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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빈 시집 : 『칸나의 독백』: 시간의 향기를 사랑으로 담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2. 9. 6. 14:27

跋文

시간의 향기를 사랑으로 담다

나호열 (시인. 문화평론가)

 

1.

 

우리는 삶의 가치를 의미하는 경계가 사라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공고해 보였던 규범이나 의식이 그 쓸모를 의심받고 있는 것이다. 페미니즘의 역사는 몰라도 남과 여의 차별적 의식이 무너지고 있음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이고 전통적 관혼상제冠婚喪祭도 점차 현실과 거리가 먼 의식儀式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닌 세태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욜로 YOLO (you only live once )라는 신조어가 이제는 더 이상 새삼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욜로 YOLO를 직역하면 ‘너의 인생은 한번 뿐’이므로 불투명한 미래에 기대를 걸기보다 지금 누릴 수 있는 행복과 즐거움을 만끽하는데 힘을 기울이겠다는 요즘의 2,30대의 생각을 누가, 어떻게 나무라겠는가!

 

 

그러나 이런 시대의 조류에 당혹스러움을 느끼게 되는 세대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으니 대체로 해방 전후에 태어난 세대들이 그러할 것이다. 농경사회에서 산업화 사회로, 이제는 디지털로 무장한 첨단의 정보화 사회로 진입한 그 모든 장면들을 목격한 사람들이 바야흐로 노년의 지경地境에 닿아있는 것이다.

 

 

빈곤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풍요로 이동한 사회 속에서 그들이 지니고 있던 가치의 기준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그에 따라 마치 당연한 듯 여겨졌던 금기 禁忌에 억눌렸던 삶에 대한 자각이 솟구쳐 오르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삶을 복기復期하고, 그 복기를 통해 다시 자신의 삶을 정열整列하고, 즐기고자 하는 생산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를 간단히 부연한다면 ‘탐구하는 존재 Homo Sapiens’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놀이하는 존재 Homo Ludens’로서 정신적 창조활동에 다다를 때 삶의 위의 威儀는 한층 더 고양될 것이라는 욕구를 지니게 되었다는 말이다.

 

 

정빈 시인의 첫 시집『칸나의 독백』은 위와 같은 맥락을 짚어낼 때 한층 각 시편이 뿜어내는 간결하고도 내밀한 시의 향기를 함께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집은 지나온 시간의 갈피 속에서 시인 자신이 꿈꾸었던 삶을 소환하고, “잊혀져 갈 / 오늘의 페이지 한 장 넘”(「을지다방」마지막 연)기는 희망을 다짐하는 인생 2막의 첫 걸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2.

 

시집『칸나의 독백』은 정빈 시인이 전 생애를 통해 얻고 싶은 “ 언젠가 누구에겐가 / 한 번쯤 고백하고 싶은 말 / 아니 듣고 싶은 말”(「워 아이 니」5연), 즉 ‘사랑’을 염원하는 시편으로 가득 차 있다. ‘언젠가’ 가 암시하는 아득한 기다림과 ‘누군가’가 보여주는 막연한 그리움의 풍경은 담백한 슬픔의 수채화로 구현되고 있다.

 

 

시인은 그가 살아온 시간을 호명하고, 그 시간 속에 잠들어 있는 풍경을 되새김하면서 결코 잊어서도, 잃어서도 안되는 생명의 에너지인 사랑을 간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여지는 것이다. 그러나 시집의 첫 머리 시인「여백」을 읽게 되면 시인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사랑은 언제나 행복한 미완성임을 예감하게 된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한 평을 품었습니다

 

버리지 못한 꿈 하나 그렸다 지우고

 

또 지웠다 그립니다

 

흔적은 무죄라고

 

하늘은 마냥 푸른 여백을 내어 주시고

 

어두워지는 내 눈을 씻어 줍니다

그곳은

또 하나의 세상, 나의 휴게실입니다

 

 

                                         - 「여백」 전문

 

 

『칸나의 독백』의 첫 머리를 여는 이 시는 시인이 시작詩作을 시작始作하게 된 이유를 드러내기도 하고, 삶의 염결성 廉潔性을 확인하는 소도蘇塗로 하늘을 비유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시인이 우러르는 하늘은 천상계 (이데아)에 닿을 수 없는 현실의 누추함을 고백하는 고해소이며. 그 고해소가 또한 시詩임을 천명하는 중첩된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는 시인 스스로를 ‘붉은 칸나’ (「나도, 칸나」참조) 로 지칭하면서 ‘붉음’이 함유한 열정과 사랑이 여름 한 철에 피고 지는 유한함이 아니라 무한히 발화해야 할 삶의 근거임을 다짐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하기에 시는 무한히 발화해야 하는 존재를 존재답게 만드는 도구로서 “반짝이는 언어를 찾아 / 아픈 세상을 위로하는 무지개”(「월요일의 연인들」 8연)를 좆는 힘을 시인에게 부여한다.

 

그렇다면 시인은 어떤 존재일까? 시인은 망원경의 마음으로 저 궁휼한 우주의 별들에게 이름을 불러주고, 세밀하게 발밑에 밟히는 풀꽃과 같은 미물들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사람이다. 눈빛이 닿지 않은 별들이 너무 많아 외롭고, 개미의 노동을 함께 하지 못해 애달픈 사람이다. 그런 마음을 시인은 이렇게 읊었다.

 

 

우물 속 아래 기와집 한 채

 

감추고 싶은 비밀이 생기면서

낮은 음으로 흔들리는 그곳에

 

마음을 숨겨 놓았다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

저 홀로 길어 올리며

도달할 수 없었던 그 깊은 심연

 

목마른 사람들 발자국과

뜨거운 염문까지 묵묵히 지켜주던

열길 마음 속

 

눈 맞추던 눈동자

몸살처럼 찰랑댄다

 

기와집 문지기에 덜미 잡힌

아득한 세월

지금은 사라져버린

그 우물

 

그리운 날

 

                         - 「우물」 전문

 

 

이 시는 우물의 깊음과 기와집의 쇠락과 그곳에 깃드는 마음이 하나의 자아로 통합되면서 모든 존재에게 선물로 드리운 시간과 그 시간이 지나가며 남긴 잔영을 되새김질 하게 한다. 우물도 마르고 기와집도 사라지고, 별을 헤던 순수한 마음도 떠나버려 남은 것은 오직 수없이 원을 그리며 둥글게 돌고 있는 시간 뿐이어서 결국,시간이 존재의 술래가 된다는 빛나는 예지를 품게 된다.

 

 

돌부리에 채이면서도

곁에서 맴돌았을 몸짓들 흘려보내고

눈치 없이 내 아픔만 기억했다

 

그리고 술래가 되어버린

긴 세월

 

                                    - 「술래의 세월」4, 5연

 

 

엄밀히 말해서 시간은 모든 존재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존재의 숙주宿主이다. 일찍이 하이데거가 갈파한 ‘시간은 살아가는 방식에 따라 가변적可變的’이라는 주장을 시인은 “술래가 되어버린 / 긴 세월”이라고 다시 바꿔 말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잇는 바로 이 순간이 “한명숙의 노란샤쓰가 제격인 자리에 / 방탄소년단의 싸인과 포토존 / 과거와 현재가 접속 중”(「을지다방」 6연) 임을 체득할 때, 마르고, 사라지고, 떠나버린 존재는 삶의 새로운 각성으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시인은 그런 각성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흐르는 시간에 투신하며 뛰어야 할 시간

아름다운 2막의 생

이제는 간직하려고 해

 

                                - 「얼음 같은」 마지막 부분

 

 

삶의 신고辛苦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역경逆境은 역설적이게도 ‘생각의 노동자’( 시「보문사」참조 )로서의 시인을 탄생시킨다. 어찌 보면 시의 본질은 절망과 비탄에서 비롯되는 삶의 비극성悲劇性과 맞서 싸우는데 있으며, 그 싸움과의 숙고熟考가 서정抒情을 낳는 것이다. 그런데 장빈 시인은 자신이 겪었던 삶의 신고와 역경을 애이불상哀而不傷의 시법으로 판단중지 시킨다. 즉, 어설픈 극복의 포즈를 취하지 않고 현상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감정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새로운 서정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렇다고 해서 정빈 시인의 시가 개인 서사敍事에만 머무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세월호의 아픔을 환기시키는「팽목항의 파도」, 오늘날 횡행하고 있는, 내 주장과 다르면 적이라는 맹신과 광신의 불안을 이야기 하는「언제쯤」, 자본논리에 따라 원주민이 주변으로 밀려나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을 고발하는「가로수길」등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슬픈 그늘에 주목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한 시 중에서 한 편을 읽어보기로 하자.

 

 

성남 IC 입구에

“장어의 꿈” 간판이 걸렸다

 

이른 점심시간, 메뉴판 위에서

장어의 꿈이 팔리고

그 꿈을 먹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승천이라도 할 듯 용맹 넘치는 녀석들

죽음을 예감한 것일까

헐거워져 가는 수족관의 공포가

처절한 몸부림으로 출렁인다

 

산란을 위해

남대천 하구의 거친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힘찬 연어들의 이야기는

명곡으로 남았는데

 

덫에 걸린 녀석들의 꿈은

한 끼의 허기에 붙들린 채

검은 연기로 피어오른다

 

푹 푹 눈은 쌓이고

포만감을 안고 돌아가는 사람들의 등 뒤로

툭 툭 끊어지는

녀석들의 붉은 아우성

 

먹구름 내려앉은 하얀 눈길이

몹시도 구불거린다

 

                              - 「알 수 없는 꿈」 전문

 

 

장어長魚는 강장强壯식품으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이 즐겨 먹는 어류이다. 시「알 수 없는 꿈」은 왁자지껄한 장어 음식점의 풍경을 통해서 인간이 지닌 식탐을 상기한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이 육식에 의한 충분한 단백질의 섭취가 가능해지면서 뇌의 활성화가 이루어짐으로써 궁극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이성을 가진 존재로 진화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과도한 육식에 대한 반감이 채식을 권장하는 기류 또한 만만하지 않음도 생각해 보아야할 문제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꿈」은 음식점의 상호가 ‘장어의 꿈’인 까닭에 ‘장어의 꿈이 무엇일까?’ 하는 의문을 던지는 것에 방점을 찍는다. 채식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피터 싱어 Peter Singer가 주장한 바대로 인간 아닌 동물 살해와 고통 야기의 종식을 향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매우 실천적이며 효과적인 행보가 채식을 실행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를 확대해석하는 느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장어에게도 꿈이 있을 것이다’라는 가정을 온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모든 생명체는 마땅히 살아야 할 꿈이 있다는 가정이 못마땅하기는 하겠지만 그 가정이 불편한 진실을 담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못한다. 가축을 기르거나 양식을 하는 행위가 필수적인 생존을 넘어서 부富를 욕망하는 과도한 약탈과 착취라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시「알 수 없는 꿈」은 장어의 꿈을 알 수 없다는 이유로 장어 섭취를 정당화하는 우리의 의식 속에 자리 잡은 약육강식의 옹호가 사회적 불평등을 야기하는 기점이 된다는 사회적 비판의 암유暗喩로 읽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3.

 

 

이 글의 서두에서 시집『칸나의 독백』의 요체가 지나온 시간의 갈피 속에서 시인 자신이 꿈꾸었던 인생 2막의 첫 걸음이라고 이해했다. 또한 시간 속에 잠들어 있는 풍경을 되새김하면서 결코 잊어서도, 잃어서도 안되는 생명의 에너지인 사랑을 간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시인이 꿈꾸는 사랑의 실체가 무엇인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다.

 

 

『칸나의 독백』에서 ‘사랑’이라는 어휘가 직접적으로 드러난 예는 그리 많지 않다. “소낙비여! 가시 같은 사랑”(「소낙비」마지막 연)이나 “그 중에 하나, 질긴 사랑”(「지우개」 3연) 이 드문 예에 해당한다. 「소낙비」는 개인 서사가 감춰진 어떤 사람을 그리워하는 시이며.「지우개」는 노쇠하여 가는 어머니를 애틋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자식의 아픔을 그린 시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사랑의 단계는 육체의 성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려는 육체적인 충동인 에로스 Eros로부터 점차 가족 구성원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인 헌신(스테르고), 우정, 초월적 사랑인 아가페에 이른다. 빵가게를 운영하는 아들을 응원하는 시 「빵 굽는 아들」, 늙은 아버지의 헌신을 빗댄 시「나목」,「꿈길」,「신호등」, 젊은 어머니를 회상하는 「분꽃의 향기」등은 시간을 횡단하여 가족 간의 공고한 유대를 이야기하고 있는, 헌신의 사랑을 추억하고 있는 시편들이다.

 

한 마디로 사랑은 배움을 통해서 체득되는 감정이다. 가장 낮은 단계의 에로스도 혈족으로부터 받는 헌신을 배우지 않으면 스스로 사랑을 베풀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없다. 13세기의 페르시아 시인 잘랄루딘 루미Jalal ad-Din Muhammad Rumi가 ‘사랑이란 우주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다.’라고 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명언이다.

 

 

사랑이 곁에 와 있을 때

당신은 아름다운 사람

 

사랑이 곁을 떠났을 때

당신은 더욱 아름다운 사람

 

                             - 「스크린 1」 부분

 

 

시간은 괴고壞苦의 슬픔을 준다. 회자정리 會者定離는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운명이다. 헌신의 마음을 아낌없이 주는 사람은 아름답다. 더 나아가 사랑의 주체가 소멸(이별)한다고 해도 사랑은 영원히 살아 숨 쉬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시에서 사랑과 당신은 따로 구분되는 실체가 아니라 사랑이 곧 당신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때 시인의 사유가 보다 명확해진다.

 

 

시든 상처로 길들여진 생

 

의미를 삭제 당한 향기는

 

땅에 묻혀 사라졌지만

 

함부로 밟지 말아요

 

이제 나만의 향기로

 

절기마다 맨발이 아름다운 생으로

 

더 넓게 피어나렵니다

 

함부로 탐내지 말아요

 

 

                                      -「꽃의 독백」 전문

 

이제 시인은 “사랑이 곁을 떠났을 때 더욱 아름다운 당신이 되겠다”고 언명한다. “맨발이 아름다운 생”으로 스스로 사랑을 주는 주체가 되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 언급하지 않는 많은 시편은 시「나도, 칸나」로 압축되어 있는 생의 활기를 찾고자 하는 행위들을 보여준다. 핑크 색 하이 힐을 신는다거나, 머리를 염색한다거나, 왕관과 같은 모자를 쓴다거나, 왈츠를 추고 싶다는 등등의 말들은 시간에 저항하며 젊음을 되찾겠다는 중년(?)의 안간 힘으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급격하게 변화한 사회의 여러 현상에 방향을 잃은 채, 끝내 버리지 못한 공고한 인륜의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인이 되어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사랑하겠다는 의지의 판타지인 것이다.

 

거울아! 가끔 거짓말도 괜찮아

 

                                            - 「판타지」 마지막 행

 

5.

 

 

그리하여 『칸나의 독백』은 온전히 자신을 사랑하고자 하는 열망의 완결을 보여준다. 그러나 자신을 사랑하는 일은 미완성이며 현재진행형인 까닭에 정빈 시인이 장차 펼칠 인생 2막의 풍경들이 기대된다. “태울 것 모두 태우고 / 후회없는 / 우리 한 줌 재로 남”( 「스크린 2 」)는 풍경들이 정밀하고 아름다운 시어로 피어나는 날을 기다려 보고 싶은 것이다.