루만지며
어루만지며 더 가까이 다가오는 손끝 마디에
따뜻해지며 부스스 열린다
책장 한 귀퉁이에 앉아있다
삭힌 눈물의 등피 닦으며
고이 받친 물의 날개되어
아로새긴 연륜이 그어놓은 목숨의 광채 되어
비로소 물결을 노래한다
「비로소 물결을 노래한다 ――수석水石」전문
「비로소 물결을 노래한다」는 이 시집의 백미白眉라 하여도 전혀 무리가 되지 않는 가편으로서 생명의 고귀함을 수석을 통해서 일깨워주는 것이라고 본다. 시인이 호명했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이 세계에 살았고, 죽었으며, 앞으로 이 세계로 찾아올 모든 사람들이 한 점의 돌로 수장되어 있다가. 물결무늬를 아로새긴 수석으로, 아니 한 권의 성경으로 존재할 것임을 시인은 가만가만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4.
그러나 이와 같은 시인의 탐문은 자아의 실체를 밝히고자 하는 회의 懷疑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결코 이루어낼 수 없는 것이다. 시「흔들리면서 여자는」은 명성황후의 생가를 다녀온 소회를 밝힌 시이다. ‘어느날 그가 saeng 이라 부르자 나는 / 살아 움직이는 생이 되었다 / 살아 움직이는 생이 되었다 / 이름 없던 여자에게 이름이 붙자 / 도처에서 여자들이 펄펄 날아올랐다’ (「흔들리면서 여자는」 부분)는 술회는 인간 장갑생이 당당한 여성으로서 새로이 태어난 자각인 동시에 더 넒게 오늘날의 여권 신장을 빗대는 중의를 포함하고 있다.
이미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타자에 대한 호불호의 평가는 무의미하다. 「가인의 벌」에서 ‘우리’ 에 속해 있는 ‘나’가 위험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갖고 있음을 보았다. 다시「그대 떠나보냄은」의 첫 문장을 떠올려 보자. ‘그대 떠나보냄은 / 진정 그대를 만나려 함이다’.의 떠남과 만남은 단순히 시간의 경과에 따른 유의미성을 따져보는 일이 아니다. ‘나’와 대응하는 ‘너’의 부재가 가져오는 편견과 오류를 사상하고 확실하게 ‘나’의 자아를 드러나게 하는 일임을 자각할 때『이슬은 영원하다』가 찾아내고자 했던 순수한 자아가 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명성황후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걸이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정권에 대한 탐욕을 지닌 인물로서 상반된 평가받기도 한다. 어째든 「흔들리면서 여자는」은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은 존재의 당위성을 깨닫는 외침으로서 그 의의를 다한다고 볼 수 있으며 . 한 개인의 인간성에 대한 절대적 평가가 불가능함을 일깨워 주기도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시인이 체득한 확고한 정체성은 그 공고함과 비례하여 한 개인의 정체성이 오히려 모호해지는 사유의 역경逆境을 맞이하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불교에서 말하는 ‘이것이 있음으로서 저것이 있다’는 연기緣起는 힘들게 구축한 자아의 정체성을 휘발시키는 기제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같은 풍경을 보면서도 다른 세상을 이야기하게 만드는 ‘세상과 과감히 맞닥뜨리며 너를 지켜주는 / 너와 나 사이를 가로막는 통유리 벽’( 「사이, 너 와 나의 통유리벽」부분)이 ‘세계-내- 존재’의 통일적 순일함을 방해하는 동시에, 그럼에도 확실하게 ‘나’와 ‘너’의 변별성을 구획하지 못한다는 모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시 한 편을 읽어 본다.
앞서 걷는 미니스커트 긴 머리카락 어깨 위에 상체를 올려놓는 나의 그림자, 그녀의 허벅지에 슬쩍 팔 밀어넣는다 훌쩍 두 배로 자란 그림자의 석양은 낯 붉히고 밤의 젖을 빨며 살찐 그가 말한다
―나는 없다 어디 있는가 찾아보라
불사조의 재와 같은 머리채 흔들며 모두 서툴고 활기찬 아침으로 돌아온다 이어폰 낀 학생들 만지며 뿌리 깊은 유혹의 노래 부르고 새장 속 새처럼 가두고픈 청년 따라가다 문득 고개 돌려 군중에게 허름한 자유 짓밟게 한다 굴리고 싶은 바퀴들 수두룩하다
하늘 높이 끝없이 올라가며 비행기는 작아지다가 장난감 모형으로 줄어들면서 땅 위로 끌려간다 착륙하여 내려오는 동안 커진 그림자 실체보다 웃자라 납작 엎드린다
그림자의 운명과 내 운명은 연결되어 있다 사로 묶인 것을 알고 있는데 무엇이 두려운가 빈 활주로 녹슨 서풍에 떠 밀려 끌려가지 않으려면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면 존재를 비출 빛
그림자 해체하는
살 떨리는 벼락의 길 찾아 헤맨다
- 「그림자 유희 遊戲」 전문
「그림자 유희 遊戲」는 오늘날의 우리 삶의 양태를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는 재미있는 시이다. 디지털에 기반한 혁명에 가까운 기술의 발전은 상상을 넘어 환상의 세계가 실재화되고 가상현실이 실제 현실을 무력화시키는 지경으로 우리를 몰아가고 있다. 개성이 강조되면서, 자신만의 개성을 가져야 하는 동시에, 한 세데에 풍미하는 트랜드에 따라가지 않으면 뒤처지거나 따돌림 당하는 불안과 두려움에 오히려 몰개성의 획일화가 가속화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 시가 뜻하는 바는 늘 간절하고 기쁜 마음으로 서로에게 연결된 관계가 아니라 마치 유령처럼 서로에게 의식되지도 않고 단지 그림자로 서로 얹힌 채 명멸하는 비대면의 유혹에 깊이 침윤되어 가고 있는 존재가 우리라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러한 묘사는 현상에 대한 단순한 관찰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존재가 지니고 있는 본질에 대한 탐구가 이루어진 결과물이라는 점에 있다.
나에게 너는 없다
너로 가득 차 있는 줄 알았는데
서로가 하나인 줄 알았는데
콩꺼풀 쓰이듯 불린 콩꺼풀 벗겨지는
찰라의 두레박으로
어느새 나는 돌아와 있다
- 「네가 없다」 1연
이 시를 읽어보면 자칫 허무주의적 징후가 농후한 관점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림자 유희 遊戲」와 함께 이 시는 ‘나에게 너가 없는’, 상황이 ‘너는 나에게 없는’(「네가 없다」 2연 참조) 존재 일반의 부재를 강조하는 것으로 읽어야 한다.
이야기의 순서가 뒤엉켜버린 느낌이 있지만 「비로소 물결을 노래한다」를 읽으면서 시인의 행보를 더듬어 본 바, 생명의 고귀함과 영속성은 무화 無化되어버린 존재의 행방을 찾아내고 그 존재의 실존을 증명해냄으로써 그 의미를 보장받을 수 있다고 확인했다. 말하자면 대자적 존재임을 자각하고 우리는 서로 서로 관심을 주고 받을 때 실존實存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장갑생 시인은 오늘의 삶이 봉착한 존재의 부재 내지는 무화의 난경을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을까? 『이슬은 영원하다』의 1부의 ‘사이’ 연작시는 이 시집의 첫 머리이면서 시인의 사유의 종결점이다. 진정한 실존이 어려워진 오늘의 삶에서 시인은 ‘사이’의 개념으로 그 모든 회의와 절망을 전복시킨다.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세계-내- 존재’의 재결합은 ‘사이’에 대한 의미를 재해석함으로써 가능해질 수 있다.
말하자면 ‘나’와 ‘너’는 모순개념이 아니라 - ‘나’와 ‘너’ 사이에 사이가 허용되지 않는 - ‘나’와 ‘너’ 사이에 무수히 존재하는 ‘나와 너’의 실재를 인정하는 반대개념으로 받아들일 때 ‘ 미래로 가는 길 / 어제를 잘라 버리려 애쓰는 오늘에야 / 비로소 그가 없고 내 살아있는’(「사이, 어제와 오늘」 부분)지점에 도착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사이’의 개념은 어울리되 같지 않은 화이부동和而不同(『논어』:자로편 참조)의 세계로의 진입을 용이하게 만든다.
시詩의 영토 위에서 양파를 썬다 깃들여진 매운 맛이 먼저 달려온다 눈물 찔끔거리며 말한다 이제 잊어줘요 제발 방천 防川따라 흔들리는 억새꽃의 희망과 자갈밭 사이 일구어놓은 풀빛 자유가 남아 있을까요 그가 불렀던 노래와 전율했던 초저녁이 돌아올까요 사람들 눈시울 적신 지난 날 그의 햇살 한 대접 펼쳐 보일 수 있을까요 한 켜 들춰보세요 다시 한 켜 들춰도 다르지 않은 날개뿐 서로 다른 우리들 묶는 무엇이 있을까요
양파 썰다가 보았다 날개 사이 날개와 날개를 접착하는 얇디얇은 막, 사랑이었다
- 「사이, 양파의 날개」전문
이 시는「비로소 물결을 노래한다」와 더불어 시집『이슬은 영원하다』가 단순히 각각의 시편의 집적이 아니라 장갑생 시인의 시와, 시간에 맞서는 존재의 생멸과 그로 말미암아 빚어지는 삶의 의미를 궁구하는 치밀한 사유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매우 뜻깊은 시라고 여겨진다.
시의 영토 위에서 양파를 써는 행위는 「시와 나」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세계를 직관으로 꿰뚫어 보면서 – 양파를 썰면서- 기꺼이 그 매운 맛의 고통을 감내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양파의 매운 맛이 불러일으키는 고통과 아픔은 지금은 사멸해버린 옛사람을 초혼 招魂하는 의식儀式이다. 그 의식은 – 양파를 써는 행위-는 거듭 날 수 없는 똑같은 날개를 벗겨내는 무위無爲에 불과한 절망이다. 그러나 시인은 끝내 날개와 날개 사이에 존재하는 얇은 막을 발견하면서 그 막이 사랑이라고 선언한다. 다시 상기하건대, ‘죽음이 없으면 사랑이 없다’는 정언명령(판단)은 장갑생 시인의 「사이, 양파의 날개」에서 다시 그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사랑은 무조건적이며 아가페의 자리에 이르는 숭고한 정신을 일컫는다. 그리하여 시인은 시「이슬은 영원하다」에서 다시 한 번 사랑의 불멸을 노래한다. 우리가 초로草露라 일컫는 작은 이슬방울은 햇빛에 쉽게 사라져 버리지만 한 번도 풀잎에 맺히지 않은 때가 없었다.
사랑이 그러하다!
*장갑생
2001년 『시와산문』으로 등단
시집 『내 뼈의 뼈』, 『풀섶 풀입사귀 귀로 앉아』, 수필집 『당신은 나에게』
한국녹색시인협회 회원, 한국기독교문인협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광화문시」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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